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초의 번역시집과 창작시집을 낸 소월의 스승 안서 김억
이 글은 2019년 5월에 출판된 단행본『부역자들-친일 문인의 민낯』(인문서원)의 초고임. [관련 기사 : 30년 문학교사가 추적한 친일문인의 민낯]
우리나라 신문학의 첫 장을 연 사람들이 대부분 친일파라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최초의 신체시를 쓴 최 남선, 첫 번째 신소설을 쓴 이인직, 최초의 현대시 「불놀이」의 주요한, 첫 현대 소설 「무정」의 이광수가 바로 그들이다.
안서(岸曙) 김억(金億, 1896~?)도 그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1921년 1월에 프랑스 상징파의 시를 중심으로 한 조선 최초의 현대 번역시집 『오뇌의 무도』를 번역해 펴냈고, 같은 해 6월에는 조선 최초의 현대 창작시집 『해파리의 노래』를 출판하였다.
소월의 스승, 엇갈린 사제의 길
평안북도 정주의 부유한 종가에서 태어나 오산학교를 졸업한 김 억은,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모교의 교사로 일하면서 김소월(金素月, 1902~1934)을 가르쳤다. 소월에게 김억은 자신을 문단으로 인도한 문학의 스승이었다. 소월이 세상을 떠난 뒤, 김억은 1939년에 『소월시초(素月詩抄)』를 엮어 발간하기도 하였다.
1977년 소월의 시작 노트가 발견되었는데, 여기 실린 시들 가운데 김억의 작품으로 이미 발표된 것들이 있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논란 끝에 스승이 제자의 시를 자기 작품으로 둔갑시켜 발표한 것으로 결론이 났다. 당사자인 김억은 이미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행적을 알 수 없었으니 불행 중 다행이었던가.
안서 김억의 문학 활동은 단순히 최초의 번역시집이나 창작시집을 펴낸 데 그치지 않았다. 초창기 현대 문학의 전개 과정에서 그의 이름 이 곳곳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는 1918년에 주간 문예지 『태서문예신보(泰西文藝新報)』를 창간하였고, 1919년부터 문예지 『창조』, 『폐허』, 『영대(靈臺)』 등의 동인으로 활동하였으며, 인도 시인 타고르의 시집을 여러 차례 펴내기도 하였다.
소월과 사제의 연을 맺었지만 두 사람의 길은 어긋나기 시작하였다. 초기의 여성적이고 서정적이던 시풍에서 점차 현실 참여적으로 바뀌어 간 소월의 민족주의적 성향과 달리, 김억은 친일로 기울어져 간 것이다. 그는 1937년 조선총독부의 문예를 통한 황민화 정책 실천을 목표로 발족한 조선문예회에 참여하면서부터 친일의 길로 접어든다.
조선문예회가 후원한 ‘애국가요 대회’에 발표된 김억 작사 「종군간호부의 노래」, 최남선 작사 「김 소좌를 생각함」 등의 이른바 ‘애국가요’는 1940년대 ‘국민문학 운동’의 실마리가 되었다. 김억은 야전병원에서 활약하는 종군간호부를 기리는 「종군간호부의 노래」로 일제 침략전쟁을 찬양하고 여성의 전쟁 참여를 부추겼다.
대포는 쾅 우레로 튀고
총알은 땅 빗발로 난다
흰옷 입은 이 몸은 붉은 십자의
자애에 피가 뛰는 간호부로다
- 「종군간호부의 노래」
이후 그는 조선문인보국회, 국민총력조선연맹, 조선문인협회, 조선 임전보국단 등 일제의 문화 기구에 발기인, 간사 등으로 참여하면서 친일 활동의 수위를 높여 갔다. 문인들의 친일 행위에는 필수적으로 징병제 찬양이 빠지지 않는데, 이는 일제의 압력이 작용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시를 통해 일제 군부와 침략전쟁 찬양
안서 김억은 유독 일제 군부를 찬양하거나 그 역할을 강조하는 형식의 글을 많이 썼다. 1942년 3월 일본 육군기념일을 맞아 발표한 시가 대표적 사례다. 그는 일제 육군이 동아시아에서 ‘수호자적 역할’을 하고 있다고 강조하며 ‘아름다운 낙원’을 지켜 달라고 축원하였다.
