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회의 ‘자열서’에서조차 무죄를 주장한 ‘해에게서 소년에게’의 시인
우리는 신체시(新體詩) 「해에게서 소년에게」(1908)의 작자로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을 만난다. 최초의 신체시로 평가되는 이 노래는 근대 자유시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가 있을 뿐, 정제된 형식을 갖추거나 일정한 장르적 특성을 지닌 시편으로는 볼 수 없다.
이 작품은 그가 창간한 잡지 『소년(少年)』 창간호(1908년 11월호)에 실렸는데, 이때 그는 열여덟 살이었다. 요즘 같으면 고등학교 졸업반일 나이에 잡지를 창간하였다는 게 놀랄 만한 일이지만, 그것은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독학으로 한글을 깨쳐 열한 살 때부터 《황성신문》에 투고하던 육당의 비범성과 함께 근대로 이행하던 ‘시대’의 소산으로 이해될 수 있을 듯하다.
「해에게서 소년에게」와 『불함문화론』의 작가
육당 최남선은 1902년 경성학당에서 일본어를 배웠고, 1904년 대한제국 황실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1906년, 대한유학생회에서 발간하는 『대한유학생회학보』 편찬원을 맡아 편집인으로 활동하였다. 그해 겨울에 귀국하여 1907년 인쇄시설을 갖춘 출판사 신문관(新文館)을 설립하였다.
1908년 11월 1일 춘원 이광수와 함께 최초의 근대 종합잡지인 『소년』을 창간하였는데, 지금 우리는 이날을 ‘잡지의 날’로 정해 기리고 있다. 1909년에는 안창호와 함께 ‘청년학우회’를 결성하였다. 이듬해 10월 민족문화를 보호하기 위해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를 설립하여 조선 고서(古書)를 국문으로 번역·발간하였고, 10여 종의 육전소설(六錢小說)을 펴냈다. 이때 육당은 조선어사전 편찬 계획을 구상하였다고 하니, 어문과 역사에 대한 만만찮은 자질을 이미 드러낸 셈이었다.
한일병합 후에도 그는 『붉은 저고리』(1912), 『아이들 보이』(1913), 『새별』(1913) 등의 잡지를 창간하여 발행하였으나, 조선총독부의 ‘신문지법’ 명령으로 모두 강제 폐간되었다. 1914년에도 종합계몽잡지 『청춘』을 발간하여 새로운 지식을 보급하고 민중을 계몽하고자 하였지만, 이 역시 1918년에 강제 폐간되었다.
육당 최남선은 1919년 3·1운동의 주역으로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체포되어 2년 8개월간 복역한 뒤 1921년 10월에 가출옥하였다. 일제가 밝힌 가출옥 사유는 ‘(최남선이) 청년들을 규합하는 데 대단히 좋은 영향이 있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총독부에서 청년들에 대한 그의 영향력을 취하려 한 것이다.
총독부는 또 조선은행 총재 미노베 슌키치(美濃部俊吉)에게 잡지 『동명(東明)』의 발행 자금을 지원하도록 주선하였는데, 그 이유도 가출옥 사유와 맥을 잇는다. 총독부는 최남선의 출판물을 통해 “조선의 사상계의 악화를 구하고, 또 진학문·이광수 등의 생계비 출처로 삼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최남선은 1922년 동명사(東明社)를 세우고 9월에 주간지 『동명』을 창간하여 1923년 6월까지 발행하였다. 1923년 일간지 발간을 인가받고, 이듬해 3월 《시대일보》를 창간하여 사장 겸 주간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 조선의 문화와 역사를 연구하는 계명구락부 활동에 참여하였다.
1926년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국토 순례기인 『심춘순례(尋春巡禮)』, 근대 최초의 창작시조집 『백팔번뇌』를 출간하였다. 1927년에는 백두산을 민족의 영산으로 보고 민족정신을 강조한 기행 수필 『백두산 근참기』를 출간하고, 동북아시아 문화권 속에서 한국 문화를 고찰한 논문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을 발표하였다. 『불함문화론』에서 그는 동방 문화의 근원지를 단군신화의 무대인 백두산이라고 주장하였다.
조선사편수회 위원으로 식민사학에 참여
최남선은 1928년 10월 조선사편수회 촉탁을 거쳐 12월부터 조선사 편수회 위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조선사편수회는 1925년 6월 조선총독부가 산하의 조선사편찬위원회를 “조선 사료의 수집, 편찬 및 조선 사의 편수를 담당”하도록 확대 개편한 기관으로, 이후 ‘조선사’ 편찬 등을 통해 식민사학을 집대성하였다. 조선사편수회 위원은 조선 총독 이 ‘조선 역사에 학식과 경험이 있는 내선(內鮮)의 인재’를 선정하고 일본 내각에서 임명하였는데, 이로써 이들에게 ‘조선사’의 내용에 책임을 지는 지위를 부여한 것이다.
