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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역사 공부 「오늘」

[오늘] 70년 전 우리가 치른 전쟁이 가르쳐 준 것들

by 낮달2018 2024.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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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공부 오늘’] 1950년 6월 25북한군 남침으로 6.25전쟁 발발

▲ 개전 사흘 만에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했다. 서울 거리를 누비는 북한군 전차. ⓒ NARA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 북한의 조선인민군이 소련에서 지원한 최신형 전차 T-34/85를 앞세우고 북위 38도선 전역에 걸쳐 기습 남침함으로써 ‘6.25전쟁’이 시작됐다. 그것은 일제의 식민지배에서 해방돼 맞닥뜨린 혼란의 해방공간을 일거에 무력화하면서 한반도가 이전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이데올로기 대립’의 현장이 되리라는 끔찍한 예고였다.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전쟁 앞에 허둥대기는 정부도 국민과 다르지 않았다. 개전 사흘 만에 대통령과 정부 수뇌부는 시민들에게 서울 사수를 공언해 놓고도 한강 다리를 끊고 남몰래 피난길에 올랐고 140만 명의 서울 시민은 ‘인공 치하’의 수도에 남겨졌다.

 

해방과 함께 온 ‘분단’ 그리고 전쟁

 

1945년, 일본이 항복하면서 한반도의 남북은 38선을 경계로 미소 양국의 군대가 분할, 점령했다. 유엔 임시 한국위원단의 감시 아래 남북한 총선거를 시행하기로 했으나 불발되면서 1948년 5월, 남한만의 총선거가 치러졌다. 8월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돼 같은 해 12월의 유엔총회에서는 한국을 합법 정부로 승인했다.

 

9월에는 북에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함에 따라 한반도에서 남북한이 각각 별개의 정권을 수립함으로써 분단은 공식화됐다. 이에 잠정적인 ‘군사분계선’이었던 38선은 졸지에 ‘국경선’이 돼버렸다. 북한이 미소 양군의 철수를 요구하고 소련이 병력을 철수하자, 미국도 1949년 6월에 약 500명에 이르는 군사고문단만을 남긴 채 남한에서 철군했다. [관련 글 : 북한, 남한 이어 단독 정권 수립]

 

분단 과정에서 북한은 소련의 지원으로 군사력을 증강해 1948년 10월에 소련군이 철수할 때까지 이미 완전무장한 4개 보병사단과 소련제 T-34 중형전차를 갖춘 기갑대대를 편성하고 있었다. 이듬해 소련과 조소군사비밀협정을, 중국과는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북한은 중국 공산군에 편제돼 있던 조선군 2만5000명을 인민군에 편입했다. 그로써 북한은 10개 사단 13만 명을 38선에 배치했고, 10만 명의 예비군까지 후방에 뒀다.

 

한편 1949년 주한 미군이 철수(6.30.)하고, 중국이 장제스의 국민당에 승리해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10.1.)하였다. 같은 해 소련을 방문해 ‘남한 침공 계획’에 대한 스탈린의 승인을 얻은 김일성의 ‘무력통일’ 구상에 미국의 극동방어선에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한 이른바 ‘애치슨’ 미 국무장관 성명(1950) 등 국제 정세는 매우 우호적이었다. 김일성은 남한이 정치·경제적으로 혼란 상태인 데다 국군의 병력과 장비가 열세라는 점에도 고무됐다.

 

남한도 정부 수립 이후 미 군정 산하 국방경비대와 해안경비대를 국군으로 개편하는 등 약 10만에 이르는 병력을 확보했다. 이승만 정권은 국내 정치의 실패를 호도하고자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를 구호로 하는 ‘북진통일론’을 부르짖고 있었지만, 군사력의 열세는 북한과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결국, 개전 3일 만에 서울이 북한군의 수중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러한 군사력의 불균형 탓이었다. 유엔이 안보리를 소집해 전투행위 중지와 철군을 요청하는 결의안을 채택했지만,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남하를 거듭했다.

