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모양처’가 아니라 당대의 시대적 모순을 비판적으로 그려낸 위대한 문인 허난설헌
신영복 선생의 ‘난설헌 생각’
고액 종이돈에 실릴 인물 선정과 관련된 논란이 어지러웠다. 신사임당이 고액권 지폐의 도안 인물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나는 엉뚱하게 동시대의 여성 허난설헌을 생각하고 있었다. “비극은 그 아픔을 정직한 진실로 이끌어 줍니다.”란 글에서 신영복 선생이 그랬던 것처럼.
애일당 옛터에서 마음에 고이는 것은 도리어 그의 누님인 허난설헌의 정한(情恨)이었습니다. 조선에서 태어난 것을 한하고 여자로 태어난 것을 한하던 그녀의 아픔이었습니다. 그러나 허난설헌의 무덤을 찾을 결심을 한 것은 오죽헌을 돌아 나오면서였습니다.
- “비극은 그 아픔을 정직한 진실로 이끌어 줍니다.”<나무야 나무야(1996)> 중에서
선생은 오죽헌을 나오며 율곡이 ‘이조 최대의 정치가이자 학자로서 겨레의 사표임에 틀림이 없고 그를 길러낸 사임당 역시 현모의 귀감임에는 틀림없’다고 전제한다. 그러나 ‘극화(極化)된 엘리트주의는 곧 반인간주의라고 할 수는 없’지만 오죽헌이 ‘봉건적 미덕의 정점을 확인케 하는 성역’이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봉건적 미덕의 정점에 있는 ‘위대한 어머니’ 신사임당의 반대편에 선 한 여인을 바라본다. 그이는 어린 남매는 물론, 뱃속 아이와 남편의 애정마저 잃고 요절한, 실패한 어머니, 실패한 아내이다. 그녀의 삶을 가로막은 것은 ‘봉건의 질곡’이었다.
……동시대의 불행한 여성에 대하여 키워온 그녀의 연민과 애정, 남편의 방탕과 학대 그리고 연이은 어린 남매의 죽음. 스물일곱의 짧은 삶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육중한 것이었습니다. 사임당의 고아한 화조도(花鳥圖)에서는 단 한 점도 발견할 수 없었던 봉건적 질곡의 흔적이 난설헌의 차가운 시비에는 곳곳에 점철되어 있었습니다.
- “비극은 그 아픔을 정직한 진실로 이끌어 줍니다.” 중에서
이 지적은 한 사람의 삶과는 무관했던 ‘봉건의 질곡’이 또 한 여인의 삶에는 짙고 어두운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보편적인 시대의 모순이 때로 선택적으로 사람들의 삶에 적용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거칠게 동시대인이라고 얘기했지만, 사실 사임당(1504∼1551)과 난설헌(1563∼1589)은 같은 시간대를 살았던 이들은 아니다. 사임당이 48세를 일기로 사랑하는 남편과 훌륭한 자식들을 남기고 숨지고 난 열두 해 뒤에 난설헌이 태어난 것이다. 뒷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그이가 감당해야 했던 질곡은 훨씬 더 가혹했다는 사실은 사임당의 삶이 그 시대적 모순을 비껴갔을 뿐이라는 사실을 반증한다.
사임당과 난설헌, 엇갈린 삶
단순히 집안을 따지자면 사임당의 집안은 난설헌의 가계에 미치지 못한다. 사임당의 부친 신명화는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은 선비였으나 난설헌의 경우, 부친 허엽은 출사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세 아들, 성, 봉, 균 등이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이름을 날린 명문가였던 것이다.
난설헌의 연보는 그녀의 고단했던 삶에 비기면 단출하기 그지없다. 사회적 활동이 불가능했던 중세 봉건사회에서의 여성의 삶이 남긴 자취야 일러 무삼하겠느냐만, 허균·허난설헌 선양사업회 누리집에 나와 있는 그이의 연보는 고작 다섯 항목에 불과하다.
