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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이문열의 ‘황당과 우울’은 계속되어야 한다

by 낮달2018 2020.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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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왜 ‘황당’하고 ‘우울’해야 했던가

▲ <중앙일보>의 이문열 관련 기사  ⓒ  조인스 뉴스 캡처

어째 기척이 없나 했다. 오늘 그예 그는 입을 열었다. 물론 보수신문의 전화 인터뷰를 통해서다. ‘시국 관련 오랜만에 말 꺼’낸 작가 이문열 이야기다. 어째 조용하다고 했는데 기어코 그를 이 먼지 세상에 끄집어내는 것은 그가 역시 이 나라 ‘보수 우익’의 수호천사인 탓인가.

 

보도에 따르면 ‘강기갑 국회 폭력 무죄’, ‘PD수첩 명예훼손 무죄’ 등 ‘일련의 재판 결과’에 대해 그는 ‘우울한 심정’을 토로했다고 한다. “말을 아끼면서 황당하고 울적하다는 말을 거듭했다”라고 한다.

 

그는 ‘우울한 이유’로 “예전에 내가 다분히 엄살 섞인 한탄을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그게 엄살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라고 답했다.

 

이건 무슨 말인가. 구체적으로 말해달라는 요구에 대해 그는 “일련의 판결이 정당한 사법부의 판단이라면 뭐라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원래 이 양반이 말을 어렵게 하는 사람이긴 하다. ‘싫다’고 하면 될 일은 ‘좋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라는 형식으로 말하는 이니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예전의 엄살 섞인 한탄’은 또 무언가. 문맥으로 미루어 보아 ‘정원미달의 삼류대학’ 출신인 내가 할 수 있는 추리는 이렇다. 그는 아마 이전에 ‘사법부의 좌편향’ 비슷한 점을 지적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게 엄살이 아니라 ‘현실’로 확인했다는 말씀이다.

 

그는 ‘무죄 선고’ 러시(?)가 못마땅하다?

 

‘정당한 사법부의 판단’이 아니라 ‘그게 다가 아니라’라는 건 또 무슨 말인가. 이 부분부정은 ‘사법부의 정당한 판단’에 ‘부당한 부분’이 있다는 말인가. 글쎄, 모르긴 몰라도 이 묘한 뉘앙스는 이번 ‘PD수첩 무죄 판결’과 관련해 조중동과 한나라당이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색칠하기’의 작가 버전인 모양이다.

 

짧은 인터뷰를 장식한 마지막 말도 ‘의미심장’하고 오묘하다.

 

“어떤 판사가 담당하느냐에 따라, 형사재판이냐 민사재판이냐에 따라 같은 사안의 판결이 크게 다른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전교조 시국선언 재판의 경우 지역마다 유·무죄 판결이 다르게 나오지 않았나. 사법부도 당파와 지역에 따라 판단이 갈리는 것인가. 객관성이 사라진 것 같아 즐겁지 않다. 즐겁지 않은 황당함이어서 우울하다.”

 

말인즉슨, 판결의 ‘공정성’이 의심스럽다는 얘기다. 그러나 형사와 민사재판이 판결이 다른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한때 사법고시에 매달렸다는 그의 전력을 의심케 하는 부분이다. ‘전교조 시국선언 재판’이 지역마다 유무죄 판결이 달랐다는 얘기는 금시초문이다. 기소된 시국선언 전교조 간부에 대한 첫 선고가 이루어진 것은 지난 19일이니 말이다.

 

그의 아쉬움은 역시 ‘무죄’ 판결에 있는 모양이다. 이 판결을 두고 ‘전교조의 정치활동에 면죄부 준 법원’이라고 일갈한 동아일보의 인식과 그의 생각은 아주 딱 맞아떨어진다. 나는 그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엄석대의 권력을 무너뜨린 새 담임교사에게 전교조의 이미지를 오버랩하고 있다는 혐의를 지울 수 없다.

