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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역사 공부 「오늘」

[오늘] 식민지사회 비판적 공론장의 구심 월간 <개벽> 창간

by 낮달2018 2024.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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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공부 ‘오늘’] 1920년 6월 25일, 월간종합지 <개벽> 창간

▲ <개벽>은 폐간까지 끊임없이 검열로 탄압받았다. 창간호가 압수되자 호외를 발행할 정도였다.

1920년 6월 25일, 천도교단에서 민족문화 실현 운동을 위해 세운 출판사 개벽사에서 A4판, 160쪽 내외의 월간종합지 <개벽(開闢)> 창간호를 발간하였다.

 

천도교(동학의 후신)의 ‘후천개벽 사상’에서 이름을 딴 이 잡지는 일제의 정책에 항거하여 정간·발행 금지·벌금, 그리고 발행정지 등의 가혹한 처벌을 감수하면서까지 민족의식 고취에 역점을 두어 곧 식민지사회 비판적 공론장의 구심체가 되었다.

 

<개벽>의 창간은 천도교 청년회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이돈화(1884~?)를 비롯한 청년들은 잡지 창간을 위해 먼저 출판사 개벽사(開闢社)를 설립하였다.(개벽사는 <개벽> 외에도 <신여성>, <별건곤>, <어린이>, <새벗>, <신소년>, <별나라>, <학생> 등의 잡지를 발행하며 1920년대 잡지계를 이끌었다) <개벽> 창간호를 발간할 때 사장 최종정, 편집인 이돈화, 발행인 이두성, 인쇄인 민영순(閔泳純)을 비롯하여 개벽사의 핵심 간부들은 모두 천도교 청년회 간부들이었다.

 

천도교단에서 발행했지만, 포교 대신 사회적 공공매체로 키우다

 

<개벽>은 창간 이유로 “세계사상을 소개함으로써 민족자결주의를 고취하며, 천도교 사상과 민족사상의 앙양, 사회개조와 과학 문명 소개와 함께 정신적·경제적 개벽을 꾀하고자 함”이라고 밝혔다. 전체 지면의 약 3분의 1을 문학과 예술 면으로 할애하여 소설·시조·희곡·수필·소설이론·그림 등을 게재하였고, 문체는 국한문혼용체를 썼다.

 

1920년대까지 천도교는 식민지 시기 대표적 종교이자 민족 운동 세력 중의 하나였다. 초창기 <개벽>에는 청년회 간부인 개벽사 직원들이 쓴 글이 실렸다. 그러나 <개벽>의 기사 중에 천도교의 교리에 관한 것은 매우 드물었다.

▲ 식민지사회 비판적 공론장의 구심체가 된 <개벽>은 가장 영향력 있는 잡지였다.

천도교에서는 개벽을 종교적 선전도구로 활용하지 않고, 사회적 공공매체로 성장시키고 여론의 구심력을 확보하고자 노력했다. <개벽>은 각종 주제에 관한 논설과 문학과 잡문 등이 실린 대중 종합지로 성장했고, 대중들과의 소통 가능한 형태의 다양한 기획으로 구현되었다. 독자투고나 지방통신란의 신설, 조선 10대 위인 투표, 전래 동화 모집, 일종의 답사 보고서인 조선 13도 호의 발간 등이 바로 그 사례였다.

 

<개벽>은 이러한 노력으로 대중의 호응을 얻었고, 일관된 정치지향과 현실참여 태도로 논설과 만평을 통해 현실을 비판했다. <개벽>의 전체 기사에서 문학과 잡문에 이어 세 번째 비중을 차지한 것이 논설이었다. 논설의 내용은 대부분은 사상과 정치, 시사에 관한 것으로 식민지 현실의 다양한 문제를 다룬 것이었다.