출생-혼인-죽음 외에 여덟 살 때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을, 스물세 살 때 자기의 죽음을 예언하는 시 “몽유광상산(夢遊廣桑山)”을 지었다는 사실이 덧붙어 있을 뿐이다.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은 여덟 살짜리가 썼다고 믿어지지 않는 작품이지만 “몽유광상산”과 함께 그녀의 시적 재능을 증명하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으리라.
난설헌은 1563년, 명종 18년에 강릉 초당 생가에서 허엽의 3남 3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이름은 초희(楚姬), 조선 중기의 삼당시인으로 불리었던 손곡 이달에게 시를 배워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천부적 재능이 그녀의 삶에 그늘을 드리웠음일까. 이후 그녀의 삶은 고단하고 쓸쓸하기만 했다.
열다섯 살에 난설헌은 김성립과 혼인했으나 결혼 생활이 순탄치 못했다. 김성립은 재기발랄한 난설헌과는 어울리는 이가 아니었던 듯하다. 아홉 번이나 낙방한 끝에 난설헌이 사망한 해에야 겨우 문과에 급제했으니 허균이 그의 글에서 매부의 실력을 폄하할 정도였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김성립은 신혼 초부터 난설헌을 버리고 한강 서재에서 공부했다고 했으니 부부의 화락에는 문제가 많았던 셈이다. 게다가 어린 남매를 잃고 뱃속 아이마저 유산했으니 후사를 잇지 못하는 며느리를 바라보는 시어머니의 눈길도 곱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재능은 ‘현모양처’가 되지 못한 결함 앞에선 무력했다.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넘노니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와 어울렸구나
아리따운 연꽃[부용(芙蓉)] 스물일곱[삼구(三九)] 송이
붉게 떨어져 달밤 서리에 싸늘하네.
- 시 “몽유광상산(夢遊廣桑山)”
스물세 살 때 쓴 시에서 예견한 대로 어느 날, 그는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금년이 바로 3·9의 수(3×9=27, 27세를 뜻함)에 해당하니, 오늘 연꽃이 서리를 맞아 붉게 되었다”고 말하고 눈을 감았다 한다. 이때 그의 나이는 스물일곱 살.
난설헌은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지월리 경수산에 묻혔다. 발치에 먼저 보낸 오누이의 작은 무덤을 거느리고.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남편 김성립이 전사한 것은 삼 년 후다. 부부는 살아서 화락(和樂)을 이루지 못했듯, 죽어서도 곁을 나누지 못한 모양이다. 김성립의 무덤엔 둘째 부인 남양 홍씨가 함께 묻혀 있는 것이다.
삼국의 베스트셀러가 된 <난설헌집>
스물일곱의 생애가 남긴 자취는 희미하지만, 그녀의 시는 여러 곡절을 거쳐 남았다. 유고는 유언에 따라 전부 불태워졌다. 그러나 남동생 허균이 친정에 흩어져 있던 것들과 자신이 암기하고 있던 것들을 모아 1590년 “난설헌집” 초고를 만들었고 1607년 4월에는 이를 목판본으로 출판했다.
1606년 허균은 조선에 온 명의 사신 주지번(朱之蕃)을 만나 이 초고를 주었고 명나라로 돌아간 주지번은 2년 뒤에 이를 책으로 펴냈다. 이 책은 명나라에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켜 이른바 ‘낙양의 지가’를 올렸다. 1692년에는 역수입된 이 시집이 정식 출판되었고, 1711년에는 일본에서도 출판되었으니, 난설헌의 시집은 말하자면 동양 삼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셈이다.
최근에는 청 만력 40년(1612)에 중국에서 간행한 시집 “취사원창(聚沙元倡)”이 새롭게 발굴되었다. 이 책은 난설헌의 시 작품 168편을 모은 것인데, 이는 난설헌 시가 가진 나라와 시대를 넘는 보편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모국에서 그녀와 그녀의 시는 낯설기만 하다. 고등학교 교과서를 통해 소개된 난설헌의 시는 ‘남편에 대한 원망’을 다룬 “규원가(閨怨歌)” 정도이다. 그러다 보니 그녀의 시 세계를 종종 ‘기다림과 한’으로 한정하는 잘못을 저지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그녀의 시 세계의 일부에 불과할 뿐이다.
