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쿡닷컴에서 숙제하는 여성들
요리·생활 사이트인 ‘82쿡닷컴(http://www.82cook.com/)’이 떴다. 이 사이트 회원들의 <조선일보> 광고주들을 상대로 한 ‘불매 운동’에 관해 <조선일보>가 82쿡닷컴에 ‘경고장’을 보낸 사실이 알려지면서부터다. 아니다. 뜬 곳은 더 있다. ‘선영’ 씨로 유명한 마이클럽(http://www.miclub.com/)이 그렇고, 패션사이트인 ‘소울드레서’도 그렇다.
82cook.com은 “‘가족 사랑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요리와 알뜰 살림을 위한 정보나 지혜를 나누는 사이버 공간”으로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이 사이트가 일반에 널리 알려진 것은 역시 마이클럽이나 소울드레서 등과 마찬가지로 회원들이 쇠고기 정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부터다.
오늘 나는 난생처음으로 82쿡닷컴을 방문했다. 대번에 자유게시판으로 들어갔다. 실시간으로 늘어나는 댓글들의 숫자는 금세 백 단위다. 조선일보의 도발에 분개해 신규 가입한 신입회원들의 가입 인사로 자유게시판 목록이 너무 빨리 넘어가는 것을 우려해 ‘가입 인사 생략’을 부탁할 정도였다.
자유게시판을 일별한 뒤 나는 ‘므흣해져서’ 아내와 딸애를 불러 사이트를 소개했다. 아내의 청에 따라 82쿡닷컴을 즐겨찾기에 등록한 다음, 몇 군데 글을 찬찬히 읽었다. 때가 때인지라 <조선일보>의 도발에 대한 대응과 이에 대한 소감들이 이어졌다.
게시판에 실린 글을 통해서 마이클럽의 ‘선영 씨’들이 경향신문에다가 우정과 연대의 의미로 간식을 보냈다는 사실을 알았다. ‘바른 펜 곧은 언론을 사랑하는 마이클럽 선영이들이 드립니다.’는 쪽지를 단 그 떡과 빵 등의 간식 상자들은 그것 자체로 진한 연대였다.
마이클럽의 선영 씨들은 경향에만 간식을 보낸 건 아니다. 이들은 한겨레에도 과일과 샌드위치 등 먹을거리 소포를 보냈다. 그것은 <인터넷 한겨레>에 기사로 떠 있다. 쇠고기 정국에서 그 진면목을 유감없이 드러낸 <조중동>에 대한 실망과 분노는 곧바로 <한겨레>와 <경향>에 대한 구독자 증가, 광고로 나타났으니 요즘 두 신문사는 그야말로 상한가를 톡톡히 누리고 있는 셈이다.
과문한 탓에 마이클럽이나 소울드레서, 그리고 82쿡이 그간 정치·사회적 문제에 대한 발언을 계속해 왔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이들 사이트는 주요 회원이 여성들이고, 여성문제, 요리, 패션 등에 대한 동호인 모임이다. 그런데도 최근 이들이 조선일보 광고 불매 운동과 촛불 켜기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이 쇠고기 정국 덕분이다.
흔히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탈정치화’의 공간이 되기 쉬운 동호인 모임에서 새로운 ‘운동’의 씨앗이 싹을 틔운 것일까. 이 운동의 여파는 거세고, 강하다. 82쿡의 자유게시판을 돌면서 나는 여러 번 감격의 탄성을 질렀다.
82쿡에서는 <조선일보> 광고국에 항의 전화를 거는 일은 ‘숙제’로 통하는 모양이다. <숙제합시다>며 글을 올린 ‘조용한녀자’의 글은 엄청 길고, 당연히 거기 엄청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그이는 조선일보 광고국에 전화한 경위를 아주 상세하고 보고한다.
‘어제는 전화하면서 안 떨렸는데 오늘은 떨리더’라면서도 ‘조용한녀자’는 아주 논리적으로 <조선일보> 광고국 직원을 녹아웃 시켰다. ‘아줌마라고 쫄 줄 알고 무시한 거지?’라면서 공세적으로 나간 이 여성은 ‘물건이나 서비스를 소비하는 소비자로서 재화에 포함된 광고비의 내용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거나 항의할 수 있는 거 아니냐? 그게 왜 잘못이냐?’고 반문하여 상대의 기를 죽여 놓는다.
‘조용한녀자’는 ‘조선일보의 논조가 나의 정치적 성향과 달라서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며, ‘조선일보가 그간 해왔던 권력 지향적 해바라기 행태들과 진실은커녕 사실조차 왜곡해서 국민을 가르치려 드는 썩어빠진 관점 때문에 반대하는 거’라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공문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받은 사람 입장에서는 둘도 없는 협박으로 보여 매우 불쾌하며’ ‘이것이 회원들에게 더욱 기름을 부은 꼴이 되었으니 그런 줄이나 알라’며 자신의 발언을 끝낸다.
‘조용한녀자’는 또 민변과 민언련, 그리고 진보신당에 전화한 내용을 소개하고 마지막으로 차분히 자신을 정리한다. ‘숙제’의 중요성을 일깨우면서 이 이는 거기서 ‘역사의 흐름’을 읽어낸다. 글의 마지막 부분은 그것 자체로 이미 시다.
“여러분, 살아도 숙제, 죽어도 숙제랍니다.
당황, 흥분, 어리둥절, 섭섭, 아리송… 같은 건 잠시 내려놔 두시고
느릿느릿 황소처럼 차근차근 천천히 할 일들 하며
이 역사의 흐름에 동참해요.
저 역시 오늘 몇 개의 전화 통화밖에 못 했어요.
광고주 전화는 전혀 못 했네요.ㅠ.ㅜ
수십 통씩 숙제하신 분들,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역사의 큰 획이 될 거라는 생각은 없어요.
그냥 눈에 띄지 않는 작은 점일지라도 톡, 던져놓는다면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하며 실천해가요, 우리.”
오늘 아침, 한 번 더 82쿡의 자유게시판에 들렀더니, 이분 출근하면서 다시 한 칼 중요한 말씀을 남겼다.
“‘조용한 녀자’가 아니라, ‘너무 나서는 녀자’가 되어가고 있나 봐요. ㅎㅎ
저는, 작은 것에 목매지 말고 ‘그저 미련퉁이처럼 꾸준히 움직이자’는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요.
숙제 강조하는 제 글을, 다시 한번만 더 보시라고 옮겨올게요.
너무 나선다고 혼내시면, 글 내릴게요.”
‘조용한 녀자’에서 ‘너무 나서는 녀자’로의 변화는 아름답고 위대하다. 아무도 쉽게 하지 못하는 매우 중요한 일을 그이는 마치 숙제처럼 해치우면서 그것이 ‘역사의 흐름’이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나섬녀’는 그이로 그치지 않는다. <경향>에 <한겨레>의 광고비 모금에 동참하고, 촛불집회를 빛낸 수많은 여중·여고생들, 아주머니들과 할머니들, ‘공영방송’ 지키기에 동참한 많은 여성이 ‘나섬녀’다. 그리고 그들의 나섬이 역사를 바꿀지도 모른다.
2008. 6. 17.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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