 

현실 비판에 대한 일제의 끊임없는 검열과 탄압

 

현실 비판적 기사들이 많았던 만큼 <개벽>은 발행되는 내내 검열에 시달렸다. <개벽>은 창간호부터 표지에 그려진 호랑이와 나라(집) 잃은 민족의 슬픔과 힘찬 건설의 충고를 내용으로 한 동요체 삼행시 ‘금쌀악 옥가루’(김기전)가 문제가 되었다. 일제 당국이 이를 압수하자 문제가 된 기사를 삭제하고 호외를 냈으나 이것마저 압수되어 다시 임시호를 발행하였다.

▲ 창간호의 목차

이처럼 모두 72호가 간행되는 동안 일제의 탄압이 끊이지 않았던 것은 <개벽>이 1920년대 사회 모순의 중심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개벽>이 견지한 정치적 입장이 불러온 식민체제의 탄압은 역으로 <개벽>의 사회적 비중을 극단적으로 확대했다.

 

<개벽>은 1926년 8월(통권 72호)까지 6년간 매호 8000~9000부를 발행하였고, 판매량은 평균 7000부 이상, 전성기에는 1만 부에 이르렀다. 창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식민지사회 비판적 공론장의 구심체가 된 <개벽>은 1920년대 전반기 가장 영향력 있는 잡지였다.

 

종합지였으나 문학 발전에 크게 기여

 

<개벽>은 당시 계급주의적 문학을 지향하던 신경향파 초기의 작가들을 많이 배출하여, 지면의 3분의 1에 달하는 문예 면에 그들의 작품을 게재하였다. 김기진(소설 ‘붉은 쥐’)·박영희 등의 평론가, 현진건(소설 ‘빈처’, ‘술 권하는 사회’, ‘고향’, ‘운수 좋은 날’)·김동인(소설 ‘명문’)·이상화(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염상섭(소설 ‘표본실의 청개구리’)·최서해(소설 ‘큰물 진 뒤’) ·박종화·주요섭(소설 ‘인력거꾼’) 등의 문인들이 <개벽>에 작품을 실었다.

 

<개벽>은 1926년 8월 1일 통권 72호로 폐간되기까지 압수와 발매금지 37회 이상, 정간 1회, 벌금 1회의 탄압을 받았다. 1926년 8월에 박춘우가 쓴 ‘모스크바에 새로 열린 국가 농촌학원’이라는 사회주의 관련 글이 빌미가 되어 <개벽>은 발행금지 처분을 받았다.

▲ 검열의 흔적들. <개벽>은 폐간까지 압수와 발매금지 37회 이상, 정간과 벌금 1회의 탄압을 받았다.
▲ 강제 폐간 날, 개벽사 사무실에 '혁명투쟁 개벽...' 벽보를 붙이고 촬영한 사진. 원 안은 방정환.

<개벽>은 종합지였지만 문예지 못지않게 문학 이론의 전개, 문학작품의 발표, 외국 문학의 소개, 신인 발굴 등에 힘써 현대문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일제에 항거하여 정간·발행 금지·벌금, 그리고 발행정지 등의 가혹한 처벌을 감수하면서까지 민족의식 고취에 역점을 둔 것은 교단으로서는 쉽지 않은 선택이기도 했다.

 

1934년 11월에 창간 동인 차상찬이 <개벽>을 속간하여 4호까지 내었으나, 1935년 3월 1일 다시 폐간되었다. 그러나 이는 이전의 <개벽>과 성격을 같이 하는 것은 아니었다. 광복 후인 1946년 1월에도 창간 동인 김기전이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개벽>을 복간하여, 호수를 이어 제73호부터 1949년 3월(통권 제81호)까지 모두 9호를 발행하고 자진 휴간하였다.

▲ <개벽>은 해방 후에 여러 차례 영인 출판되어 이 시기 문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개벽>은 해방 후에 여러 차례 영인 출판되어 이 시기 문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최근 일제에 의해 압수·삭제된 149개의 기사 중 기존 영인본에서 누락된 21개의 기사(작품) 원문이 한 연구서의 부록으로 간행되었다.

 

 

2018. 6. 23. 낮달

 

 

참고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위키백과>

· 우리역사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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