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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역사 공부 「오늘」

[오늘] 북한, 남한 이어 단독 정권 수립

by 낮달2018 2023.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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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공부 ‘오늘’] 1948년 9월 9일 – 북한, 사회주의 정권 수립

▲ 2014 인천아시안게임에서 북한 축구 선수단이 입장하면서 앞세우고 있는 이른바 '인공기'

남한 정부 수립 25일 만에 북한도 정권 수립

 

1948년 9월 9일, 북위 38도선 이북의 한반도 반쪽, 평양에서 김일성을 수반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인공)이 수립되었다. 38도선 이남의 남쪽 절반, 서울에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단독정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8.15.)된 지 25일 만이었다.

 

같은 해 4월,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를 반대하고 김규식·조소앙 등과 함께 남북협상을 통해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입각한 통일을 모색하고자 한 김구의 평양행은 실패로 돌아갔다. 김구를 비롯한 남한 대표들이 평양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은 전 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를 소집하여 28명의 주석단을 선출해 놓고 있었다.

 

남한 정치지도자들은 자유스러운 의사 표시와 협상이 허용되지 않고 회의가 일방적으로 진행되자 ‘4김회담’(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회담에서도 특별한 소득을 얻지 못한 채 김구 일행은 결국 빈손으로 귀환할 수밖에 없었다.

 

1948년 2월 유엔 소총회에서 한국이 가능한 지역 내의 선거를 시행하도록 하자는 미국 측 제안이 통과되고 난 뒤, 남쪽에서는 한국 역사상 최초로 남한만의 총선거(5.10.)가 치러졌다. 이 선거는 남북협상파가 불참하였고, 북한에 배정된 100석을 제외한 것이었으나 198명이 국민의 대표로 선출되었다.

▲ 남북 연석회의에 참가하여 축사를 하는 백범. 그러나 협상은 실패했고 일행은 빈손으로 돌아왔다.

제헌국회는 5월 31일 역사적인 개원식을 거행하고 의장에 이승만, 부의장에는 신익희·김동원을 각각 선출했다. 제헌국회는 즉시 헌법의 제정에 착수하여 7월 12일 국회에서 제헌헌법안을 의결한 뒤 7월 17일에 이를 공포하였다. [관련 글 : 백범, 삼천만 동포에게 통일정부 수립을 눈물로 고했지만]

 

협상은 실패, 남북에 각각 다른 정부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38도선 남북에 각각 미군과 소련이 진주하여 군정이 실시되었지만 3년 후 남북에 각각 다른 정권이 수립되고, 전쟁을 거쳐 분단이 70년 이상 지속되리라고 내다본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었다.

 

군정기에 남한에서는 숱한 정치 단체들이 이합집산하는 가운데 신탁통치안을 놓고 좌우익이 찬반으로 나뉘어 심각하게 대립하였다. 38선 이북에서는 민족주의 계열의 조만식을 위원장으로 하는 평남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으나, 소련의 김일성 지지와 지원으로 평남 건준위는 유명무실화되었고, 조만식을 비롯한 민족주의계 인사들은 김일성에 의해 숙청되었다.

▲ 초기 내각은 빨치산파(김일성), 국내파(박헌영), 연안파(김두봉), 소련파(허가이) 등의 연립 체제였다.

1946년 2월 8일에 구성된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는 사실상 북한을 통치하면서 무상몰수 무상분배 원칙의 토지개혁과 주요 산업 국유화 등을 단행했다. 이후 북한에서는 공산주의 지배 체제가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1948년 2월 8일에 인민군 창설되었고, 8월 25일에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시행하여 초대 대의원 572명을 선출했다. 그리고 마침내 9월 9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들은 헌법을 채택하고 북위 38선 이북에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이념으로 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한 것이었다. 이날은 이후 인민정권 창건일로 ‘99절’로 불리는 북한의 공휴일이 되었다.

 

수상은 김일성, 부수상에 박헌영과 홍명희(대하소설 <임꺽정> 작가)가 선출되었는데 초기 내각은 빨치산파(김일성), 국내파(박헌영), 연안파(김두봉), 소련파(허가이) 등의 연립 체제였다. 이듬해(1949) 6월에 주요 정당 단체를 결집한 ‘조국 통일 민주주의전선’이 결성되고 조선공산당이 ‘조선노동당’으로 개칭되면서 북한의 사회주의 정권은 진용을 갖추었다.

 

김일성은 한국전쟁 직후 패전의 책임을 물어 1950년대 초반에 박헌영의 남로당계(국내파)를, 중반에는 연안파와 소련파 세력을, 60년대에는 빨치산파(갑산파) 온건 세력을 숙청했다. 1960년대 후반에는 주체사상을 지도 이념화하고 70년대에 사회주의 헌법을 제정하여 김일성 유일 체제를 확립하였다. 남쪽에서는 박정희의 유신체제가 강압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분단 고착화, 9·9절에 핵실험 도발…

 

1948년 남북 양측에 단독 정권이 수립되면서 현실화된 분단의 고착화는 이후 70년 가까이 서로의 체제를 부정하는 극단적 대립으로 치달아왔다. 남북 간 화해와 협력을 위한 노력이 없잖아 있었지만 보수 정권 9년 동안 관계의 단절은 지금의 북핵 위기로 이어져 온 것이다.

 

지난해 9·9절 닷새 전에 스커드 미사일을 발사하고 당일 5차 핵실험을 실시했던 북한은 지난 3일 6차 핵실험으로 한반도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우리 정부는 정권 수립 69주년 기념일인 올 9월 9일에도 추가 도발을 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다.

 

일제의 압제를 몰아내고 광복을 맞았지만, 강대국의 이해관계가 인위적 남북 분단을 낳았고, 그 세월은 지금껏 이 민족의 어깨를 내리누르고 있다. 고조되는 북핵 위기 가운데, 정작 우리는 주도적으로 상황을 제어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몰려가고 있다.

 

 

2017. 9. 8. 낮달

 


2018년 첫 남북정상회담에 이은 판문점선언이 발표되면서 우리는 반세기를 훌쩍 넘긴 분단 조국의 평화가 찾아오는가 했었다. 이듬해까지 북미정상회담이 위태하게 진행되는 동안에도 희망을 버리지 못했다. 그러나 올 6월, 북한이 불과 2년 전에 문을 연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하면서 남북관계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버린 느낌이다. [관련 글 : ‘10·4 남북공동선언’, ‘6·15’를 이으며 ‘판문점선언’으로]

 

그러나 이제 더 나빠질 수 없는 상황에 이르면서 북한의 불만을 받아안으며 새롭게 평화와 화해의 불씨를 살려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역설이 힘을 얻는다. 남은 임기에 문재인 정부의 통 큰 발걸음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2020. 9. 8.

 

 

*참고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위키백과>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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