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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행복한 책 읽기

열일곱 아들 때문에…조선 양반이 보낸 ‘욕망의 편지’

by 낮달2018 2021.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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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전경목  지음  <옛 편지로  읽는  조선  사람의  감정>

▲ <옛 편지로 읽는 조선 사람의 감정>(전경목,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21)

팔순, 구순에 이른 학자들이 책을 내는 시절인데 이제 겨우 육십 대 중반을 간신히 넘긴 터수에 나이 들면서 책 읽기가 쉽지 않다고 하면 건방이 하늘을 찌른다고 욕을 벌 수도 있겠다. 그러나 평생을 연구와 저작으로 살아온 학자들과 고작 소설깨나 읽은 데 그친 무명소졸을 나란히 견줄 수는 없다. 

 

정독을 해야 할 책은 말할 나위도 없고, 설렁설렁 읽어도 좋은 가벼운 읽을거리도 펴들고 반 시간을 버티지 못하는 상황인지라, 책 사기가 두려울 때가 많다. 그러다 보니 살 때의 욕심과 달리 책은 두어 달 책상 위에 굴러다니다가 서가 한쪽으로 사라지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닌 까닭이다. 

 

사대부들, 편지로 감정을 진솔하게 드러내다

 

그러나 나는 지난 4월 하순, 전북 부안의 지인으로부터 추천받고 펴든 신간 <옛 편지로 읽는 조선 사람의 감정>은 드물게 사흘 만에 읽어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이 펼쳐준, 전근대 조선을 산 벼슬아치들이 내밀하게 전하는 삶과 당대 사회의 풍속도가 무척이나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양장본 422쪽에 담긴 것은 학교에서 배운 거시사(巨視史)로는 이르지 못하는 그 시대의 일상적 삶이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 대학원의 고문헌 전공 전경목 교수가 쓴 이 책의 텍스트인 ‘옛 편지’는 조선시대 부녀자들 사이에서 주고받은 순 한글 편지인 ‘내간(內簡)’과는 다르다. ‘언문’으로 쓰여 ‘언간(諺簡)·언찰(諺札)’이라 불린 ‘안편지’와 달리 이 책에서 다룬 편지는 사대부들이 주고받은, ‘간찰(簡札)·서찰(書札)’로 불린 순 한문 편지다. 

 

저자는 우반동(愚磻洞, 전북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의 부안김씨 종가(宗家)에서 16세기부터 500여 년 동안 주고받은 수백여 편의 간찰을 연구하다가 거기 나타난 “우반동 사람들과 그와 교유했던 인물들의 솔직한 감정 표현과 사실적인 기록에 주목”했다. 

 

역사학자로서 그는 조선조 사대부들에게 “개인적 감정은 통제나 억압 또는 절제의 대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간찰을 통해 뜻밖에 그들이 자신의 감정을 매우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들이 때로는 솔직하게, 때로는 “격정적인 감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되 그것을 수습하는 과정에서는 매우 절제되고 품위 있는 격조를 보여 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저자는 간찰을 읽으며 거기 담긴 주요 감정으로 “욕망, 슬픔, 억울, 짜증, 공포, 불안, 뻔뻔함” 등 일곱 가지 열쇳말을 꼽고 그것을 바탕으로 “조선시대 사람들의 내밀한 속내”를 들여다보려고 했다. 그리하여 그 서로 다른 결로 드러나는 그들의 감정을 통하여 저자는 당대의 삶, 전근대의 일상을 21세기 독자 앞에 생생하게 펼쳐놓는다.

 

덕분에 독자는 “축첩(畜妾)의 명분과 욕망의 변화, 가족을 잃은 슬픔 감추기와 드러내기, 청탁으로 점철된 수령의 일상과 은폐된 짜증, 출신에 따른 관리들 사이의 차등과 편견, 드러내서는 안 되는 약자의 억울함과 감정을 통제하는 사회관계망, 아무도 피할 수 없었던 기근과 돌림병, 일상생활 속에 깊게 드리워진 굶주림의 공포, 서울 정가의 민감한 소식과 불안에 뿌리를 둔 유언비어, 흔적을 지워야만 하는 불안함, 유배당한 관리들의 고달픈 생활과 이를 통해 드러나는 뻔뻔함 그리고 그들을 돕는 후원자의 바람”(책머리에)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다. 

 

 열일곱 아들의 후사를 염려한 아비, 첩 중매에 나서다

▲ 전라도 관찰사 원두표가 김홍원에게 보낸 간찰. 1640년 8월 10일. 죽간 문양이 인쇄된 고급 인찰지에 흘림 글씨로 썼다.