 

6월 27일, 트루먼(Harry S. Truman)은 미국의 한국군 지원을 명령했고 6월 30일에는 지상군 투입을 결정했다. 7월 7일에는 안보리에서 유엔군 파견을 결정하고, 미국의 맥아더(Douglas MacArthur) 원수를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맥아더는 한반도의 군사지휘권을 갖고 한국에 파견된 16개국 군대를 지휘하게 됐다. 7월 14일에는 이승만이 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유엔군 총사령관에게 이양했다. [관련 글 : 한국전쟁 때 이양한 평시 작전통제권’ 44년 만에 회수]

 

강력한 군사력을 갖춘 데다 치밀하게 계획된 기습 남침으로 북한군은 연승하며 남진을 거듭했다.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제24보병사단이 즉시 한국으로 급파, 소속 제21연대 제1대대(스미스 부대)가 경기도 오산 북쪽 죽미령에서 북한군과 처음으로 맞붙었으나 참패하고 후퇴해야 했다.

 

북한군은 1950년 8월과 9월 사이에 경주·영천·대구·창녕·마산을 연결하는 경상남북도 일부만을 남긴 전체 국토를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240km의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반격에 들어간 국군과 유엔군이 간신히 작전의 주도권을 되찾으면서 9월 15일 전격적으로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다. 동시에 낙동강 전선에서의 총반격작전도 단행됐다.

 

남북이 한 번씩 상대를 제압한 전쟁이었지만

▲ 서울 수복 후 중앙청 국기 게양대에 유엔기가 펄럭이고 있다. (1950. 9.27.) ⓒ NARA

미 제1해병사단과 제7사단으로 이뤄진 제10군단과 5천 명에 이르는 한국해병대는 9월 15일 새벽에 인천 월미도에 기습 상륙하고, 다음 날에는 인천을 함락했다. 상륙작전을 펼치기에는 부적합한 지역이라는 중론을 뒤엎고 작전은 성공을 거둔 것이었다.

 

인천상륙작전에 뒤이어 미 제8군도 총반격작전을 개시하여 약 1주일간의 치열한 전투를 치른 끝에 9월 22일~23일에는 북한군의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에 북한군은 9월 23일 이후 모든 전선에서 후퇴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전세는 완전히 반전됐다.

 

전세를 뒤집은 한국 정부는 숙원인 통일을 위한 북진을 거듭 주장했다. 그러나 중국의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유엔 사무총장에 보낸 전보에서 ‘유엔군의 38선 돌파를 방관할 수 없는 사태’라고 밝히면서 문제는 간단하지 않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한국군이 이미 10월 1일에 38선을 넘어 북상하고 있었는데도 유엔에서 유엔군 북진에 대한 찬반양론이 펼쳐진 것은 이 때문이었다.

 

1950년 10월 7일 유엔총회의 결의에 따라 유엔군의 38선 이북 진격이 허락되면서 북진도 본격적으로 이어졌다. 유엔군이 공식 북진하면서 북한영토를 점령하는 상황에 고무된 이승만 대통령은 이른바 북한의 ‘해방지구’를 한국의 통치 아래 둘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유엔은 이를 거부하고 통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총선거가 행해질 때까지 유엔군 사령관의 통치 아래 둘 것을 결의했다.

 

한편, 중국군의 개입 가능성을 우려한 미국은 맥아더에게 북한과 중국에 전력을 공급하고 있는 수풍수력발전소나 함경북도의 공업 도시 나진 폭격을 불허하는 등 중국을 자극하지 않으려 했지만, 중국의 개입은 시나브로 기정사실이 돼가고 있었다.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은 순조롭게 이뤄져 동부의 국군 제1군단은 원산(10.10.)과 함흥(10.17.)을 점령했으며, 서부의 미 제1군단은 평양(10.19.)을 탈환했다. 10월 23일, 청천강까지 도달한 국군과 유엔군은 다음날, 한·만 국경선을 향한 총공격작전을 개시했다.

