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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친일문학 이야기

파인 김동환, 일제에 엎드려 ‘웃은 죄’

by 낮달2018 2020. 1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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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사시 ‘국경의 밤’과 ‘산 넘어 남촌에는’의 시인 김동환의 친일 부역

이 글은 2019년 5월에 출판된 단행본부역자들-친일 문인의 민낯(인문서원)의 초고임

[관련 기사 30년 문학교사가 추적한 친일문인의 민낯]

 

▲ 파인 김동환(1901~?)

파인(巴人) 김동환(金東煥·白山靑樹, 1901~?)이라면 낯선가. 그럼 혹시 「북청 물장수」나 우리나라 최초의 서사시라는 「국경의 밤」을 기억하시는가. 그도 저도 아니면 「웃은 죄」라는 시는 어떤가. 시골 마을 우물가 처녀와 한 나그네 사이에 오간 미묘한 교감을 과감한 서사의 생략으로 그려낸 이 짧은 시는 여운이 꽤 길다.

 

지름길 묻길래 대답했지요.
물 한 모금 달라기에 샘물 떠 주고,
그러고는 인사하기 웃고 받었지요.

평양성에 해 안 뜬대두
난 모르오.
웃은 죄밖에,

 

그래도 기억이 아련하다면 「산 너머 남촌에는」이라는 대중가요를 기억하시는가. 1965년에 김동현이 작곡하고 ‘꾀꼬리’로 불린 가수 박재란이 부른 이 노래는 당시 크게 히트했다. 같은 시행의 반복과 토속적인 시어에다 7·5조 3음보의 율격이 매끈하게 목에 감겨오는 노래다.

 

그러나 이처럼 만만찮은 서정을 보여준 김동환은 조선인 최초의 지원병으로 1939년 6월 하순에 전사한 이인석(李仁錫)을 찬양한 시를 통해 일본군 지원을 선동한 시인이기도 하다. 평범한 농민은 전사를 통해서만 미천한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이인석을 본받아 이 땅의 젊은이들은 하루바삐 ‘영광스러운 죽음의 길’로 뛰어들라고 독려한 것이다.

 

이인석 군은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았던가
그도 병(兵) 되어 생사를 나라에 바치지 않았던들
지금쯤 충청도 두메의 이름 없는 농군이 되어
베옷에 조밥에 한평생 묻혀 지내었겠지
웬걸 지사, 군수가 그 무덤에 절하겠나
웬걸 폐백과 훈장이 그 제상에 내렸겠나.
  -「권군(勸君) ‘취천명(就天命)’」, <조선일보>(1943.11.7.)

 

김동환은 함경북도 경성 출신이다. 본명 김삼룡(金三龍)을 김동환으로 개명한 것은 1926년. 호는 파인(巴人)·취공(鷲公), 필명은 김파인(金巴人)·초병정(草兵丁)·목병정(木兵丁)·석병정(石兵丁)·화병정(火兵丁)·강북인(江北人)·강서산인(江西山人) 등을 썼다.

 

김동환은 1924년 5월 문예지 『금성』에 시 「적성(赤星)을 손가락질하며」로 등단했다. 이후 <동아일보>, <시대일보>, <조선일보> 등에서 기자로 일했고, 1925년 3월 첫 시집이자 우리나라 현대시 사상 최초의 장편 서사시 『국경의 밤』을 발간했다.

 

일본 유학 시절, 유학생들이 창립한 재일조선노동총동맹에서 중앙집행위원을 맡았던 그는 1925년 8월부터 1928년 7월까지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에서 활동했다. 1927년 1월 프롤레타리아 연극단체인 불개미극단을 창단하기도 했다.

▲ 대중잡지 <삼천리>는 1930년대 중후반 이후 시국성을 드러내는 화보로 표지를 장식했다.

김동환은 1929년 6월 삼천리사를 만들어 종합월간지 『삼천리』를 창간했다. 1930년에는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2월에는 서대문경찰서에 검속되었다가 풀려났다.

 

김동환이 창간한 『삼천리』는 1930년대 중후반부터 체제에 순응하여 내선일체와 황민화 운동을 적극 선전하였는데 그의 친일도 이러한 출판 활동과 궤를 같이했다.

