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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어떤 ‘사죄’

by 낮달2018 2020.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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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 부사장의 ‘갑질’ 사태

▲ 대한항공이 30여 개 주요 신문  1면에 낸 ‘사죄’ 광고 ⓒ 한겨레  PDF

 

잘못 기른 딸 탓에 국내 유수의 재벌 기업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서툴게 부린 오너의 오만과 위세가 수십 년간 쌓아온 기업과 브랜드 이미지를 까먹은 데 그치지 않고, 온 국민의 손가락질을 받게 된 이른바 ‘땅콩 회항’ 사건 얘기다.

 

판단 오류…, 사과는 사과를 낳고

 

뭉뚱그려 자식을 ‘잘못 길렀다’라고 했지만,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그게 어찌 자식 교육을 잘못한 탓이기만 하겠냐고 말이다. 마흔 살짜리 부사장의 이른바 ‘닭짓’의 이면에 도사린 것은 이 땅의 천박한 자본주의, ‘합리적 계약’이 아닌 ‘봉건적 주종’으로 이해되는 노자(勞資) 관계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커녕 무한 특권으로 군림하려는 이 나라 부자들, 이른바 ‘상류계급’의 민낯이다.

 

국민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끝내는 구속을 기다리고 있는 마흔 살 오너의 딸은 자신의 ‘재벌질’(‘슈퍼 갑질’보다 더 무서운!)이 자초한 이 반전이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는 정말로 자신이 저지른 실수가 도덕적 일탈을 넘어 항공기 안전과 관련된, 절대 가볍지 않은 ‘범죄’라는 사실을 전혀 상상해 보지 못했을 것이다.

 

더러는 이 나라 기업의 위기관리 능력을 이야기하고 더러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부자들의 윤리의식, 그 왜곡된 가치관을 문제 삼는다. 그러나 어찌 그게 그들만의 문제일까. ‘갑질’은 중소 하청기업 앞에 선 대기업 사원도 서슴지 않고 행하는 게 낯설지 않은 우리 사회의 풍경 아닌가 말이다.

 

회항 사건 이후, 무엇이 ‘문제’인지를 잘 몰랐던 이 기업은 사건 전개의 국면마다 반 박자씩 어긋난 대응으로 국민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그러다 보니 ‘사과라고 할 수도 없는 사과’가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사과’의 ‘번지수’가 맞지 않다는 걸 단박에 눈치챌 수 있다.

 

‘땅콩 회항’이 있은 뒤 처음 나온 사과는 대한항공의 대국민 사과다. 잘못은 오너의 딸인 부사장이 저지르고 사과는 회사가 대신했다. 그런데 문제의 사과는 부사장의 잘못을 뉘우치는 게 아니라 승무원의 불찰을 강변하면서 회사는 여론의 지탄을 덤터기로 뒤집어써야 했다.

 

오너의 사과는 그나마 사태의 본질에 비교적 가까웠다. 그는 ‘딸을 잘못 기른 아비’의 불찰을 사과하며 몸을 잔뜩 낮추었기 때문이다. 이후 전개된 상황에서도 여전히 사과는 허공중에 대고 절을 하는 꼴을 면치 못했다. 정작 사과를 받아야 할 사람은 젊은 오너에게 굴욕적 질책을 당한 승무원이었으나 이들이 사과의 대상이라는 걸 가해자가 깨닫게 된 건 국토부 조사가 시작되면서였으니 말이다.

▲ 오너의 딸은 자신의 ‘재벌질’이 자초한 끔찍한 반전이 믿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 유성호

그러나 대한항공 전 부사장 조현아가 당사자인 사무장의 집을 찾았다가 남겼다는 사과 쪽지는 결코 하고 싶지 않은 사과를 해야 하는 속내가 고스란히 들여다보이는 것이었다. 그걸 보고 참담했다는 사무장의 고백에 여론이 백번 공감하는 이유다.