 

10월 25일, 박천-운산-온정리-희천을 잇는 선까지 진출한 국군과 유엔군은 정체불명의 군대로부터 기습공격을 받았다. 총공격작전은 좌절하였고,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아군은 청천강 남쪽으로 후퇴했다. 마침내 중국의 ‘인민지원군’이 6·25전쟁에 참전한 것이었다.

 

북진을 계속해 온 한국군이 압록강 연안인 혜산에 진주한 것은 11월 21일이었다. 이승만 정권이 줄곧 주장해 온 ‘북진통일’은 바야흐로 현실이 될 것처럼 보였지만 현실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11월 24일 유엔군이 압록강을 향해 진격을 재개하면서 맥아더는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특별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것이 오판임이 드러나는 데는 채 이틀도 걸리지 않았다. 11월 25일과 26일에 중국군이 18개 사단이라는 가공할 병력으로 공격해 옴으로써 서부전선 방어선이 무너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11월 28일 ‘완전히 새로운 전쟁’에 직면해 있다는 맥아더의 특별성명은 그가 중국의 의도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는 ‘자백’이었다.

▲ 중국 인민지원군의 참전으로 후퇴하던 유엔군이 지쳐 쉬고 있다. (1950.11.29.) ⓒ NARA

결국, 유엔군의 총공격은 오직 4일 만에 그쳤으며, 이른바 ‘12월 후퇴’가 이뤄졌다. 평양을 빼앗기고 후퇴를 거듭하던 미 제10군단은 장진호 전투에서 치명적인 손실을 입으며 중국군 포위를 간신히 돌파해 흥남 철수를 완료할 수 있었다. [관련 글 : 압록강 진격 국군과 유엔군, 1·4후퇴로 서울을 다시 내어주다]

 

전세는 다시 역전됐다. 중국군의 원조를 받으며 북한군은 12월 26일에는 다시 38선을 넘어 남진했다. 맥아더는 중국에 대한 전면적 대응 즉, 중국 해안 봉쇄와 만주 폭격, 대만 국부군(國府軍)을 한국전에 투입하고, 중국 남부에 상륙시켜 제2전선을 펴자는 ‘전쟁 확대론’을 주장했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공산군의 남진이 이어지면서 적의 보급로도 늘어났으나 제공권을 장악한 유엔군의 공중 폭격으로 저지됐다. 1951년 1월 25일부터 유엔군의 반격이 시작돼 2월 10일에는 인천과 김포를 되찾았고, 3월 14일에는 서울을 재탈환했으며, 열흘 후(24일)엔 38선을 다시 돌파했다.

 

한편, 맥아더의 전쟁 확대론은 영국 등의 강력한 반대에다 소련이 전쟁에 개입하면 세계대전으로 확대될 것을 우려한 미국 정부에 저지됐다. 트루먼은 맥아더를 유엔군 총사령관직에서 해임(4.11.)하고 후임에 릿지웨이(M. B. Ridgway)를 임명했다. 미국의 한반도 정책은 ‘한반도 통일 노선’에서 ‘교섭에 의한 전쟁 종결 노선’으로 바뀐 것이었다.

 

이후 전투는 격렬해졌지만, 전반적인 전쟁 상황은 교착상태로 이어졌다. ‘휴전’이 다시 협상 테이블 위에 올라온 것은 양측의 필요에 따른 것이었다. 7월 10일, 개성에서 첫 휴전회담이 열린 이래, 양측 ‘경계선의 책정’ 문제와 ‘포로송환’ 문제로 양측은 2년이 넘게 지루한 공방을 벌였다.

▲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며 북한으로 돌아가는 북한군 여성 포로들(1953.8.6.) ⓒ NARA

휴전회담은 1953년 미국에서 정권이 교체(민주 트루먼 → 공화 아이젠하워)되고, 소련에서 스탈린이 사망하는 등의 국제정치적 변화를 겪고 난 뒤, 상병(傷兵) 포로 교환이 이뤄지면서 재개됐다. 북진통일을 주장해 온 이승만 정부가 휴전을 반대하며 독단적으로 반공포로를 석방(6.18.)하기도 했지만 결국, 휴전협정은 체결됐다.