 

백산청수(白山靑樹:시라야마 아오키)로 창씨개명한 그는 ‘태백산의 푸른 나무[백산청수(白山靑樹)]’ 대신 ‘백산고사목(枯死木)’의 길로 나아갔다.(임종국) 김동인과 박영희 등이 선정되어 떠난 ‘북지 황군 위문 문단사절’ 행사(1939)에 후보로 선출되었다가 탈락한 그는 이후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벌인다.

 

조선총독부 외곽단체인 조선문인협회 결성에 발기인으로 참여해 출범 때 간사를 맡았고 뒤에 조선문인협회 이사로 ‘전선 병사 위문대 보내기’ 행사를 주도했다. 1941년 10월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 상무이사를 맡은 뒤 쓴 글은 자못 비장한 어조로 내선일체와 황민화를 선동한다.

 

황군 장병 11만 명이 죽었는데 조선사람은 겨우 세 사람이 죽었고 국채 소화의 힘도 내지의 어느 1현만도 같지 못하고 그 밖에 무엇무엇 모두 다 빈약하였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심히 부끄러운 일이외다.
대체로 우리가 이번 성전에 참가하는 데 세 가지 단계를 밟아야 할 줄 압니다. 제1기는 사상전 즉 우리 2400만 조선인이 다 황도 정신을 파악한 일본국민이 되는 일로, 이러하기 위하여는 우리들 일부에 종래 가지고 있던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깨끗이 청산하고 한 사람도 빠지지 말고서 내선일체의 길에 들어섭시다.

그런 뒤 제2기로서 우리는 우리가 가진 돈과 땀을 나라에 바칩시다. 돈으로 애국공채를 사고 전쟁에 필요한 놋그릇, 금, 동, 쌀을 바칩시다. 또 땀, 즉 노력을 바칩시다. 국가에서는 지금 지하자원의 개발, 양미 증식을 위하여, 국민의 노력을 간절히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노력을 통하여 국책에 협력합시다.

이렇게 국민정신을 통일하고 그런 뒤 노력과 물자와 돈을 바치고 그러고 난 뒤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피를 바치는 일이외다. 우리의 생명을 전장에 바쳐야 하겠습니다. 황군 장사 모양으로 총과 칼을 메고 우리도 전장에 나아가 우리나라 일본제국을 방위하여야 할 것입니다.
     - 「임전보국단 결성에 제(際)하여」(일문), 『삼천리』(1941년 11월호)

 

1943년 8월부터 조선인 징병제가 시행되자 8월 7일자 <매일신보>에 발표한 시를 통해 일왕의 은혜에 감읍하면서 온 민족이 그 ‘님’의 앞으로 가자고 노래했다. 「출정하는 자제에게 주는 말」에서는 ‘이기지 못하거든 죽어서 돌아오라’고 강변하기도 했다.

▲ 김동환이 쓴 싱가포르 함락에 감격한 소감. <매일신보>(1942.2.20.)

5월 담장에
월계꽃 피듯
인제, 우리 자녀
송이송이 피오리다.

누가 감히 낮추어 보랴
님이 쓰실 이 소중한 몸을,
누가 감히 범하려 들랴
님이 부르실 이 거룩한 자녀를.

앞으로! 어서 앞으로!
우리 2천7백만, 님의 앞으로!
  -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매일신보>(1943.8.7.)에서

아들아 오늘 나아가거든 마지막까지 참고 버티어서 끝끝내 이기고 돌아오라. 이기지 못하겠거든 신던 신 한 짝이라도 이 아버지는 돌아오기를 원치 않는 줄 알아라.
- 「출정하는 자제에게 주는 말」, 『신시대』(1944년 3월호)

