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친일문학 이야기

김기진, ‘황민(皇民) 문학’으로 투항한 계급문학의 전사

by 낮달2018 2020. 11. 9.
728x90

이 글은 2019년 5월에 출판된 단행본부역자들-친일 문인의 민낯(인문서원)의 초고임

[관련 기사 30년 문학교사가 추적한 친일문인의 민낯]

 

카프에서 활동한 비평가, ‘황민(皇民) 문학’에 투항

 

▲ 김기진(1903~1985)

‘기진’이라는 이름보다는 ‘팔봉(八峯)’이라는 호로 더 알려진 김기진(金基鎭· 金村八峯, 1903~1985)은 회월(懷月) 박영희와 함께 카프(KAPF=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의 주요 성원으로 활동한 이다. 그는 대체로 시인과 평론가로 소개되고 경향소설인 「붉은 쥐」(1924)를 쓰기도 했지만, 대중적 시인이나 작가로 알려진 이는 아니다.

 

파스큘라, 카프 등 계급문학의 주역

 

오히려 그는 우리 문학사에서 매우 소략하게 소개되는 1920년대 이후 계급문학(프로문학)의 전개에 매우 비중 있게 다루어지는 인물이다. 1924년 10월 좌익 문예 단체 파스큘라(PASKYULA) 창립 회원으로 참여한 이후 그는 1925년 8월 이 단체가 또 다른 좌익 문예 단체인 염군사(焰群社)와 합쳐 발족한 카프의 창립 회원으로 참여한 것이다.

 

1931년과 1934년에 있은 ‘카프 제1·2차 검거사건’ 때 그는 각각 열흘과 70일 동안 경찰에서 조사를 받고 석방되었다. 일제의 탄압으로 실질적으로 해산된 1935년까지 그는 박영희와 ‘내용 형식 논쟁’을 벌이는 등의 활동을 통해 비평을 문학사의 중심 위치로 올리는 데 이바지했다고 평가된다. [관련 글 :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 해산]

 

김기진은, 합병 후 영동 군수와 충주 군수를 지내고 일제로부터 여러 차례 훈작을 받아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관료 김홍규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본 유학 중에 사회운동에 관심을 가졌고, 재도쿄 조선인 유학생 연극단체인 토월회(土月會)의 창립 동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23년 『개벽(開闢)』에 평론 「프로므나드 상티망탈」을 발표하면서 평론가로 정식 등단했다. 같은 해 9월에는 문학동인지 『백조(白潮)』의 창립 동인으로도 참가했다. 파스큘라 창립 이후 그는 <매일신보>, <시대일보>, <조선일보> 등의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했는데 그가 본격적인 친일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1938년부터 1940년 1월까지 <매일신보> 사회부장을 지내면서부터다.

 

1938년 이후, 전쟁 찬양에서 징병, 학병 선동까지

 

1938년 9월에 조선 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가 호남과 남해안을 시찰할 때 <매일신보> 사회부장으로 수행하면서 「제주도 남총독 수행기」(9.20.~9.27.)와 「소록도를 보고 광주로―남총독 수행기」(9.28.~9.29.)를 썼다.

 

이 가운데 「제주도 남 총독 수행기 3―놀라운 각고 근면, 도내의 만리장성」에서는 도내 소학교 학생들이 일본의 제2 국가(國歌)라 하는 「바다로 가면」(海ゆかば)을 부르고 황국신민서사를 외우며 황민화되어 가는 모습을 긍정적으로 서술했다.

 

매사가 처음이 어렵다. 그 첫 단추를 끼우고 나면 나머지는 비교적 수월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후 가네무라 야미네(金村八峰)으로 창씨개명한 그는 총독부 외곽단체인 조선문인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영화에도 관여하게 되면서 「조선 영화의 새 출발」(<춘추>, 1942년 8월호)이라는 평론을 발표한다.

▲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매일신보>(1943.8.1.)

그는 이 평론에서 지금의 시국이 조선 영화에 요구하는 안건으로 “국어의 보급, 내선일체 이념의 철저, 일본정신의 파악, 필승체제로의 적극적 협력, 직역봉공(職域奉公), 증산·저축·개로(皆勞)의 실천, 방공·방첩 정신의 앙양, 동양 윤리 사상의 함양, 과학 지식의 보급, 시사인식의 강화 등등”을 들었다.

 

1943년 4월 조선총독부의 지시에 따라 조선문인협회 등의 네 단체가 통합하여 조선문인보국회로 출범하면서 그의 친일행각은 날개를 단다. 제국주의 전쟁 수행을 뒷받침하는 국민총력조선연맹에서 그는 보도특별정신대의 강사, 증산 위문 파견, 방문·좌담 기사 등의 선전, 선동 활동을 펼쳤다.