7가지 감정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욕망’이다. 1640년 8월 전라도 관찰사로 재직하던 원두표(元斗杓, 1593~1664)는 부안현 줄포에 살던 우반종가의 김홍원(金弘遠, 1571~1645)에게 편지를 보냈다. 

 

“드릴 말씀은 저희 큰 아이가 혼인한 지 4년이 되었는데 아직 태기가 없습니다. 또 며느리가 심한 배앓이를 해서, 귀여운 손자를 얻을 것이라는 온 집안의 희망이 이제는 끊겼습니다. 그래서 좋은 집안의 피를 이은 여자를 구한 지 오래되었으나 마땅한 사람을 찾지 못했습니다.

 

소문으로 듣건대 김안주(金安州)에게 서녀(庶女)가 있다고하던데 만일 그녀를 얻어서 아들을 낳게 된다면 반드시 절의 높은 가문의 전통을 이어가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김안주’란 안주(安州) 목사 김준으로 그는 후금의 침략(1627) 때 성의 함락이 임박하자, 처자와 함께 화약에 불을 댕겨 순절한 무반으로 김홍원과 절친한 사이였다. 김준은 뒤에 고부의 정충사(旌忠祠), 안주의 충민사(忠愍祠)에 제향 되고, 장무(壯武) 시호를 받았다. 

 

 원두표는 아들의 첩을 들여 손자를 얻고자 김홍원에게 중매를 청한 것이었다. 열흘 뒤에 그는 김홍원이 요청한 말다래[障泥], 참봉첩과 함께 백지와 가죽신을 선물을 보내고, 부탁한 서녀를 아들이 아니라, 아우인 원두추(元斗樞, 1604~1663)의 부실(副室)로 삼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며느리로 원한 김준의 서녀를 아들이 없는 동생의 부실로 바꾼 촌극의 원인은 그녀가 아들보다 열 살 이상의 연상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들의 첩으로 들이려던 여자를 아우의 짝으로 맞겠다는 이 황당한 ‘변경’의 뜻은 본인도 쑥스러웠던지 편지 끝에 간단히 덧붙였다. 

▲ 원두추가 김홍원에게 중매를 재촉하며 보낸 간찰. 1640년 11월 1일. 예를 갖추어 정자로 썼다 .

절의 높은 집안의 여식을 들여 그 혈통을 잇고자 한 원두표의 시도는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실패한 이 혼담은 당대 혼인제도의 봉건성 말고도, 가문의 혈통을 보전해 줄 대상으로 떨어진 여성의 권리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원두표가 첩을 들여주기로 한 맏아들 원만석(元萬石, 1623~1667)은 놀라지 마시라, 당시 17살이었다.

 

 사회관계망 유지의 수단인 ‘청탁’을 ‘인정’으로 여긴 시대

   

7가지 감정의 열쇳말로 서술되고 있지만, 전편을 관통하는 것은 ‘청탁’이다. 신분사회 조선의 주인은 양반이었고, 이들은 벼슬을 독점하면서 벼슬아치로서 누리는 여러 가지 편의를 서로 주고받는 형식으로 나누고 있었다. 요즘 뜨거운 의제가 된 일자리 청탁이 없는 대신, 온갖 형식의 청탁이 이어지고, 이를 들어주는 것은 그들 양반사회의 사회관계망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었다. 

 

 원두표가 김홍원에게 선사한 가죽신은 감영의 장인들이 만든 것이니 말하자면 공용 물품이다. 말다래나 백지도 마찬가지다. 청탁은 주로 편지로 이루어졌고, 뒤에 고맙다는 인사 역시 편지로 전해졌다. 양전(量田), 즉 토지조사 사업이 전국적으로 시행되던 때에는 이와 관련된 민원이 쏟아지는데, 청탁하는 쪽도 받는 쪽도 ‘부정’에 대한 인식은 없었다. 지나치지 않은 청탁은 ‘인정(人情)’이라고 여긴 시대였기 때문이다. 

 

공용 물품을 사사로이 쓰는 것은 현대사회라면 마땅히 단죄하는 범죄다. 그러나 현대의 공무원과 달리 조선조의 벼슬아치들은 눈치를 보아야 할 주권자가 백성이 아니었다. 일반 백성들은 그저 ‘목민(牧民)’의 대상일 뿐이었으니, 양반들끼리 주고받는 청탁을 거리낄 필요가 없었다. 

 

도망간 노비를 찾는 추노(推奴)도, 상대가 다스리는 고을에 사는 자기 노비의 관리까지 청탁했고, 별장이나 농장의 관리도 청탁의 대상이었다. 온천 나들이를 온 양반의 가족을 챙기고, 그들이 머무는 동안의 양식이나 술을 구하는 청탁도 있었다. 이름난 온천이 있는 고을의 수령은 그 처리가 한 업무가 될 정도로 청탁이 어지러운 시대였다. 