난설헌은 ‘충효’와 같은 유교적 윤리를 노래하지 않았다. 그녀는 타고난 재능을 제대로 펴지 못한 억압의 삶 가운데서 ‘선계’와 같은 상상의 세계를 그리며 현실을 초탈하고자 했고, 여성의 삶과 고뇌를 보편적 관점에서 노래했다. 또 그녀는 당대의 시대적 모순을 비판적으로 그려 뛰어난 현실인식을 보여주기도 했다.
어린 남매를 잃은 어머니로서 진솔한 모성애를 드러내고 있는 <곡자(哭子)>와 그 자신, 가난하게 자란 적이 없으면서도 가난한 여인의 고통스러운 삶을 통하여 불평등한 현실을 비판한 <빈녀음(貧女吟)>은 그의 대표작이다.
사랑하는 딸을 지난해 보내고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네.
슬프고 슬픈 강릉의 땅이여
두 무덤 마주 보고 나란히 서 있구나.
백양나무 가지에 소소히 바람 불고
도깨비 불빛은 숲속에서 반짝이는데
지전을 뿌려서 너희 혼을 부르며
너희들 무덤에 술잔을 붓노라.
- <곡자(哭子)> 중에서
얼굴 맵시야 어찌 남에게 떨어지리오.
바느질 길쌈 솜씨 좋은데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난 탓에
중매쟁이는 나를 몰라주누나.
손으로 가위를 잡느라고
밤은 추운데 열 손가락 곱아 온다.
남을 위해 시집갈 옷 짜고 있지만
해마다 나는 홀로 잠을 잔다오.
- <빈녀음(貧女吟)> 1· 4
난설헌은 ‘세 가지의 한’을 늘 입에 올렸는데, 그것은 각각 ‘여자로 태어난 것’, ‘조선에서 태어난 것’, 그리고 ‘김성립의 아내가 된 것’이라 한다. 남편으로부터 외면당했던 이 중세의 여인은 더 큰 세계에 대한 지향으로 그것을 극복해야 했던 것일까.
뛰어난 시인이었으나 실패한 ‘여성’으로만 기억되는
보수적인 조선 사회는 시인 허난설헌에 대해 고운 눈길을 보내지 않았다. 여성이 한문을 배워서 시를 쓴다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었던 사회였고 난설헌은 반역도 허균의 누이였다. 난설헌의 시가 멀리 중국에까지 알려지고 널리 읽혔던 것도 남성 문인들에겐 못마땅한 일일 수도 있었으리라.
그녀의 시문이 널리 알려지면서 명성에 따라 비판도 높았다. 비판의 요지는 대체로 그의 작품이 중국의 유명 작품을 그대로 베껴 썼거나 허균의 위작이라는 점 등이다. 그러나 그의 시가 중국 시의 표절이라면 그의 문집이 중국에서 간행될 때 사실이 드러났을 것이라는 점에서 그 주장의 신빙성은 떨어져 보인다.
그러나 당대의 가장 뛰어난 여성 시인으로서 난설헌은 기억되지 못한다. 그녀는 마치 실패한 어머니와 아내의 자리를 시작으로 극복하려 한 여인쯤으로 폄하되는 듯하다. 사람들은 난설헌 대신에 정승 아들을 두었던 행복했던 어머니, 사랑스러운 아내 신사임당을 기억하는 것이다. 일찍이 쇠귀 선생은 이 성공한 삶에만 쏟아지는 갈채를 예견하였던 것일까.
시대의 모순을 비켜간 사람들이 화려하게 각광받고 있는 우리의 현재에 대한 당신의 실망을 기억합니다. 사임당과 율곡에 열중하는 오늘의 모정에 대한 당신의 절망을 기억합니다.
