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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송회와 이광웅] 진실과 정의는 ‘너무 늦다’

by 낮달2018 2020.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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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송회 사건 관련자 9명, 재심에서 모두 무죄판결

▲ 금강 하굿둑 휴게소 광장에 1998년에 세운 이광웅 시비

5공 시절 대표적 용공 조작 사건이었던 ‘오송회 사건’의 관련자 9명이 재심에서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다.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지난해 6월 이 사건이 “5공 시절의 전형적 용공 조작 사건”으로 규정하고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와 재심을 결정한 지 16개월 만이다.

 

특히 이 사건에 무죄를 선고한 재판부가 이례적으로 피고인들에게 법원을 대신해 사죄해 눈길을 끌었다. ‘법원에서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는 기대가 무너졌을 때 당사자들이 느꼈을 좌절과 원망’을 언급하며 재판부는 ‘보편적 정의 추구’를 약속했다고 한다.

 

1982년 11월에 경찰에 불법 연행되어 83년 5월, 1심에서 모두 징역형을 각각 선고받았던 때부터 따지만 그간 꼭 26년이 흘렀다. 교과서 속의 ‘진실과 정의’가 승리하는 데 꼭 그만큼의 세월이 필요했던 셈이다. 그러나 그건 늘 너무 늦기만 하다.

 

이 사건의 주모자로 7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87년 사면조치로 4년 8개월 만에 풀려난 이광웅 교사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는 사면 후 복직했지만, 1989년 전교조 가입으로 다시 해직되었고 1992년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군산제일고의 전·현직 교사들이 모여 시국 토론을 하고 4·19와 5·18 희생자 추모제를 지내던 모임이 이적단체가 된 건 거의 만화 같다. 경찰은 다섯 명[5]의 교사가 소나무[송] 아래에 모였다고 해서 ‘오송회’라는 이름을 붙였고 고문을 통해 이들을 용공 분자로 만들어 냈다.

▲ 이광웅 시비에 새겨진 시 '목숨을 걸고'

이광웅 교사는 시인이다. 그러나 나는 그를 전혀 알지 못한다. 80년대 후반에 그의 시를 몇 편 읽은 게 고작이다. 그를 추모하는 글을 쓰지 않으려 했던 내가 굳이 성긴 붓을 놀리고 있는 까닭은 오마이뉴스 블로그에서는 이틀이 지나도록 그를 기억하는 글이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북 예천에서 나서 전북 익산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던, 그의 후배 시인 안도현은 최근 한겨레에 연재하고 있는 글에서 그를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도종환 시인은 아예 “이광웅”이란 제목의 시를 썼다.

 

▲ 1985년 풀빛에서 펴낸 이광웅 시집 〈대밭 〉

1987년 선배 시인 이광웅이 ‘오송회’ 사건으로 복역하다가 출옥한 뒤에 나에게 또 백석의 시를 보여주었다. 낡은 대학노트에 아주 정갈한 글씨체로 또박또박 필사한 시였다.(이광웅 시인은 1992년에 세상을 떴다. 나는 이 필사본을 돌려드리지 못했다. 지금도 내 서랍에 보관하고 있다.)
    - 안도현, “시와 연애하는 법”(2008. 6. 20.)

역시 시의 길을 여는 조타수가 되려면 선천적인 재능보다 자신의 열정을 믿어야 한다. 일찍이 이광웅 시인은 “뭐든지/진짜가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목숨을 걸고>) 해야 한다고 했다. 열정의 노예가 되어 열정에 복무할 때 우리는 그 열정에 대한 신뢰를 가까스로 재능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 안도현, “시와 연애하는 법”(2008. 8. 19.)

 

안도현이 인용한 시 ‘목숨을 걸고’는 군산과 장항을 잇는 금강하굿둑 입구에 세워진 그의 시비에 새겨져 있는 모양이다. 술도, 사랑도, 교사도 목숨을 걸고 했던 시인 이광웅이 간 지도 벌써 16년이 넘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그 오송회 사건의 진실 앞에 서게 된 것이다.

 

숱한 용공 조작 사건을 만들어 기소하고, 그것을 실체적 진실로 규정하며 징역형과 사형을 선고했던 이 땅의 법률가들을 생각하는 까닭은 그래서다. 오심의 가능성이야 어디든 없겠냐만, 이 어이없는 진실의 왜곡이 어쩌면 그렇듯 쉬 이루어졌던가.

 

이 사건의 1심 판결에 불복한 피고들의 항소에 광주고법은 1심보다 더 무거운 형량을 선고했고 대법원은 상고를 기각했다. 그리고 25년, 꼭 4반세기 만에 그들의 후배들에 의해 무죄 선고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런 재심의 결과에 대해 과연 옛 판검사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가 나는 늘 궁금하다.

 

이광웅 시인은 내게 일면식도 없지만, 그는 선배 교사다. 그는 자기 삶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사랑하려 했던 이처럼 보인다. 그의 시가 그렇고 그의 삶이 그렇다. 그는 누군가의 표현대로 ‘맑아서 불온한 시인’이었음이 분명하다. 도종환 시인은 그를 가리켜 ‘고운 호수’, ‘저녁 하늘’, ‘눈물의 빗줄기’로 기억한다. 그게 어찌 시인의 기억만이겠는가.

 

그가 목숨을 걸고 되고 싶어 했던 ‘좋은 선생’의 자리는 교단에서 스물몇 해를 보낸 내게도 여전히 멀기만 하다. 일간지를 접으며 고통스러운 세월을 인내해 준 관련자들과 유명을 달리한 시인, 그리고 유족들에게 마음의 축하 인사를 보낸다.

 

 

2008. 11. 27.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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