총독부의 조선사편수회에 가담한 일을 주변에서 최남선이 일제의 식민 지배에 협력하는 변절의 단초로 판단했던 듯하다. 이 일로 그는 이광수와 절교해야 했고, 한용운과 홍명희 등도 그에게 결별을 선언하였다. 한용운은 육당의 나무 위패를 새기고 장례식을 거행하여 그를 조롱하기도 하였다.
뒷날 김창숙 선생이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고 있을 때다. 교도소장이 최남선의 「일선융화론(日鮮融和論)」을 주면서 감상문을 쓰라고 하자, 선생은 첫 몇 장을 읽더니 교도소장에게 책을 던지며 의연히 외쳤다.
“나는 반역자가 미친 소리로 요란하게 짖어대는 흉서(凶書)를 읽고 싶지 않다. 기미년 독립선언서가 (최)남선의 손에서 나오지 않았는가. 이런 사람이 도리어 일본에 붙어 역적이 되었으니 비록 만 번 죽여도 죄가 남는다.”
1935년 무렵부터 최남선은 한국과 일본의 ‘문화동원론(文化同源論)’ 을 주장하면서 일본 신도(神道)의 보급에 관여하였다. 그가 시도한 개량적 문화주의운동인 문화동원론은, 일찍이 1920년대에 한국 문화의 우월성을 주장한 불함문화론에서 일본 문화 우월론으로 넘어가는 1940년대 시기에 과도기적 지위를 갖는다. 그것은 태생에서부터 식민 지배를 합리화하는 논리였던 것이다.
1936년 6월 최남선은 조선 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의 주임관 대우 참의를 맡아 1938년 3월까지 재임하면서 매년 1200원의 수당을 받았다. 1937년 《매일신보》에 연재한 「조선 문화의 당면 과제」(2월 9~11일)를 통해 조선 문화의 일본화야말로 당면한 문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매일신보사 주최의 ‘북지사변 비상시국좌담회’와 경성일보사 주최의 ‘시국과 조선’ 좌담회에 참석하였다.
시국의 인식을 철저히 할 것은 물론이며 총후봉공에 극진 노력하여 출동 군인의 가족 부조 보호에 유감이 없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국론을 절대 지지하여 대세에 순응하는 동시에 국제 스파이와 유언비어에 미혹하지 말고 비상시국에 철저하여 분진하는 것이 가장 간절한 일이다.
- 경성방송국의 시국 강연 중에서
1938년부터 1941년까지 《만몽일보(滿蒙日報)》와 《만선일보(滿鮮日報)》 편집 고문을 맡았다. 1938년 4월 만주 건국대학 교수로 부임하여 1943년 2월까지 만몽 문화를 강의하였다. 만주국 국무원 직할의 건국 대학은 ‘오족협화(五族協和)’를 실현하기 위한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수도 신징(新京)에 세워진 대학이었다.
‘문화동원론’에서 ‘일선동조론’까지
「최남선의 보수」(『삼천리』 1939년 1월호)에 의하면, 그는 “학교에서 교수로서 매월 800원, 그리고 서울 매일신보사에 집필 원고료를 매일 8원씩 합계 240원을 받아 합하여 1040원”의 수입이 있었고, 이 밖에 “최근에 《만선일보》에 취임하였으므로 거기서도 보수를 받기로 되었다”고 전한다. 간단히 계산해도 연 수입이 약 1만5천 원에 이르는데, 이는 당시 군수 연봉(1050~3400원)에 비기면 엄청난 고액이었다.
1940년부터 최남선은 일제의 침략전쟁을 지원하는 기관과 단체의 간부를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일제에 협력하기 시작하였다. 그해 10월,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관동군의 토벌 작전과 선무공작을 지원하기 위해 결성된 동남지구 특별공작후원회의 고문직을 맡았다.
1941년 8월에 황국정신의 앙양, 강력한 실천력의 발휘, 시국 인식의 철저와 그 대책 결의, 근로 보국의 실행 등을 목적으로 하는 흥아보국단(興亞保國團)의 준비위원을 맡았고, 같은 해 9월 전시 최대의 민간 협력 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관련 글 : 국민총력전을 위한 친일 단체 ‘조선임전보국단’ 결성]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3년 11월에는 일본에 유학 중인 조선인 학생들의 학병 지원을 권유하는 학도병 일본 권설대(勸說隊)로 활동하였다. 동포 청년들에게 전쟁터로 나갈 것을 종용한 것이다. 일본 메이지대학 강당에서 열린 ‘반도 출신 출정 학도 궐기대회’(11월 24일)에서 그는 “미영(米英) 격멸의 용사로서 황군이 된 참 성심을 발휘하는 가운데 잘 싸워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라며 학병 지원을 권유하는 연설을 하였다.