 

그에 따르면 중일전쟁은 ‘동아 신질서 건설의 역사적 사명을 가진 성전(聖戰)’이다.(「대아세아주의와 김옥균 선생」, 『조광』 1941년 11월호) 그는 만주 침략과 러일전쟁, 청일전쟁을 같은 성격의 전쟁으로 평가했다. 또 내선일체의 본보기로 일본의 극우단체와 조선의 김옥균을 연결 지었고 시조를 통해 일제의 침략전쟁을 우리의 전쟁으로 받아들이도록 유도하였다.

 

이 산과 이 냇가에 우리는 이웃사촌
삼천리 한집이요 내선(內鮮)이 일가어늘
어찌나 이 큰 전쟁이 내 싸움이 아닐까.
- 「경산시첩(慶山詩帖)1」, <매일신보>(1944.10.4.)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그가 쓴 일련의 시편들은 모두 ‘대동아전쟁’의 정당성과 미영에 대한 비난, 일본군의 승리에 대한 찬양 일색이었다. 또 침략전쟁에서의 희생과 그를 뒷받침하는 이른바 총후(銃後, ‘후방’의 뜻)봉공을 주장했다.

 

황군이 치는 곳에 난공불락 있을소냐.
백 년을 이 깨물고 참아 오던 철퇴 아래
제 소위 대불열전(大不列顚) 산산파편 되누나.

3개월 버티겠다 장담하던 그 입으로
이 몸은 포로 되려 황군 앞에 왔노라고
영(英) 총독 군인이라면 배 가르고 죽어야

긴 역사 비춰보면 백년도 잠시련만
세월을 헤이건대 지루한 압제였네.
다 같이 홍콩(香港) 함락의 만세 높이 부르세.
  - 「대동아전쟁송」, 『조광』(1942년 2월호)

 

1942년 2월 일찍이 우리가 바친 놋그릇들이 모조리 어뢰 되어
지금 서남태평양에서 악의 무리를 쳐부수는구나.
일찍이 공장에 들어간 아우가 누이가 정성을 다해서
못 한 개 나사 한 개 소홀히 하지 않은 우리의 비행기가
지금 미국의 태평양 함대를 놓치지 않고 뒤쫓아 가네.
아아, 주먹에 땀을 쥐고 이를 갈면서 우리도 따르자.
    - 「의기충천」, <매일신보>(1944.10.19.)

 

그는 이른바 ‘국민문학’의 당면 조건으로 ‘황도(皇道)정신의 앙양, 대동아 신질서 이념의 파악, 일본적 교양의 수련’ 등 세 가지(「국민문학의 출발―연두의 각서를 대신하여 5」 <매일신보>1942.1.14)를 들면서 ‘전쟁에의 진충(盡忠), 신질서 건설에의 협력, 세계문화에의 신 지향은 금일의 문단인들의 태도요 결의’(「탄환과 충언, 상」, <매일신보>1944.1.5.)라며 문학인의 적극적인 체제협력을 선동했다.

▲「나도 가겠습니다―특별지원병이 되는 아들을 대신해서」, <매일신보>(1943.11.6.)

징병과 학병의 선전, 선동에 있어서도 김기진은 여느 친일 문인과 다르지 않았다. 1943년 8월 1일부터 징병제가 시행되자 같은 날 화가 고희동의 호랑이 그림과 함께 그는 <매일신보>에 시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를 발표했다.

 

반도의 아우야, 아들아 나오라!
님께서 부르신다, 동아의 백만의 천 배의
용감한 전위의 한 부대로 너를 부르신다.
[……]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영광의 날이 오고야 말았다.
죽음 속에서 영원히 사는 생명의 문이 열리었구나.

 

1943년 10월 육군 특별 지원병 채용 시행규칙이 공포되면서 학도병 제도가 실시되자 <매일신보>에 실은 시에서 그는 특별 지원병, 즉 학병으로 나가는 아들의 목소리로 학병 지원과 희생의 대의를 노래했다. 그가 노래한 ‘피’는 군국주의 일본을 위한 덧없는 희생이었지만, 그것이 동양과 아시아의 지도를 바꾸는 일이라 강변하고 있다.

 

한 사람에 천년의 목숨 없고
천 살을 산들 썩어 살면 무엇에 씁니까!

대대로 받아 내려온 제 몸의 이 더운 피
이 피는 조선의 피이며 일본의 피요,
다 같은 아세아의 피가 아니오니까.
반만년 동양의 역사가 가르칩니다.

지금, 동양의 역사를 동양 사람의 피로 새로이 쓸 때 ―
지금, 아세아의 지도를 동포의 피로써 새로이 그릴 때 ―
    - 「나도 가겠습니다―특별 지원병이 되는 아들을 대신해서」, <매일신보>(1943.11.6.)

