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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역사 공부 「오늘」

[오늘] 비운의 명장 임경업 지다

by 낮달2018 2023.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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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공부 ‘오늘’] 1646년 6월 20일, 임경업 장군 분사하다

▲ 임경업(1594~1646) 장군 초상
▲ 임경업 장군을 배향한 충주의 충렬사. 1726년에 호서 사람들이 세웠고 이듬해 조정에서 사액하였다.

1646년 6월 20일(음력, 양력으로는 8월 1일) 조선 중기의 무장 임경업(林慶業, 1594~1646)이 파란 많은 삶을 억울하게 마감했다. 용맹하고 강직했으되 시대를 읽지 못한 완고함 때문이었던가, 그는 때를 잘못 만나 국제 미아가 된 비극적 운명을 비켜 가지 못한 불운한 장수였다.

 

국제 미아가 되었던 비운의 명장

 

임경업은 충청도 충주 달천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평택(平澤)이며 자는 영백(英伯), 호는 고송(孤松), 시호가 충민(忠愍)이다. 스물넷에 무과에 급제하였고 이괄의 난(1624) 때 정충신 장군의 선봉장으로 큰 공을 세우면서 1등 공신이 되었다.

 

1633년 청북(淸北, 청천강 이북) 방어사 겸 영변 부사에 등용되어 북방 경비를 튼튼히 하고자 의주에 있는 백마산성을 다시 쌓았다. 당시 누르하치가 만주를 통일하여 후금(後金)이라 칭하고 명나라와 조선에 싸움을 자주 걸어왔다. 후금의 소규모 부대가 국경을 넘어오자 이를 여러 번 격퇴하여 되돌려 보냈다.

 

반정(反正)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광해군의 실리 외교정책을 버리고 노골적인 친명반청(親明反淸) 외교로 나아갔다. 국제 정세를 읽지 못하고 이미 기울어가고 있는 명나라에 대한 사대(事大)의 의리를 지킨답시고 선택한 이 무모한 친명정책은 결국 정묘호란(1627)을 불렀다.

 

누르하치가 친히 3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 공격에 나서자 강화도로 들어간 조정은 결국 무릎을 꿇고 후금과 형제의 의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임경업은 의주성과 백마산성을 고치고 다시 쌓아 후금의 재침을 경계했다.

 

당시 후금은 만주에 이어 몽골까지 손아귀에 넣고 전 중국을 정복하기 위한 절차를 밟고 있었다. 국운이 기울자 정작 명나라의 장수들도 하나둘 후금에 투항하고 있었지만, 명분에 매달린 조선의 친명파 대신들은 명나라를 저버릴 수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임경업 역시 조정의 친명배청파(親明排淸派) 대신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임진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의 은혜[이른바 ‘재조지은’(再造之恩)]를 오랑캐를 무찌르는 것으로 보답하고자 했다. 그는 명나라 장수로 청에 투항하면서 반란(1633)을 일으킨 공유덕 등의 무리를 토벌하여 명나라로부터 벼슬을 받기도 하였다.

 

의주 부윤으로 있던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임경업은 백마산성에서 청나라 군대의 진로를 차단하고 원병을 청했으나, 김자점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청군은 백마산성을 피하여 서울로 바로 치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강화도로의 몽진 길이 막히자 조정은 남한산성에 들어가 농성하였다.

 

명나라 망명, 이후 명청을 오간 인생 유전

 

그러나 청군에 포위당한 채 농성 47일 만에 조선은 청에 항복한다.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한강 변 삼전도(三田渡)에서 ‘오랑캐’ 청 태종에게 삼배구고두(三拜九臯頭, 절할 때마다 세 번 머리를 조아림)의 예로 치욕을 당하고 청군은 소현세자와 뒤에 효종으로 즉위한 봉림대군과 항전을 주장하던 척화파 대신들을 포로로 이끌고 선양(瀋陽)으로 돌아갔다.

 

병자호란 끝난 뒤 청나라가 평안도 앞바다의 명나라의 군사기지인 가도(椵島)를 공격하고자 조선에 출병을 강요하자 조정에서는 임경업을 출전시켰다. 임경업은 군을 이끌고 나아갔지만, 명나라 군사와 싸울 생각이 없었으므로 명군과 내통하여 싸우는 척하기만 했다.

 

인조 10년(1638), 임경업은 평안 병마절도사 겸 안주 부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안주에 병영을 설치하고 군사들의 훈련을 강화하며 청군의 동태를 주시하고 있었다. 인조 20년(1642)에 청나라는 명의 금주를 공격하고자 조선의 출병을 요구해 임경업이 다시 나섰다. 그러나 임경업을 명군 장수와 내통하여 싸우는 척만 했기 때문에 사상자가 전혀 나오지 않았다.

 

뒤에 청에 투항한 명나라 장수가 내통 사실을 알리자 임경업은 바로 붙잡혀 선양으로 압송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정승 심기원의 배려로 승복과 환도 한 자루를 받은 임경업은 황해도 금교역에서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한다. 승려로 위장해 숨어다니던 그는 서해를 건너 명나라로 망명했다. 청은 그의 부인 전주 이씨를 인질로 잡아갔는데 이씨는 선양의 감옥에서 자결했다.

명나라 의종은 망명한 임경업에게 벼슬을 내리고 명군과 함께 청의 심양을 공격하라고 명한다. 그러나 청나라 군사의 기세에 겁을 먹은 명나라 장수 황용은 도망치고 마등홍은 임경업을 묶어 청군에 항복해 버렸다. 그때 이미 이자성의 반란군이 북경에 진주하자 의종은 목을 매어 죽었으니 명나라는 이미 망해버린 상태였다.