동으로 동으로 밀려들면서 입을 벌리고
하늘엔 검은 구름 땅엔 바람을 들이던
험상궂은 제국(帝國) 제국(諸國)을 단번에 꺾어 버려
이 세계의 눈과 귀는 놀라지 않았던가
이 동아의 수호시여. ……이 동아의 우리는 10억,
마음과 뜻을 하나로 한곳에 모아
고이고이 드리는 정성의 이 잔을
이 동아의 수호시여, 쾌히 드시고
길이길이 정의의 날카로운 칼로
이 세계의 사악(邪惡)들을 몰아대시고
아름다운 이 낙원을 지켜 주시라
- 「육군기념일에」, 《매일신보》(1942년 3월 10일자)
1942년 5월 전사하여 일제의 군신(軍神)으로 추앙된 일본 육군비행대 가토 다테오(加藤建夫) 중좌를 노래한 시에서 그는 일제 침략전쟁의 공적을 미화하였다. 가토 다테오의 부대는, 일본 육군항공사관학교를 나와 태평양전쟁에서 전사해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최명하(崔鳴夏, 1918~1942, 일본식 이름은 다케야마 다카시 武山隆) 대위가 복무한 부대이기도 하다.
북지나(北支那)라 중지나(中支那) 또는 남방의
길도 없는 허공을 까맣게 날며
간 데마다 사악(邪惡)을 뚜다려내고
새로운 길 뚜렷이 지으신 군신
높을세라, 그 이름 가토(加藤) 부대장
호령호령 긴 칼을 높이 빼들고
사악을 인도양서 베고 베다가
귀한 정신 그대로 다시 나타나
영구히 이 동아를 지키는 군신
높을세라, 그 이름 가토 부대장
- 「군신(軍神) 가토(加藤) 비행부대장」, 『반도의 빛』(1942.9.)
그의 일제 군부 찬양은 해군 제독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의 전사를 노래한 시에서 정점을 찍는다. 야마모토는 1941년 진주만 공격을 입안하고 수행한 인물로, 솔로몬 제도를 시찰하다 미 육군항공대에 격추되어 전사하였다.
제독은 가셨으나 귀한 정신은
1억의 맘 골고루 밝혀
저 미영을 뚜드려 눕히일 것을
아아 원수 원수는 돌아가셨다.
원수의 높은 정신 본을 받아서
백배 천배 다시금 새 결심으로
새 동아의 빛나는 명일을 위해
일어나자 총후의 우리 1억들
저 미영이 무어냐 사악인 것을
- 「아아 야마모토(山本) 원수- 원수의 국장일을 당하여」, 《매일신보》(1943.6.6.)
1944년 레이테 해전에서 처음 가미카제(神風) 자살공격대가 등장한 뒤 11월에 조선인 가네하라(金原) 군조(軍曺, 상사에 해당하는 일본군 계급)가 전사하자, 그는 《매일신보》에 발표한 시를 통해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침략전쟁에 나가 희생하라고 선동하였다. 미당 서정주의 「마쓰이 오장 송가」에 비할 만한 사례다.
역천(逆天)은 부술 것이 순천(順天)은 받들 것이
대장부 세상 났다가 그저 옐 줄 있는다
이 목숨 귀할시고 모두들 아낀다면
일월(日月)의 충의(忠義) 도고는 보잘 것이 있는고
설사(設使: 설령)에 죽더라도 충혼은 그저 남아
사악을 눕히기 전이야 가실 줄이 있과저
신풍(神風)이 부는고야 육탄이 튀는고야
풍탄(風彈)이 튀는 곳에 거칠 것이 없나니
맘들은 한데 모아 역천은 부서지고
님 따라 손 높이 들고 나설 때는 왔나니
- 「님 따라 나서자-가네하라(金原) 군조 영전에」, 《매일신보》(1944.12.7.)
문학적 공로가 큰 만큼 안타까운 친일부역
해방 후, 김억은 한국전쟁 발발 때까지 육군사관학교와 항공사관학교(공군사관학교의 전신) 강사를 지냈다. 전쟁 때 납북되어 북한 국영출판사의 교정원으로 배치되었다. 1956년 납북 인사들로 구성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중앙위원으로 임명되었다가, 평안북도 철산의 협동농장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그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는 시의 본질을 인간 감정의 표출로 인식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객관적 상관물을 주로 활용하였으며, 심미적 차원의 형상화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또한 감정을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음악적 요소를 중요시하였다고 평가된다. (방인석)
『친일인명사전』과 정부가 발표한 친일 반민족 행위자 명단에 올랐지만, 그의 시와 시론이 한국 현대시에 끼친 영향과 서구의 시와 시론을 소개하고 민요시 운동의 중심에 서서 한국적 정서와 가락을 담은 민요시 창작에 주력한 공로는 부인할 수 없다. 소월을 가르쳐 그를 시단에 소개한 공적도 적지 않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의 이바지가 크면 클수록 식민 지배에 투항 여 민족을 등진 친일부역 행위의 엄중함도 두드러진다. 그의 대표작 「봄은 간다」를 읽으며 청산하지 못한 역사를 안타깝게 되돌아보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2019. 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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