이 강연에는 춘원 이광수도 동행하였다. 당시 도쿄에서 발행된 잡지 『조선화보』(1944년 1월호)에는 아동문학가 마해송의 사회로 진행된 최남선과 이광수의 대담 내용이 실려 있다. 이 대담에서 그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는 좀 낯 뜨겁다.
춘원 : 일종의 극적 광경이라고나 할까. 황국을 위해 전장에 나가 죽 자는 생각이 모두의 얼굴에 드러났더군요. ……그때의 압권은 최(남선) 선생님의 강연이 아니었을까요.
육당 : 적어도 천오백 명은 모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찍이 없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지요…….
육당 : 어떤 학자는 ‘(일본)무사도의 연원은 신라의 화랑이 그 토대였다’라는 것을 생각할 정도지요.
춘원: 저 ‘화랑’의 사상이란 오늘날 막바로 부활시켜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최남선은 만주사변(1931) 이후 일제의 만주 침략과 만주국 건국을 지지하는 여러 편의 글을 언론에 기고하였다. 1937년 11월호 『재만 조선인 통신』에 「만주가 우리에게 있다」라는 글을 기고해 조선인이 일제의 만주 침략을 지지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만주국 관립 건국대학을 선전하면서 비슷한 주장을 되풀이하였다.
또한 그는 만주국 건국 12주년을 맞아 『방송지우』 1944년 4월호에 기고한 「신세계 건설의 도화선」에서 만주국 건설에 대하여 “세계의 질서를 바꾸려 하는 일”이며 “동방의 맹주요, 신세계의 지도자인 일본 제국의 용기와 총명과 정의”로 이루어졌다고 찬양하였다. 그는 만주 침략은 “‘도의(道義)’를 위한 것”이요, 만주국 건국은 “일제에 의한 ‘낙 토 건설’”이라고도 극찬하였다.
나라를 위하여 일신을 바칠 큰 뜻이 있고 나라를 위하여 어떠한 곤고(困苦), 결핍이나 어떠한 근로라도 사양하지 않을 결심이 있으며…… 오인(吾人)은 오국(吾國)을 구성하는 각 민족 중에 이러한 청년이 많기를 바라고 기도한다.
- 「건국대학과 조선 청년」, 『삼천리』(1938년 10월호)
대동아공영권 지지, 전쟁 참여와 학병 지원 독려
최남선은 중일전쟁 시기에 일제의 중국 침략과 ‘대동아공영권’을 지지하고, 조선인의 전쟁 참여와 학병 지원을 독려하는 글을 썼다. 그는 《매일신보》에 기고한 「내일의 신광명(新光明) 약속」(1937년 8월 15일 자)에서 “일본의 존재와 발흥은 아시아의 기운이요 동방의 빛”이 라며 중일전쟁이 “일본을 맹주로 하여 일대 대동단결을 만들어서 백색 인종에 대하여 우리 동방의 역사와 생활과 영광을 확보할 좋은 기회”라고 주장하였다.
「학도여 성전(聖戰)에 나서라–보람 있게 죽자」(《매일신보》 1943년 11월 5일 자)에서는 “오늘날 대동아인으로서 이 성전에 참가함은 대운(大運) 중에 대운임이 다시 의심 없다. 어떻게든지 참가하고야 마는 최고 명령을 받고 있다”라며 “원광법사의 임전무퇴의 사자(四字)까지를 진두(陣頭)의 청년 학도에게 선물하고 싶다” 고 썼다.
그는 《매일신보》에 발표한 「나가자 청년학도야」(1943년 11월 20일 자)에서 “(대동아전쟁의) 세기적 성업에 이바지하게 됨은 실로 남자로서 태어난 보람이 있는 감격”이라며, “청년학도들은 두 어깨에 짊어진 특별한 의무와 책임”을 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대동아의 전장에 그 특별지원병으로서의 용맹한 출전”을 해서 “일본 국민으로서의 충성과 조선 남아의 의기를 바로 하여 부여된 광영의 이 기회에 분발 용약(勇躍)하여 한 사람도 빠짐없이 출전”할 것을 독려하였다.
