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국어원 펴냄 <이런 말에 그런 뜻이?- 차별과 편견을 낳는 말들>
말 속에 ‘차별’이 담겨 있음은 두루 아는 일이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나는 늘 그런 것을 의식하고 사는 편이다. 생각 없이 흘린 말도 뒤에 되짚어보면 그게 어떤 ‘차별’로 이어지지 않나 싶어 기분이 찜찜할 때도 많다. 글을 쓰는 것은 그나마 성찰할 여유가 있어 낫지만, 말은 주워담을 수 없는 것이니 더욱 그렇다.
‘불가능한 일을 억지로 하려고 힘쓰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앉은뱅이 용 쓴다.’라는 속담이 있다. 이 속담은 우리 국어사전에서는 잘 검색되지 않는다. 일본 속담에 ‘멸치의 이 갈기’와 함께 ‘앉은뱅이 용쓰기’가 있는데 이로 미루어보면 이 속담은 일본에서 들어온 말일 수도 있겠다.
부모님 세대로부터 이 말을 들으며 자란 나는 저도 몰래 그 속담을 인용하는 경우가 꽤 있다. 원뜻보다는 ‘어떤 문제에 대해 안타까워하지만, 막상 마땅히 그걸 푸는 방법이 막힌 상황’을 이르는 말로 아주 알맞은 비유인 듯해서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이 속담을 거리낌 없이 써도 괜찮은가를 가끔 자문해 보곤 한다.
‘장애’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면서 우리는 장애를 직접 가리키는 어휘는 꺼리게 되었다. 장애에 대한 비하와 차별을 담고 있는 이런 표현을 가려서 쓸 만큼 우리 사회도 성숙해진 셈이다. ‘맹인’이나, ‘소경’, ‘장님’ 따위의 차별적 용어를 ‘시각장애인’으로 ‘벙어리, 귀머거리’를 ‘청각장애인’으로 쓰는 것은 어느 정도 정착한 듯 보인다.
그런데 위에 든 예처럼 장애를 가리키는 낱말이 든 속담의 경우는 그런 판단이 쉽지 않다. 비록 장애를 직접 가리키는 낱말이 쓰이기는 했지만 이를 버리는 것은 우리말 표현의 주요한 수단 하나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는 의견이 만만찮은 까닭이다.
속담과 수수께끼 같은 구비문학은 민중들의 삶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매우 귀중한 문화유산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그것들은 지배층이나 식자들에 기대지 않고 민중들의 날것 그대로의 언어생활이 남긴 자산인 것이다. 따라서 현실적 의미와 무관하게 이 표현들에 일정한 지위를 인정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는 모양이다.
이에 대해 국립국어원(원장 권재일)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 표현 가운데 뜻하지 않게 누군가를 차별하거나 상처를 줄 수 있는 말들과 그에 대한 대안 표현을 간추려’ 엮은 <이런 말에 그런 뜻이?>라는 제목의 홍보 책자를 통해서다.
장애인 등 약자에 대한 차별은 그만
국어원은 이런 표현들이 ‘일종의 언어전통’이고, ‘다수가 공감하는 그럴듯한 표현’이라고 해서 장애가 있는 ‘소수자, 약자’들을 차별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한다. ‘굳이 장애와 관련된 비유 표현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사실을 전달하는 방법은 많’다고 하면서. 전적으로 동감한다. 인간에 대한 존중과 배려보다 더 소중한 가치는 없는 법이니 말이다.
이 책자에서는 장애를 빗댄 표현을 다음과 같이 대체할 것을 제안한다.
국세청이‘벙어리 냉가슴’을 앓고 있다.
→ 국세청이 말 못할 고민에 빠졌다.
위기 대응 과정은 ‘장님 코끼리 만지기’식이어서
→ 위기 대응 과정은 주먹구구식이어서
‘절름발이 내각’으로 정권을 시작할 수밖에 없는
→ 엉성한 내각으로 정권을 시작할 수밖에 없는
역시 전문가들이라 다르다. 나는 ‘앉은뱅이 용 쓰듯’을 대체할 표현을 생각해 보았지만 마땅한 표현을 찾지 못했다. 이 책은 지난 4년간 국립국어원이 진행해 온‘사회적 의사소통 연구’사업의 결과를 쉽게 풀어쓴 것으로, 한국어문교열기자협회(현 ‘한국어문기자협회’)와 함께 만들었다고 한다.