 

정전, 1128일간의 전쟁이 가르쳐 준 교훈

 

7월 27일, 본회의에서 한국어⋅영어⋅중국어로 된 전문 5조 63항의 정전 협정 문서에 인민군 측 대표 남일 대장과 연합군 측 대표 해리슨 미 육군 중장이 서명했다. 그리고 클라크(Mark W.Clark) 연합군 사령관, 북한군 총사령관 김일성, 중국 인민지원군 총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가 각각 서명함으로써 정전 협정이 조인되었다. [관련 글 : 1129일 만에 한국전 총성 멈추다, ‘정전협정조인]

 

3년 1개월 2일, 모두 1128일 동안 이어진 전쟁은 쌍방에서 약 200만 명의 전사자와 360만 명의 부상자, 민간인 사망자 400만 명, 10만의 전쟁고아, 1000만 명의 이산가족을 남긴 채 마침내 멈춰진 것이다. [관련 글 : 한국전쟁 - 끝나지 않은 전쟁, 끝나야 할 전쟁]

▲ 이 통계자료는 국방부 자료를 기초로 만든 차트이다.

그리고 이후 남북한의 분단은 더욱 공고해지면서 70년이 흘렀다. 6.25전쟁은 “안으로는 민족분단을 더욱 확실히 하고, 남북 두 정권이 독재체제로 나아가게 하는 계기”가, 밖으로는 동서의 냉전을 격화시키는 하나의 고비(강만길, <한국현대사(창비, 1984)>)가 됐다.

 

영국 정치가 네빌 체임벌린(Neville Chamberlain)은 전쟁에서 어느 편이 스스로를 승자라 부른다 해도 실제로 승자는 없다, 모두가 패배자일 뿐이다라고 갈파한 바 있다. 그러나 분단 70년을 고착화한 전쟁과 그 상처가 남긴 것은 패배만은 아니다.

 

역사가 강만길은 6.25전쟁 기간 중 양측이 각각 한 차례씩 무력으로 상대방을 제압할 기회가 있었지만, 모두 실패한 것을 환기하면서 통일은 전쟁의 방식이 아니라 평화의 방도로만 이뤄진다는 걸 역설했다. 수천만의 민족이 참혹한 전쟁을 치르면서 배우게 된 값비싼 교훈을 그는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그 교훈이란, 강대국들로 둘러싸인 그 지정학적 위치 문제가 주된 원인이 되어 한쪽이 다른 한쪽을 정복하는 전쟁의 방법으로는 통일될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주었음을 아는 것을 말한다.

 

세월이 지나면서 그 전쟁으로 인한 흥분과 적개심이 조금씩이나 숙어 들자 우리 민족사회에 평화통일론이 일어나고 정착하게 되어갔다. 즉 6·25전쟁은 우리 민족사회에 더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주었지만, 평화통일론을 우리 땅에 정착하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된 전쟁임을 아는 일이 중요하다.” [관련 글 : ‘분단’과 ‘통일’을 화두 삼은 진보 역사학자 강만길 교수 별세]

   

- 강만길 자서전, <역사가의 시간>(창비, 2010) 중에서

 

*덧붙이는 글 | ‘1950년 6월 25일 시작된 남과 북의 무력 충돌’을 가리키는 공식 용어는 ‘6.25전쟁’이다. 2004년 교육인적자원부가 학계 전문가의 감수를 거쳐 교과서 편수 용어로 ‘6·25전쟁’을 확정해 사용하고 있다. 더러 ‘한국전쟁’이라고 쓰기도 하지만, 이는 역사상 한국에서 일어난 모든 전쟁 중에서 ‘6·25전쟁’만을 ‘한국전쟁(Korean War)’로 부를 수 없어 교과서 용어로 채택되지 않았다.

 

2020. 6. 24.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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