KBS 수신료 1000원 인상안 기습 처리 등의 해프닝에 부쳐
· 소주 1병
· 껌 한 통
· 200ml 우유 한 통
· 할인 중인 빵 한 봉지
· 중국산 문구류…….
대형 할인점에서 1,000원으로 구매할 수 있는 상품의 목록이다. 10원짜리가 더 이상 일상생활에서 의미 있게 쓰이지 않게 된 지 오래다. 100원짜리도 거스름돈으로나 쓰이니 사정은 비슷하다. 그러나 그 10원의 10배, 100원의 10배인 1,000원의 가치도 예전 같지 않다.
오죽하면 ‘개도 물어가지 않는다’라는 표현으로 그 가치가 폄하되기도 하겠는가. 그러나 남의 돈 1,000원은 어떤지 모르지만, 내 주머니에서 나가는 1,000원의 가치는 절대 작지 않다. 한 끼니를 때울 수 있는 라면 두 개를 너끈히 살 수 있다면 그 액면가의 위력을 다시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생뚱맞게 일천 원의 가치를 뇌는 까닭은 정치권의 한국방송(KBS) ‘수신료 인상’ 논의 때문이다. 지난 20일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문방위) 법안심사소위는 KBS 수신료를 월 2500원에서 3500원으로 1000원 인상하는 안을 기습 처리한 것이다. 한나라당과 자유선진당 의원들의 찬성으로 가결된 이 안에 대해 민주당은 표결에 참여하지 않는 방법으로 가결을 도왔다.
뒤늦게 여론과 관련 시민사회단체들의 반발에 덴 민주당이 ‘원천무효’를 선언함으로써 이 문제는 어정쩡한 코미디가 되기는 했다. 그러나 이 웃지 못할 해프닝은 말끝마다 ‘민생’을 외치면서 정작 국민의 지갑 여는 데는 무심한 ‘선량’들의 밑천을 드러내는 일조한 듯하다.
‘남의 돈 천 원은 내 돈 백 원만 못하다’
남의 주머니에서 나가는 천 원은 내 주머니 속의 100원보다 못한 법이다. 만약 그게 국회의원들의 세비나 수당을 삭감하자는 안이었다면 그들은 그처럼 흔쾌히 표결에 참여할 수 있었을까.
정말 국민 주권을 위임받은 선량이라면 국민이 감당해야 할 부담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태도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학교운영위원회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니 꽤 오래된 이야기다. 어느 날 교장이 회의에 보충수업비 인상안을 기습 상정했다. 정작 교 사위원들에게서 논의도 없었던 일이었는데 교장이 그걸 기습 상정한 뜻은 미루어 짐작할 만했다. 이른바 ‘간접수당’으로 수업하는 교사들 못지않은 액수를 받아 가는 교장은 그걸 좀 늘이고 싶었던가 보았다.
당연히 교사 위원들은 반대했다. 그때 우리 주장의 근거는 ‘천 원을 우습게 보지 마라’였다. 교사가 부담해야 하는 경비에서 천원, 2천원 인상은 온갖 설왕설래 끝에 이루어지곤 했던 전례를 들면서 우리는 학부모에게 떠넘기는 부담이라고 너무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었다.
교장 대 교사의 대립으로 치달은 의견 대립은 자신의 부담이라는 점을 깨달은 학부모와 지역위원들이 교사의 주장에 손을 들어줌으로써 명쾌하게 정리되었다. 자신의 복안을 관철하지 못한 채, 회의가 끝나자, 벌레 씹은 표정으로 서둘러 회의를 끝내고 사라지던 교장을 보면서 우리 교사위원들은 우리의 선택이 얼마나 올바른 것이었는가를 두고두고 되새겼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수신료 인상의 부당성은 천 원의 가치와 비길 수 없다. KBS 수신료 인상 저지 범국민행동이 “지금 KBS 이사회가 수신료 인상 규모를 논의하는 것 자체가 부당하다“며 ”KBS가 ‘정권의 나팔수’라는 비난을 받는 상황에서, ‘조중동 종편’을 지원하려는 목적으로 수신료 인상을 밀어붙인다면 그 결과는 ‘국민적 저항’일 뿐이라고 경고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땡전 뉴스’가 기억에 새롭다. 그 저항으로 시청료 징수율이 44%까지 떨어지고 ‘권력의 방송’ KBS는 국민으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그게 겨우 25년 전의 일이다. 2011년 현재 한국방송이든, 권력이든 그 시절의 역사적 교훈을 성찰하지 못한다면 케이비에스가 가는 길은 자멸뿐이라는 걸 모두가 안다. 그걸 알지 못하는 건 오직 권력과 거기 빌붙어 스스로 권력의 도구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 한국방송 경영진일 뿐이다.
2011. 6. 24.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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