이 책은 우리가 무심코 쓰는 말이 때에 따라 상대를 차별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음을 지적하고 가능하면 다른 말을 찾아 쓰도록 제안하고 있다. 뜻밖에 우리가 쓰는 말 중에는 차별적 의미가 깃든 어휘들이 적지 않다.
대표적인 예로 ‘조선족’과 ‘미망인’ 같은 말을 들 수 있다. 조선족 중국의 여러 소수민족 중에 우리 겨레를 구분하기 위해 쓰는 말인데 우리가 이들을 그렇게 부르는 건 적절하지 않다. 이 말은 마치 우리와는 다른 민족을 지칭하는 말처럼 느껴져 듣는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족’ 대신 ‘재중동포’ 또는 ‘중국 동포’로 쓰는 게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미망인(未亡人)’은 우리 사회에 아직도 온존해 있는 남성 중심적 시각을 드러내는 어휘다. ‘남편이 죽고 홀로 남은 여자’를 높여 가리킬 때 쓰는 말이지만 이 말은 본래 ‘남편과 사별한 여자가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 이르던 일인칭 대명사’였다.
‘조선족’은 ‘재중동포’로, ‘미망인’은 ‘고 000씨 부인’으로
‘미망인’은 글자 그대로 ‘미처 따라 죽지 못한 사람’을 나타낸다. ‘여성은 남성에게 종속된 존재로 남편이 죽으면 따라 죽는 게 당연하다’는 전근대적 가치관이 숨어 있는 어휘다. 그러니 이 말을 남에게 쓸 때는 실례가 될 수 있으므로 ‘고(故) 아무개 씨의 부인’으로 고쳐 부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말이 낳는 차별로 직업 자체를 비하하는 ‘잡상인’이 있다. ‘상인’이란 말과 달리 ‘잡(雜)’이라는 말에 비하적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의사의 일을 ‘인술(仁術)’로 표현하거나 교사를 ‘스승’이라 하고 간호사를 ‘백의의 천사’라고 부르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경우다.
봉급쟁이, 점쟁이, 환쟁이도 각각 봉급생활자, 역술가, 미술가를 낮추어 부르는 말이어서 본인이 자신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제삼자가 쓰면 실례가 되는 말이다. 군인을 ‘군바리’로, 건설노동자를 ‘막일꾼’, ‘노가다’로, 연예인을 ‘딴따라’로 쓰는 것도 특정 직업을 비하하는 말이다.
우리말은 예사말과 높임말이 엄격히 구분되는데 이는 배려와 존중의 표현이 담겨 있다. 그러나 높임 표현 속에는 때로 권위주의적 신분질서 의식도 남아 있어 수평 관계를 기본으로 하는 현대사회에 걸맞지 않다. 이는 언론에서 자주 쓰는 말로 ‘회동’, ‘만찬’, ‘베풀었다’, ‘금일봉’, ‘하사’, ‘치하’, ‘영접’ 등의 표현에서 두드러진다.
‘처녀-’는 그만 쓰자
양성평등에 어긋난 표현도 넘친다. ‘복부인’이나 ‘얼굴마담’ 등 부정적 의미로 쓰이는 낱말이 그것이다. 부동산 투기를 하는 사람이나 실권 없는 대리인을 뜻하는 부정적 표현에 여성성을 부여한 경우다. ‘아줌마 부대’ 같은 낱말도 비슷하다. ‘얼굴마담’은 남녀에 고루 적용되는 ‘명의 사장’, ‘대리 사장’ 등의 중성적 표현으로 바꿔 쓰는 게 바람직하다.