 

청의 세조는 청에 귀순하도록 회유했지만, 임경업은 이를 거부하고 옥에 갇혔다. 한편 조선에서는 선양으로 압송되던 임경업을 도와주었던 정승 심기원의 옥사(獄事)가 일어났다. 권력투쟁에서 득세한 김자점은 반대파인 심기원을 역모 혐의로 몰아 죽이고 임경업도 관련자라며 청나라에 그의 송환을 요청했다.

▲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에 있는 임경업 장군 추모비

임경업에 대한 회유를 포기한 청은 곧 임경업을 조선으로 압송했고 졸지에 그는 역적 누명을 쓰고 고국으로 송환되었다. 인조의 친국 과정에서 임경업이 심기원과의 관련 없음이 분명해지자 김자점은 나라를 배신하고 남의 나라에 들어가 국법을 위반했다며, 형리들을 시켜 그를 장살(杖殺)해 버렸다.

 

명나라와 청나라가 교체되는 혼란기에 조선에 대한 충절 하나로 살았던 무인 임경업의 삶은 그렇게 결딴이 나 버렸다. 의리와 지조로 살았던 전형적 무인 임경업은 결국 시대의 격랑에 희생된 불운한 장수였다. 투옥과 망명을 거듭하며 국제 미아로 살아야 했던 그의 삶은 17세기 동북아시아에서 어긋나 버린 힘의 균형, 그 결과였다.

 

그는 철저한 친명 배금주의자였지만 정작 한 번도 청과 싸움다운 싸움을 해 보지 못한 불운한 장수였다. 그는 내키지 않는 강대국 청의 원병 노릇을 하면서 원하지 않았던 명과 전투하는 시늉을 해야 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늘 그의 뜻과는 다른 것이었다. 임경업의 잘못이 있다면 그가 시대를 읽지 못한 무모한 명분론자였다는 것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한계라기보단 그 시대의 한계였다.

 

민중의 영웅으로 재탄생

 

임경업은 시대를 잘못 만나 조선에서 청으로, 청에서 명으로, 다시 명에서 청으로, 또다시 청에서 조선으로 유전하다가 끝내 역적으로 몰려 살해되었다. 청 태종의 10만 대군도 피해서 갈 정도의 용장이었던 임경업의 비극적 일생은 그를 무속신앙의 신장(神將)으로 살려냈다.

▲ 임경업 장군신. 민중은 그를 무속신앙의 신장으로 살려냈다.

민중의 절대적 지지는 임경업을 무능하고 실패한 장군으로 머물게 하지 않고 도리어 민족의 영웅으로 재탄생시키기에 이른다. 그는 충의와 지조, 용기의 상징으로 민중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존재였다. 특히 중국과의 대립에서 승리한 민족적 영웅이지만 억울하게 옥사하였다는 민중의 주체적인 역사 인식이 투영되어 그를 더 적극적이고 현실적인 영웅으로 신격화한 것이다.

 

이러한 민중 인식을 기반으로 형성된 임경업 장군 신은 주로 경기도 지역에서 마을을 보호하고 풍어(豊漁)를 관장하는 신격으로 모셔지고 있다. 임경업이 서해안 일대의 조기 어업과 관련, 연평도의 어업 신으로 좌정하게 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고려의 최영, 조선 왕조의 남이 장군 같은 역사적 명장들은 사후에 신장의 반열에 올라 민중의 신앙 대상이 되었다. 시운을 잘못 타고나 억울하게 죽었지만, 임경업도 민중의 가슴속에 불멸의 영웅으로 살아남은 것이다. 이는 그의 무용담을 소재로 한 고전소설 <임경업전>의 창작과 대중적 수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임경업 사후, 그를 모함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 김자점도 불과 6년 뒤(1652)에 몰락한다. 김자점은 자신이 죽음으로 몰았던 심기원과 마찬가지로 능지처참 형에 처해졌다. 뒤에 북벌론을 주장하던 송시열, 윤휴 등이 집권하였으나 청나라의 비위를 거스르는 것을 두려워하여 그의 신원, 복권은 쉬 이루어지지 않았다.

 

임경업이 신원, 복관(復官)된 것은 숙종 23년(1697)이었다. 임경업은 1726년에 호서 사람들이 세운 충주의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다. 이듬해 조정에서 사액(賜額)을 내리고 관리를 보내어 제사 지냈고 1791년(정조 15년)에는 왕이 친히 글을 지어 비석에 새겨 전하게 하였다.

▲ 충렬사에 나란히 세워져 있는, 정조가 지은&nbsp; '어제(御製) 달천 충렬사비'(왼쪽)와 완산 이씨 정렬 비각 .

충렬사에 있는 ‘어제 달천 충열사비’가 바로 정조가 지은 글을 새긴 것이다. 이밖에도 충렬사 경내에는 위패를 모신 사당과 임경업 장군의 유품들을 전시한 유물관, 부인 전주 이씨의 충절을 기린 ‘완산 이씨 정렬 비각’이 있다. 그러나 임경업의 넋과 자취가 어찌 사당과 유물, 돌비에만 남았겠는가.

 

충렬사 유물관에 전시되된 임경업의 추련검(秋蓮劍)에 새겨진 한시를 나직이 읽으며 역사와 그 격랑 속을 살아갔던 인간을, 인간의 삶을 생각한다.

 

時呼時來否再來 때여 때는 한번 와서 다시 오지 않나니

一生一死都在筵 한 번 나서 한번 죽는 것은 바로 여기 있네.

平生丈夫報國心 장부의 한평생 나라에 바친 마음

三尺秋蓮磨十年 삼척 추련검을 십 년이나 갈았네.

 

 

2016. 6. 19.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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