 

현실의 모순을 적극적으로 타개한 이 의욕적인 젊은 교사를 그는 ‘새로운 권력’으로 바라본다. 아울러 그것이 새로운 독선과 폭력을 형성하리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데 여기서 읽히는 것은 ‘민주주의와 개혁을 위한 투쟁’을 바라보는 그의 비틀린 시선이다.

 

‘사법부도 당파와 지역에 따라 판단이 갈리’는 것이냐는 그의 반문 앞에서 입맛이 쓰다. 역시 이 ‘국민 작가’는 일련의 재판 결과가 몹시 거슬리는 모양이다. 그가 ‘당파와 지역’ 운운하는 것은 모두가 ‘유죄’ 판결이 나야 한다는 주장의 다른 표현이 아닌가.

 

모든 재판에서 그들이 기대하는 ‘유죄’ 판결을 내리면 사법부는 ‘정당·공정’하며 당파와 지역성으로부터 독립된 것인가. ‘객관성이 사라진 것 같아 즐겁지 않’고 ‘즐겁지 않은 황당함이어서 우울하다’라는 이 국민 작가에게 ‘국민’이라는 칭호는 ‘상식적’인 국민을 모독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듯하다.

 

과문한 탓에 나는 헌재의 ‘신행정수도법 위헌판결’ 때에, 그리고 국회에서 ‘미디어법’이 날치기로 통과되었을 때 그가 어떻게 논평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는 수도 서울이 ‘관습헌법’이기 때문에 이전할 수 없다는 헌재의 판결이 ‘좌편향적’이지도 않고 ‘정당’했으며, ‘객관성’이 유지되어서 행복했을까.

 

신 아무개 대법관이 촛불 재판에 관여한 사실이 드러나서 국민의 지탄을 받을 때, ‘정당한 판단’을 지향하는 그의 균형감각은 어떤 형식으로 작동했는지 궁금하다. 촛불 피고들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졌을 때 그는 ‘불장난을 오래 하다 보면 결국 불에 데게 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쾌재를 불렀을까.

 

다수 국민을 위해…그의 ‘우울’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는 당시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선 시민들의 저항을 ‘집단 난동’이라 규정하며 ‘의병’ 봉기론을 주창한 바 있다. 지금 법원 일각과 법관들을 대상으로 난동에 가까운 시위를 일삼는 우익인사들이 그가 말한 봉기한 ‘의병’일까.

 

며칠 전 전두환의 팔순 잔치가 열렸다고 한다. 그 잔치에 간 하객의 명단에서 국민은 ‘국민작가’ 이문열의 이름을 발견한다. 광주항쟁을 총칼로 짓밟고 권력을 탈취한 민주주의의 압살자, 나랏돈 1조 원을 횡령하고도 29만 원 운운하는 추악한 노인의 팔순 잔치에서 그가 챙긴 ‘당파성’과 '지역성'은 무엇이었는가. 그 향연의 자리에서 견고한 보수 기득권의 성채를 확인하고 그는 행복했던가.

 

어떤 경우에라도 그에게 ‘국민 작가’라는 존칭을 붙일 수 없다. 평범하고 상식적인 다수 국민의 자유와 권리가 아니라 한 줌에 지나지 않는 소수 기득권의 이해에 골몰하는 이 시대착오적 작가에게 붙이는 칭호로 '국민'은 ‘언감생심’ 아니겠는가.

 

그래서다. 유감스럽지만, 그의 ‘황당과 우울’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의 전도된 균형감각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게 다수 국민의 이해에 훨씬 좋을 것이므로. 그것이 뒤집힌 상식과 민주주의를 제 자리로 되돌리는 일일 터이므로. 그의 우울은 다수 대중을 위해서 매우 유익하고 바람직한 ‘희생’일 터이기 때문이다. ^^

 

 

2010. 1. 22.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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