여성의 순결을 강조하는 전통적 사고에서 온 표현으로 ‘처음’을 뜻하는 데 ‘처녀’를 붙이는 언어 관습도 문제다. ‘처녀작, 처녀림, 처녀생식, 처녀봉, 처녀항해’ 등이 그것이다. 구미에서 ‘미스(Miss)’와‘미시즈(Mrs.)’를 사용하지 않는다든가, ‘스포츠맨(sportsman)’ 대신 ‘스포츠퍼슨(sportsperson)’이나 ‘애슬리트(athlete)’로, ‘스튜어디스(stewardess)’도 ‘플라이트 어텐던트(flight attendant)’로, ‘폴리스맨(policeman)’은 ‘폴리스 오피서(police offier)’로, 소방관을 뜻하는 ‘파이어맨(fireman)’은 ‘파이어 파이터(fire fighter)’로 의식적으로 바꿔 쓰듯 말에 깃든 성차별을 넘어서야 한다.
책에서는 또 직업 등에 흔히 붙이는 ‘여-’, ‘여류’, ‘여성’이란 말도 주목한다. 여기에도 ‘진면목을 보지 않고 능력을 한정하는 차별적인 시선과 함께 ‘여성이란 이름으로’ 불필요한 주목을 감내하라는 무언의 압력이 숨어 있는‘ 것으로 풀이하는 것이다.
이 밖에도 ‘상경(上京)’이나 ‘서울 올라간다’ 따위에 나타난 서울 중심주의적인 시각도 지적한다. 이러한 표현에 숨은 것은 ‘서울’만 ‘처음이고 끝인 의식’을 심어 나머지 지역에는 소외, 좌절, 열등감을 준다는 것이다. ‘지방’이라는 말 속에는 이미 '서울에 비해 열등하다'는 부정적인 의식이 담겨 있기 마련이다. 이 책에서는 ‘올라가는 서울’이 아니라 ‘가는 서울’을 주창한다.
‘올라가는 서울’ 말고 ‘가는 서울’로
다문화 사회로 이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살색’이나 ‘혼혈’, ‘하프 코리안’ 따위의 낱말도 그 자체로 차별적이다. 2007년 8월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는 한국이 다민족 사회임을 인정하고 ‘단일민족’이라는 이미지를 극복할 것을 권고한 바 있다.
방송이나 인터넷에는 ‘얼짱’, ‘에스라인’, ‘쭉쭉빵빵’, ‘꿀벅지, 껌가슴’ 등 듣기 민망한 말이 범람하고 있다. 이 역시 외모를 상품 가치로 인식하고 인성보다는 외모로써 사람을 판단하는 외모 중심주의를 보여주는 사례로 ‘여성성을 드러내는 선정적 용어는 자제’가 필요하다.
부정적인 뜻이 담긴 ‘노인’보다는 경륜에 대한 존중이 담긴 ‘어르신’이 좋다. 일부 낱말 속에 숨어 있는 ‘‘우리 것은 헌것, 서양 것은 새것’이라는 의식도 넘어야 한다. 고전음악을 뜻하는 ‘클래식’은 동양에도 서양에도 있을 수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클래식’은 ‘서양의 고전음악’으로만 통하니 이 역시 편견을 낳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상황에 따라 ‘서양 고전음악’, ‘동양 고전음악’으로 표현할 수도 있겠다.
끝으로 이 책자는 사회 각 분야에서 횡행하는 ‘험악한 말’을 지적한다. ‘세금 폭탄’, ‘야합, 흥정, 술책, 농단, 어릿광대 놀음’, ‘가격 파괴, 슈퍼 추경, 슈퍼 쪽박, 국가 파산 위기, 시장 침략’ 등의 자극적인 표현은 더 자극적인 표현을 낳을 수밖에 없다. 부드러운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여유로운 사회를 만들어나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의 수단만이 아니다. 언어는 힘이 세서 우리의 의식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기도 한다. 또 언어에 나타난 사회현상에는 구성원들의 사고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생각이 말을 바꾸기도 하지만, 말이 생각을 바꾸어낼 수 있다. 국립국어원이 펴낸 이 책은 그런 뜻에서 우리들의 언어생활을 성찰하게 해 주는 셈이다.
무심코 쓰는 말 속에 담긴 차별과 편견, 불평등을 넘어 아름다운 언어를 통해서도 아름답고 여유로운 사회를 열어갈 수 있다. 그것은 오늘날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는 모든 한국인에게 주어진 과제이기도 한 것이다.
2010. 1. 2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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