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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록빛’을 아십니까, 우리말 같은 한자어들

by 낮달2018 2019. 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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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우리말 아니라 ‘한자어’라고?

▲ 4월의 신록이 보여주는 빛깔을 신영복 선생이 표현한 '눈록빛'이라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이게 한자였어? 우리말 같은 한자어들

 

눈록이란 낱말을 처음 만난 것은 신영복 선생의 서간집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였다. 감옥 안에서 새싹을 틔운 마늘, 거기 담긴 봄을 감동적으로 전하는 글이었다.

 

눈록빛 새싹을 입에 물고 있는 작은 마늘 한 쪽, 거기에 담긴 봄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봄이 아직 담을 못 넘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르는 새 벌써 우리들의 곁에서 새로운 생명을 키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눈록빛! 눈과 귀에 선 낱말이었지만 나는 앞뒤 맥락으로 그게 무슨 뜻인지를 넉넉히 새길 수 있었다. 어릴 적 마늘 한 쪽을 물 담은 병 주둥이에 꽂아 두면 틔우던 새싹. 그 연둣빛을 선생은 눈록빛이라고 표현한 것이었다. 나는 이렇게 멋진 우리말이 있었다는 사실에 적잖이 감동했다.

 

그러나 뒤에 국어사전을 펼쳐보고서야 눈록이 고유어가 아니라 한자어라는 걸 알고 나는 머리를 갸우뚱했었다. 내 얕은 한자 감각은 이라는 한자가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리다, 예쁘다는 뜻의 한자였다.

 

역사적으로 오랜 기간 한자로 문자 생활을 해 왔기 때문에 우리말 가운데 한자어의 비중은 꽤 높은 편이다. 국립국어원에서 펴낸 <표준국어대사전>에 실린 51만여 개의 낱말 가운데 한자어는 57%이다. 거기서도 실제 언어생활에서 전혀 쓰이지 않는 한자어를 빼면 그 비중은 더 내려간다.

담배, , 가방, 냄비, 구두, , 부처…….’와 같은 낱말은 외래어지만 오랜 세월을 지나며 자연스럽게 우리말에 동화된 말로 이를 귀화어(歸化語)’라고 한다. ‘담배, , 고무는 서구어에서, ‘냄비, 구두는 일본어에서, ‘같은 말은 중국어에서 온 귀화어다.

 

부사 무려도 한자어다!

특히 한자어에서 변형되어 우리말로 쓰이는 한자어계 귀화어의 수효도 적잖다. ‘김치, 배추, 가게, , 모란, 짐승, 사냥, 썰매등이 그것인데 이는 원래는 한자어였으나 지금은 한자어라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게끔 형태가 바뀌었다.

 

한자어 가운데는 우리가 일상에서 무심히 쓰면서도 한자어라는 사실조차도 의식하지 못하게 된 낱말도 많다. 위에 든 눈록은 개인적으로 한자어인 줄 몰랐던 사례지만, ‘고유어 같은 한자어도 적지 않다. 다음 예문의 밑줄 그은 말은 고유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한자어다.

 

· 너는 저번에 어디 간 게냐?

· 저간의 사정을 아는 사람은 안다.

· 그는 여차여차한 이유로 학교에 늦었다.

· 하필이면 약속을 오늘로 잡았냐?

· 그 영화에 무려 백만의 관객이 들었다.

 

저번(這番), 저간(這間). 여차(如此), 하필(何必), 무려(無慮)뿐 아니라 심지어(甚至於), 물론(勿論), 미음(米飮), 대강(大綱), 별안간(瞥眼間), 졸지(猝地), 총각(總角), 도대체(都大體), 대관절(大關節), 어차피(於此彼같은 말도 마찬가지다실제로는 한자어지만 이를 한자어로 인식하는 사람은 드문 것이다.

그런데 이들 말을 한자로 표기하거나 한자를 괄호에 함께 적는다고 생각하면 좀 거시기하다. 뜻글자인 한자로 된 단어지만 그 뜻을 새기지 않아도 문맥만으로도 그 뜻을 넉넉하게 새길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일상에서 거의 쓰이지 않는 한자어를 일부러 쓸 일이 없듯이 이렇게 우리말로 녹아든 한자어를 배제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생각生覺으로 써선 곤란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아직도 푸른 하늘이라는 뜻의, 일상에서 거의 사용하지 않는 한자어가 13개나 실려 있다고 한다. 궁창(穹蒼), 벽공(碧空), 벽락(碧落), 벽소(碧霄), 벽우(碧宇), 벽천(碧天), 벽허(碧虛), 제천(霽天), 창궁(蒼穹), 창호(蒼昊), 청궁(靑穹), 청명(靑冥), 청허(晴虛)가 그것인데, 이 가운데 그나마 눈에 익은말은 벽공뿐이다.

 

한자어를 무분별하게 사용하지 말자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 대목은 이런 데에 있다. 우리말로 쉽게 써도 될 자리에 굳이 어려운 한자어를 쓸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일상생활에서 이런 예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한편 고유어인데도 한자어로 잘못 아는 말도 꽤 있다. ‘생각生覺으로 쓰고 미련하다미련昧練’, ‘未練으로, ‘선사하다라는 토박이말도 膳謝하다로 잘못 쓰는 경우다. ‘구경하다도 토박이말인데 어떤 사전에는 이를 구경(求景)’이라고 올리고 있다고 한다.

 

한자어가 우리말 어휘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 것은 고유어와 경쟁하면서 세력이 확대된 우리말의 역사적 전개 과정 때문이다. 따라서 한자어를 우리말 어휘의 일부로 받아들이되, 무리하게 그것을 배제하거나 불필요하게 쓰임새를 늘릴 일은 없지 않겠는가.

 

 

2017. 7. 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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