그는 해방되던 해인 1945년에도 「특공대의 정신으로 성은에 보답합시다」(『방송지우』 1945년 1월호)를 통해 “대동아의 전쟁은 하늘을 대신하여 불의를 치는 싸움”이라며 “조선 동포도 대동아 민중으로서 세기의 거룩한 사업에 참가하여 일본 국민으로서 그 추진력의 일부를 만들고 있”다며 특공대 정신을 거론하기까지 하였다.
육당 최남선이 조선 문화의 일본화야말로 ‘조선 문화의 당면 과제’라고 사자후를 뿜어댔지만, 일본은 전쟁에서 패배하였고, 결코 오지 못할 것 같던 해방이 왔다. 그는 우이동에 은거하면서 외부 출입을 삼가고 역사 논문 집필에 전념하였다.
참회의 ‘자열서’에서조차 무죄 주장
최남선은 ‘민족개량주의로 흘러가 친일파로 변절하였다’는 것 때문에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 비난을 받았다. 그가 반민족행위자 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 수감된 것은 1949년 2월이었다. 수감 중 그는 자신은 “민족을 위해서, 연구 성과를 지키기 위해서 협력하였다”고 항변하였으며, 특별재판부에 참회의 뜻을 담은 ‘자열서(自列書)’*를 제출하였다.
* 예전에 자기가 저지른 죄과를 스스로 인정하고 그 사실을 적어 임금에게 내던 것을 ‘자열소(自列疏)’라 고 하였는데, 그러한 성격의 글이라는 뜻으로 쓴 듯함.
최남선은 자열서에서 자신의 죄과를 첫째, 조선총독부의 한국사 왜곡 기관인 조선사편수회 편수위원이 된 사실(1928년), 둘째, 조선총독부의 중추원 참의가 된 사실(1938년), 셋째, 만주 괴뢰국의 건국대학 교수가 된 사실(1939년), 넷째, 일제 말기에 학병 권유 연사로 활동한 사실(1943년), 다섯째, 악명 높은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부르짖은 사실 등으로 시인하였다. 그러나 그의 참회는 거기까지였다. 자신이 제시한 다섯 가지 죄과 조목에 대한 최남선의 다음 진술은 곧 무죄의 주장이기 때문이다.
나는 분명히 일평생 일조로(一條路)를 일심으로 매진한 것을 자신하는 자이다. ……다만 조선사 편수위원, 중추원 참의, 건국대학 교수, 이것저것 구중중한 옷을 연방 갈아입으면서도 나의 일한 실제는 언제고 시종일관하게 민족정신의 검토, 조국 역사의 건설, 그것밖에 벗어진 일 없었음은 천일(天日)이 저기 있는 아래 감연히 명언하기를 꺼리지 않겠다.
- 최남선, 「자열서」 중에서
석 달 후인 5월에 최남선은 병보석으로 출감하였다. 이승만이 친일파 청산을 방해하면서 지지부진하던 반민특위는 6월 6일에 친일 경찰들이 특위의 특별경찰대를 강제 해산하면서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결국 재판에 회부된 친일파들은 사실상 아무도 처벌되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최남선은 해군 전사 편찬위원회에서 일하였다. 휴전 후 서울시사 편찬위원회 고문에 위촉되었고, 신문과 잡지에 한국의 역사·문화와 관련된 기고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는 『한국역사대사전』을 편찬하던 중 1957년 10월 10일 병사하였다.
결과적으로 그는 자신의 죄과를 고백하는 척하면서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고자 하였다. 2011년에 그의 장손이 조부의 친일론을 반박한 책 『나의 할아버지 육당 최남선』을 펴냈다. 조전손전(祖傳孫傳)인가, 그는 책에서 조부의 행적이 ‘조선의 세계화 작업’이었다고 강조한다. 조선사편수회 위원과 중추원 참의 등 친일로 인식되는 부분은 ‘근대 세계주의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불거진 오해’라는 것이다.
역사는 비록 굴절되거나 왜곡될 수는 있지만, 국권피탈기에 육당 최남선이 민족을 등지고 식민 통치에 협조한 사실은 그 자체로 부정할 수 없다. 그게 일제의 겁박이든 자발적 부역이든, 숱한 상황 변수 가 그들의 행위를 웅변으로 변호한다고 해도 말이다.
슬픈 것은 최남선의 친일 부역이 아니라, 하고많은 부역자 가운데 자신의 과오를 진실로 인정하고 민족 앞에 엎드려 사죄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다. 해방 70년이 훌쩍 지나도 여전히 그것이 논란거리를 넘지 못하는 것 또한 씁쓸하고 슬프다.
2019. 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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