 

30여 신문에 실린 ‘사죄’ 광고

 

지난 16일 대한항공이 종합일간지·경제지·스포츠지 등 30여 개 주요 신문의 1면에 낸 ‘사죄’ 광고도 어정쩡하긴 매일반이다. 이 광고가 “진정한 사죄를 위한 용도가 아니라 ‘언론’에 잘 봐달라고 찔러주는 ‘촌지’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 광고”(미디어 오늘)라고까지 아니라 해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앞선 사과에서도 누차 드러났듯 사죄(사과)의 주체가 뒤바뀌어 있는 상태다. 잘못은 개인 조현아가 했는데도 사과는 회사가 대신하고 있는 형식이다. 이러한 형식에는 오너 일족을 회사와 동일시하는, 잘못된 조직문화가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승객으로 탑승한 비행기에서 분란을 일으켰으니 당연히 사과는 개인 조현아가 해야 마땅하다. 그녀는 승객과 승무원은 물론이고 대한항공 법인에도 사죄하는 게 옳다. 그녀가 돌출 행동은 승객과 승무원에게 피해를 준 것에 그치지 않고, 해당 기업의 브랜드 이미지 등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그래도 회사의 부사장 신분이었으니 회사가 그를 대신하여 사과할 수 있는 거라고 치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사죄문에는 사죄의 이유가 드러나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대한항공의 일’이라고 적혀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뼈대를 바꾸어 끼고 태를 바꾸어 쓰’[환골탈태(換骨奪胎)]는 노력을 기울이겠다니 사람들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 빨간 네모 안에 든 낱말을 적절한 것으로 교체해 보라. 그러면 제대로 된 사과가 될 수도 있다.

최초의 사과문이 나왔을 때 조종사 노조 게시판에 오른 한 조합원의 반박은 이 사죄문이 얼마나 엉뚱한 데를 가리키고 있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번 일을 계기로 승무원 교육을 더욱 강화’하겠다는 회사에 대해 이 조종사는 다음과 같이 이렇게 반문했던 것이다.

 

“철저한 교육은 이 일을 일으킨 본인만 각성하면 된다.
승무원 교육은 필요 없다.
해당 임원의 인격 수양 및 윤리의식만 고치면 된다.”

 

그렇다. 굳이 환골탈태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승무원이 아니라, 오너와 그 가족들, 그리고 책임 있는 임원들로 제한하는 게 맞다. 국토부 조사를 받으러 나오면서 수십 명 임직원이 수행하여 부사장이 행여 이용할 수도 있는 화장실이 불결하면 안 되니 거듭 청소를 요청하는, 어이없는 풍경으로 상징되는 해당 기업의 조직문화를 바꾸는 것은 그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사죄문’이 말하는 것들

 

대한항공이 낸 사죄 광고를 다시 들여다보면 문제가 분명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제목을 빼고 아홉 줄의 짤막한 사죄 문안에 빨갛게 네모를 친 부분을 주목해 보자. 문안에 세 번이나 쓰인 ‘대한항공’을 들어내면 거기 대신 삽입할 단어야 뻔하지 않은가 말이다.

 

사죄와 반성의 글이라면 마땅히 그 본보기가 되는 글이 있다. 일제 강점기에 하동군수 등을 지낸 사실을 일생을 통해 참회했던 법학자 이항녕이 쓴 글이 그것이다. 그가 1980년에 <조선일보>에 쓴 이 참회의 글에는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자신의 추악하고 부끄러운 모습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는 인간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그 진정성을 읽어낸다는 걸 이 드문 ‘참회의 글’은 웅변으로 말하는 것이다.

 

대한항공이 도하 각 신문 등에 낸 사죄문에는 한 기업의 위기관리 능력뿐 아니라, 여전히 전근대적 방식을 벗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노자 관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리고 검증된 경영 능력이 아니라 오직 혈연에 기대어 이루어지는, 천박한 이 나라 자본주의 문화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2014. 12. 18.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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