 

그의 바람대로 식민지 청년들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동양의 역사는 새로 쓰이지 않았다. 해방 후 그는 반민특위가 공개한 미체포자 명단에 포함되었으며, 자수를 권유받았으나 자수하거나 체포된 사실 없이 공소시효인 8월 30일을 넘겼다.

 

인민재판에서 살아나 ‘무공훈장’까지

 

한국전쟁이 발발해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그는 ‘인민재판’에 회부되어 즉결처분을 받았지만 닷새 후 극적으로 생환한다. 그 뒤 육군종군작가단에 입대해 ‘전선 문학’에 해당하는 글을 쓰면서 1952년에는 작가단 부단장으로 금성 화랑무공훈장까지 받았다.

 

종군작가단에 무공훈장을 얼마나 주었는지는 알 수 없다. 불과 칠팔 년 전에 동포 청년을 일제를 위해 총알받이로 내몰던 친일 부역 인사에게 적을 물리친 전공으로 훈장이 주어지는 이 한편의 일화 속엔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우리 역사의 단면이 어른거리고 있는 셈이다.

 

그는 문인이면서 친일로 전향한 이후 대부분 시간을 언론인으로서 보냈다. 그는 동족을 향해 친일과 순종을 강요하고 징병과 학병을 위한 선전 선동에 매진했다. 그러나 그는 단죄를 피했고, 전쟁 중의 공로로 훈장을 받고 전후에는 언론사 주필을 역임하기도 했다.

 

프랑스에서의 전후 청산에서는 문인과 언론인이 첫 번째 숙청 대상으로 올랐던 것은 그들이 무엇보다 가장 증오받는 부역자들이었기 때문이다. 파리의 한 부역자재판소에서 재판받은 작가·언론인 32명 중 12인이 사형선고를 받고 그중 7인이 처형되었다는 기록은 그 단적인 실례다.

 

그러나 35년 동안 식민지배를 받았지만 우리는 한 명의 문인도 단죄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은 일말의 참회도 없이 해방된 독립 조국의 과실을 아낌없이 챙겼다. 팔봉은 한국 펜클럽과 한국문화협회 고문, 예술원 회원을 지냈고 문화훈장을 받았다.

 

해방 후 자신의 친일 행위에 대한 그의 회고-「나의 회고록」(1964~66), 「일제 암흑기의 문단」(1970)-는 그러나 황당하기만 하다. 문인보국회의 상무이사를 맡은 것 외에는 일체의 친일 활동을 한 바 없으며, 보국회에서도 전혀 일을 하지 않고 오로지 독립을 위한 ‘비밀공작’(일제가 물러간 뒤에 민족의 독립을 준비할 신간회와 같은 민족 기간단체를 꾸릴 정치자금을 모으기 위한!)을 했다는 것이 그가 훗날에 남긴 기록들 속에서 되풀이 주장하는 내용이다.

 

팔봉 김기진은 1985년 5월에 죽었다. 향년 82세. 신군부 집권 기간 중이었지만 기득권 세력에게 있어서 세상은 언제나 ‘태평성대’였다. 1989년 한국일보사에서 그의 문학을 기리는 팔봉 비평문학상을 제정했다. 이 상은 『친일 인명사전』에 오른 문인 가운데 김동인, 서정주를 기념한 문학상에 이은 세 번째 문학상이다.

 

팔봉 비평문학상, “친일은 친일이고 상은 상이다?”

 

2013년에 두 명의 현업 음악가가 난파의 친일 전력을 이유로 ‘난파음악상’ 수상을 거부하는 파란이 있었다. 음악가 홍난파를 기념해 만들어진 이 상은 제정 46년 만에 수상자 선정이 무산된 것이다. 새삼스레 수상 거부 사태가 일어난 것은 역사 왜곡을 둘러싸고 양국 간의 첨예한 대립의 영향 탓이었을까.

 

팔봉 비평문학상은 첫 회에 김현이, 두 해째엔 김윤식이 수상했고, 이어서 김치수, 김우창, 김병익, 김주연, 염무웅 등 이 나라의 내로라하는 비평가들이 수상자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친일은 친일이고, 상은 상’일 뿐일까. 미당문학상이나 동인문학상 역시 마찬가지다. [관련 글 : 동인문학상·팔봉비평문학상 폐지해야 하는 이유는]

 

대저 상이란 문학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이들을 기리고 그들의 업적을 토대로 후배 문인들을 격려 평가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그러나 가장 어둡던 시대의 아픈 자취를 짐짓 외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게 우리 문학사의 우울한 초상이다.

 

 

2019년 5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