사랑하는 병사여!맥추(麥秋) 익어가는 4백여 주(州) 넓은 벌엔 그대의 선배들이
우리의 명예와 신뢰를 짊어지고 지금 싸우고 있잖는가,
그 중에 두 분은 벌써 ‘호국의 충혼’이 되어서
정국(靖國:야스쿠니) 신사 신전 속에 고요히 누워 계시잖는가,
아직도 4년에 미치는 동아의 전화(戰火)는 끈칠 줄을 몰라서
백만의 요우(僚友)가 포첩(砲疊) 속에 분전하고 있거늘
어서 그대도 조련(操鍊)을 마쳐 나아가 군고(軍鼓)를 치라, 나아가 나팔을 불라.
  - 「1천 병사의 수풀(一千兵士の森)」, 『삼천리』(1940년 12월호)

 

동포를 침략전쟁에 동원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전쟁 상대국인 미국과 영국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그는 여러 편의 글에서 미국과 영국의 침략성을 상기시켰고 이에 대립하는 일본의 전쟁은 ‘침략’이 아닌 ‘해방’전쟁으로 묘사했다.

 

이 총 끝 닿는 곳, 진주만이요, 보르네오요, 적도 밑이며
이 총소리 들리는 곳, 비율빈(比律賓:필리핀)이요, 포왜(布哇:하와이), 인도 사람의 귀라
강적 영미의 심장 찌르려 한다 그 총자루 5억인가 10억인가,
[…중략…]
일본이여, 일본이여 나의 조국 일본이여
어머니여, 어머니여 아세아의 어머니 일본이여
주린 아이 배고파서, 벗은 아이 추워서
젖 달라고, 옷 달라고 10억의 아이 우나이다, 우나이다
    - 「총, 1억 자루 나아간다」, 『삼천리』(1942년 1월호)

물러가라 쫓아내라 포악 미영을
천리 옥야(沃野) 비율빈도 동양 것이요
석가 신(神) 인도 땅도 동양 것이라
주인 두고 너희들은 왜 들어왔노

물러가라 쫓아내라 포악 미영을
백여 년을 아편 위에 영화 누리던
거만스런 홍콩 총독 몰아내듯이
마래(馬來 : 말레이시아) 포왜 인도 총독 모두 내치자

물러가라 쫓아내라 포악 미영을
아세아의 땅 위에 익어 오르는
벼 한 포기 석유 한 알 다치게 말고
파나마 수에즈 운하 저쪽에 몰자
    - 「미영장송곡(米英葬送曲)」, <매일신보>(1942.1.13.)

▲ 김동환이 <삼천리>(1942.2.)에 발표한 전쟁시 '총1억자루'

1942년 5월, 김동환이 창간한 잡지 『삼천리』는 제호를 『대동아』라 바꾸고 본격적으로 일제의 침략전쟁을 지원·찬양하기 시작했다. 그는 개체호에 실은 「내외동포에 호소한다-본지 대동아로 개제, 재출발에 즈음하여」(內外同胞にふ訴-本誌大東亞と改題, 再出發に際して)에서 영미를 동아에서 완전 추방할 때까지 전진하기 위해 일체의 사심을 버리고 ‘야마토(大和) 정신’ 속으로 뛰어들어 최대의 양식과 희생을 바치자고 호소했다.

 

침략전쟁을 지원할 ‘총후(銃後:후방)’의 자세에 대해서 『대동아』에 발표한 「군복 깁는 각시네」는 그가 쓴 친일 시의 백미(?)다. 이 시는 이른 봄 조선임전보국단 본부에 장안 각시들이 모여 조선군사령부에서 가져온 해진 군복을 정성스레 깁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임금님 부르심이 내리자, 이내 일어나
만 리 전장에 내달아 이렇게 옷이 다 해질 철까지 싸운 것을, 싸우신 것을.

군복 입은 남편이 어떻게 빛나 보일까
사내 된 이 살아서 군복을 입고, 죽어 국기에 말려 묻힐 것을

조선의 여인도 인제는 전장에 달리는 젊은이에 꽃다발 드리노라, 치마폭에 한 아름 안아 드리려노라.
- 「군복 깁는 각시네」, 『대동아』(1942년 5월호)

우리들은 겨우 일곱
수는 적으나 바위라도 치리라
하고 수저운 듯 손 들며 일어서는 7인의 청년
어찌 일곱이 적다 하리,
7백에서 줄고 줄어 오늘의 일곱됨이 아니고
그대들 이제 7천으로 7만으로 썩썩 늘어갈
그 일곱이 아니던가.