 

객지에 살다가 병들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환자 이송도 청탁의 대상이었고, 신병에 좋다는 약초를 구해달라는 청탁도 심심찮았다. 청탁은 수령끼리도 주고받았지만, 내로라하는 집안에서 하는 청탁도 무시하지 못했다. 업무에 치이는 데다 이어지는 청탁에도 수령은 짜증을 다스려야 했다. 그것은 청탁으로 유지하는 사회관계망을 훼손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에도 연면한 청탁은 이처럼 유구한 역사가 있었던 셈이다. 

 

흉년의 빈 고을 창고 앞에서 수령들이 빠진 절망과 무력감

▲ 김명열이 관내 한 찰방에게 보낸 간찰. 1671년 5월 29일. 백성이 주리다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에 대한 괴로움을 피력했다.

조선시대의 농업 생산력이 보잘것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굶주림이 일상이었다는 걸 확인한 것은 아픈 대목이다. 천재지이(天災地異)로 말미암은 흉년의 반복으로 수백, 수천 명까지 굶주려 죽는 일이 잦았다. 경신 대기근(190~1671) 때는 백만 명이 아사했고, 소도 4만여 마리가 굶어 죽었다. 대기근은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보다 더 피해가 심했다. 흉년에도 청탁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고을 백성을 구휼해야 할 환곡(還穀)을 대여해 달라는 청탁도 있었다.

 

 흉년은 양반들에게도 위협적이었고, 수령들은 흉년에 텅 빈 고을 창고 앞에서 절망하고 무력감에 빠져야 했다. 김홍원의 아들로 1670년 순천 현감으로 부임한 김명열(金命說, 1613~1672)은 한 편지에서 “백성들의 굶주림이 봄보다 더 심한데도 아무런 능력이 없어 구제할 길이 없습니다. 고을 수령의 몸으로 어찌 차마 우두커니 서서 볼 수 있겠습니까?”라고 썼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몰염치’도 그들 감정의 한 자락이었다. 낯선 고장에 귀양 온 유배객들은 유배에 드는 각종 비용과 유배 생활의 식량과 부식 등을 자신이 조달해야만 했다. 이들은 유배지 인근의 수령이나 친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유족한 지방 양반들이 권력에서 밀려나 유배된 경화 사족(京華士族)들을 보살펴주었다. 

 

지방 양반이 경화사족에게 베푼 인정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과 인맥을 형성함으로써 가문의 명성과 지위를 높이려 한 이 배려는 그러나, 반대급부로 이어지지 못했다. 도움을 받을 때는 감지덕지하던 이들 유배객은 유배지를 떠난 뒤 다시 뒤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배(解配) 이후 오고 간 편지가 거의 없는 이유다. 그건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무상한 세정(世情)이었다. 

 

시대가 다르지만, 인간의 욕망과 이익 추구가 보편적 성정이라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는 것으로도 이 책은 역사와 인간에 대한 이해를 환기해 주는 셈이다. 흥미롭게만 읽히던 이야기가 일순, 등허리가 서늘해지는 감동으로 바뀌는 것은 이 편지에 얽힌 서사에 담긴 인간의 삶과 역사적 진실이 만나는 어떤 순간과 맞닥뜨릴 때다. 

 

양반과 벼슬아치들이 주고받은 편지로 들여다본 이 일상 생활사는 한갓진 흥밋거리에 그치지 않는다. 평생을 고문헌을 연구해온 저자의 도움으로 우리는 중세 봉건사회와 당대를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이해로 나아갈 수 있으니 말이다. 그것은 역시 어떤 형식으로든 오늘의 삶과 인간으로 이어지고 있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일 터이다.

 

2021. 5.8. 낮달

 

*이 책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에서 낸 ‘고전 탐독’ 13권이다. 고전 탐독 시리즈는 <인정사정, 조선 군대 생활사>(1권), <군영 밖으로 달아난 한양 수비군>(12권), <우반동 양반가의 가계 경영>(10권) 등 모두 13권이 나왔다. 틈나는 대로 읽어보리라며 나는 이 책을 인터넷 서점의 보관함에 쟁여두었다.

 

*<오마이뉴스>에 실린 아래 기사는 이 글의 축약본이다. 이 원문을 송고했으나, 독자의 편의를 위해 분량을 줄여달라는 편집부의 요청에 따라 4800자를 3500자로 줄였다. 글은 길 수도 짧을 수도 있다. 어느 일방이 좋다고 하기보다는 그것은 글의 내용에 따라, 담긴 메시지에 따라서 달리 판단할 부분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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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전경목 지음, 책 '옛 편지로 읽는 조선 사람의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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