- “비극은 그 아픔을 정직한 진실로 이끌어 줍니다.” 중에서
한국은행은 지폐 도안 인물로 신사임당을 선정한 이유로 ‘양성 평등의식 제고’, ‘여성의 사회참여 기여’, ‘문화 중시의 시대정신 반영’과 ‘교육과 가정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효과’ 등을 들었다. 그러나 이런 선정 이유가 여성계를 설득하지는 못한 모양이다.
현모양처 이미지 사임당, 지폐 도안 인물로
여성계의 반발은 신사임당이 ‘가부장 시대의 현모양처 이미지’라는 데 있고 이 점은 다툼의 여지가 별로 없는 듯하다. 박정희 정권이 강릉 오죽헌 정화사업은 시행한 것은 1976년이다. 이미 이순신(현충사. 1969), 세종대왕(기념관, 1970), 퇴계 이황(도산서원, 1970) 등의 주요한 역사적 위인과 관련된 사업에 이은 오죽헌 정화의 목적은 다른 데 있지 않았다.
박정희는 봉건 군주로는 세종 임금을, 무인으로는 충무공 이순신을, 학자로는 퇴계 이황을 국민의 사표로 제시함으로써 근대화 사업에 정신적 영역을 추가하려고 했던 듯하다. 신사임당이 율곡을 낳은 오죽헌을 정화한 것은 이들 모자를 기리는 일이었으니 양수겸장이었을 수 있겠다.
신사임당을 위대한 정승 율곡 이이의 어머니와 착한 아내의 지위를 떠나서 독립적 자아로 인식하는 일은 쉽지 않다. 사임당을 전통적인 가치관을 구현하는 모범 여성으로 보는 것은 편견이라는 일부의 주장이 부당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녀가 기본적으로 예술가였고, 그의 시편들이 전하는 것은 정통적인 유교 가치관에서 빗겨나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남편에게 “내가 죽은 뒤 다시 장가들지 마시오.”라고 요구한 신사임당이 ‘조선의 남성중심주의를 해박하고 탁월한 논법으로 부정’한 것도 사실일 수 있다. 그러나 사임당을 기리는 일은 결코 그러한 사임당의 독립적 자아에 대한 상찬이 아니다. 사임당에 대한 찬양은 그녀가 이룩한 ‘현모양처’라는 성채를 넘지 못하는 것이다.
여성단체들이 연대해 여성계가 추천한 여성 초상 인물로 유관순을 지지했는데도 불구하고 신사임당이 뽑힌 이유는 역으로 유관순이 탈락한 까닭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유관순 열사가 열여덟의 처녀가 아니라 한 가정을 이룬 어머니였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적어도 어머니가 아닌 여성이 미완의 존재로 인식되는 것은 이 땅에선 여전히 관습인 것이다.
유관순 열사, 어머니가 못 된 미완의 존재
마찬가지로 예술적 성취가 잣대였다면 난설헌이 이룬 눈부신 시적 성취를 비켜갈 수는 없다. 그러나 난설헌은 한 번도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그녀의 삶에 드리운, 실패한 어머니와 아내의 그림자는 너무 짙고 어두웠던 것일까. 여전히 전근대의 패러다임을 쉬 벗지 못하는 이 땅의 포스트 모던은 예술가가 아니라 어머니 난설헌의 벽을 결코 넘을 수 없었던 것이다.
쇠귀 선생은 지월리의 난설헌 무덤을 떠나면서 ‘비극은 그 아픔을 정직한 진실로 이끌어 준다’고 말한다. 이 중세 봉건사회의 질곡과 맞섰던 위대한 여성 시인이 온몸으로 지키고 견뎌야 했던 비극과 그 아픔이 이끌어 주는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정승 아들을 옆에 거두지도 못하고, 남편과 함께 묻히지도 못한 채 자욱한 아침 안개 속에 앉아 있습니다. 열락(悅樂)은 그 기쁨을 타버린 재로 남기고 비극은 그 아픔을 정직한 진실로 이끌어 준다던 당신의 약속을 당신은 이곳 지월리에서 지켜야 합니다.
- “비극은 그 아픔을 정직한 진실로 이끌어 줍니다.” 중에서
2007. 11. 2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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