(……)

임금님을 위해 싸움마당에 나아가
목숨 버릴 것을 이미 각오하고 나서는 그 양 미간
나는 거기서 불을 보았다, 큰 해를 보았다.
- 「우리들은 7인」, 『대동아』(1942년 5월호)

 

김동환은 1943년 조선문인보국회의 심사부장을 맡은 데 이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후신인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참사로 활동했다. 일제의 신체제 운동을 수행한 국민총력조선연맹은 1944년 2월에 보도특별정신대를 결성하여 조선 각지의 대회에 보냈는데 김동환은 경상북도로 배정받아 활동했다.

 

그는 1944년 7월에는 일본어 논문 모음집 『조선 동포에게 고함(朝鮮同胞に告ぐ)』을 편찬하여 발간했다. 이 책은 징병제·대동아전쟁·내선일체·전시 식량증산·징병제 하의 조선부인의 역할 문제 등을 다루었는데 필자는 언론사 사장, 일본문학보국회원, 귀족원 의원 등으로 활동하는 일본인들이었다. 마침내 김동환은 충실한 일제의 하수인 구실을 다하고 있었다.

 

해방 후, 반민특위에 자수, 셋째아들이 부친의 죄과를 사죄

 

해방 후, 1946년 2월 김동환은 조만식이 이끌던 조선민주당의 간부로 활동했다. 1948년에는 삼천리사를 다시 열고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삼천리』를 복간, 1950년 6월까지 펴냈다.

 

김동환은 1949년 2월, 반민특위에 자수하여 수감되었다가 공민권 정지 5년을 선고받았다. 김동환은 구차한 궤변으로 자신의 친일행위를 변명하지는 않은 것 같다.

 

한국전쟁 중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에 자수한 뒤 그는 행방불명되었다. 납북된 것으로 여겨지지만 이후 행적은 밝혀진 것이 없다. 재혼한 소설가 최정희(1912~1990) 역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렸으니 친일도 부창부수였던 걸까. 최정희와 낳은, 뒷날 소설가가 된 지원(1943~2013)과 채원(1946~  ), 두 딸이 있다.

 

부친의 일대기를 펴낸 바 있는 파인의 셋째아들이 2002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연 학술심포지엄에서 ‘부친의 친일 죄과’를 민족 앞에 사죄한 것은 특기할 만하다.

 

친일인사가 스스로 자신의 행위를 참회하는 예도 드물지만, 후손이 선대의 친일 행위를 사죄한 것은 처음이 아니었나 싶다. 파인의 삼남 김영식은 부친이 친일문인으로 지목된 것에 ‘아무런 이의가 없다’며 역사적 평가에서 공과가 교차된 선친의 행적은 분명히 그 분야에서 일하는 후배들에게 교훈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경찰 총경으로 은퇴한 김영식은 반민특위 김상덕 위원장의 후손들을 직접 만나 사죄하기도 했으며,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이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일제 말엽에 한때 저지른 치욕적인 친일행위를 뉘우치고 변절 고충을 고백하면서 ‘반역의 죄인’임을 자처했던 바 있음을 되새겨보면서, 저는 가족을 대신하여 국가와 민족 앞에 깊이 머리 숙여 사죄합니다.”
- 『아버지 파인 김동환-그의 생애와 문학』(국학자료원, 1994), ‘펴내는 말’에서

 

파인 김동환의 시 「웃은 죄」를 눈으로 거듭 읽어본다. 우물가 처녀에겐 나그네와 나눈 교감에 대해서 ‘웃은 죄’밖에 없다고 할 수 있지만, 시인이 자신의 나라와 민족을 부정하고 식민 지배에 투항한 것은 어떤 변명으로도 용서받기 어렵다. 그는 그것을 알았기에 두 번에 걸쳐 자수를 감행한 것이었을까.

 

꾀꼬리 가수 박재란의 목소리로 「산 너머 남촌에는」을 들으며, 파인이 노래했던 남촌은 어디였을까를 무심히 생각해 본다.

 

2019. 0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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