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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민한 살갗’의 외침 - 6·9 작가선언

by 낮달2018 2020.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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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 정치검찰과 수구 언론을 민주주의의 조종(弔鐘)을 울린 종지기로 고발

▲ 6·9 작가선언. <한겨레> 16 면 광고.

시인, 작가 등 문인들이 현실에 대해 발언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 땅에서 문인들의 현실 참여는 짧지 않은 역사를 가졌다. 1970년대 유신독재 시절에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중심으로 한 민주화 투쟁은 가장 좋은 예다. ‘절대 자유’를 추구하긴 하지만, 작가는 자신의 시대와 현실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소설 <25시>의 작가 비르질 게오르규(1916~1992)는 시대 현실에 대한 작가의 책무를 ‘잠수함의 토끼’에 빗댔다. 그것은 사회적 위기를 확인하는 지표로 약자의 고통을 이용한다는 비유로 흔히 이해된다. 지금이야 기술 발달로 잠수함 내부의 산소 밀도를 쉽게 점검할 수 있지만, 작가가 잠수함 승무원이던 때만 해도 산소 감소의 위기를 알려주는 역할을 한 것은 토끼였다.

 

잠수함 안의 산소가 감소하면 이에 가장 민감한 토끼가 알아채고 제일 먼저 죽는다. 잠수함 수병이었던 게오르규는 토끼가 죽자 토끼의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체험을 통해 단위 사회 안에서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 사회의 부패를 감시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즉, 어느 사회, 어느 시대든 불합리를 가장 먼저 알아차리고 그것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며, 그 고통을 통하여 그 사회의 위기를 경고하는 존재가 바로 작가라는 것이다. 작가나 예술가는 그래서 항상 ‘시대를 앞서가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으며 이는 그들의 ‘소명’이면서 동시에 ‘특권’이다.

 

작가는 ‘잠수함의 토끼’

 

작가를 ‘잠수함의 토끼’로 바라볼 때, 시대를 고민하지 않는 작가, 시대의 고통을 미리 앓지 않는 작가는 기본적으로 작가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작가는 자신이 창조하는 세계의 주재자지만, 그 세계는 시대 현실을 외면하거나 비켜날 수 없는 까닭이다.

 

바야흐로 시국선언이 봇물 터지듯 나오는 시절이다. 대학교수와 진보적 지식인을 중심으로 현 정부를 비판하는 시국선언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시인, 작가 등 문인들도 이 대열에 동참하고 나섰다. 작가 188명으로 구성된 ‘6·9 작가선언’은 오늘(9일) 오후 현 시국에 대한 작가들의 목소리를 담은 시국선언을 발표한다고 밝힌 모양이다.

 

▲ 작가 비르질 게오르규 (1916∼1992)

나는 이들 작가의 시국선언을 오늘 아침 <한겨레> 16면 하단 통 광고로 먼저 만났다. 이 시국선언의 제목은 ‘이것은 사람의 말-6ㆍ9 작가선언’이다. 출근 시간에 쫓기면서도 나는 꼼꼼하게 깨알 같이 인쇄된 예의 선언문을 읽었다. 단순히 수려한 미문 때문이 아니라, 거기에 담긴 젊은 작가들의 진정성에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액면 그대로 ‘잠수함의 토끼’가 되기에는 좀 늦은 시간이기는 하다. 그러나 진보적 문인단체가 아닌,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소속과 세대가 다양한 작가들이 모여 ‘현 시국 상황에 대한 공분’을 바탕으로 뜻을 모은 후 취지에 동의하는 문인들이 동참해 결성된 이들 ‘작가선언’의 의미는 가볍지 않다.

 

허두에 나온 짧은 명제, ‘우리의 이념은 사람이고 우리의 배후는 문학이며 우리의 무기는 문장이다.’는 이 선언이 말과 글을 다루는 작가들의 선언임을 증언한다. 그리고 그들은 문학이 ‘한계’가 없으며, ‘상대적 자유가 아니라 절대적 자유를 꿈꾼다’고 전제하면서도 그 ‘문학 본연의 정신을 되새기는 것이 차라리 사치가 되어버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며 고통스러운 현실을 직시한다.

 

정치검찰과 수구 언론은 민주주의 조종을 울린 종지기들

 

그들은 ‘1987년 6월’을 떠올리고 그 시대의 죽음들의 대가로 쟁취한 민주주의를, ‘기억해야 할 의무’가 아니라 그것을 ‘망각할 권리’가 없다고 확인한다. 그들은 ‘각자가 하나의 정부인 작가’ 모였지만, ‘조직도, 집행부도, 정강도 없다’라고 강조한다.

 

작가들은 자신들이 ‘특정한 이념’ 기대지 않는다고 말하며, ‘이명박 정부가 내세운 ‘중도실용주의’라는 가짜 이념은 집권 1년도 못 돼 폐기해야 할 대상이 되어버렸다’라고 규정한다. 그들은 ‘도처에서 헌법 위에 군림하는 독재의 얼굴’을 보면서 ‘민주주의의 가치는 매장되었다’라고 선언한다.

 

작가들은 ‘이 모든 일에 적극 가담한 정치검찰과 수구 언론을 우리는 민주주의의 조종(弔鐘)을 울린 종지기들로 고발한다.’라고 외친다. ‘정치검찰들’과 ‘증오와 저주의 저널리즘으로 민주화의 역사를 모독하고 민주주의의 가치들을 조롱하는 수구 언론’에 대해 분노하면서 자신들이 ‘저들과 같은 모국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참혹해진다’라고 고백한다.

 

그들은 ‘수치’와 ‘슬픔’을 모르는 권력을 지탄하며 ‘수치와 슬픔을 아는 것이 사람이고, 사람됨이라는 가치에 헌신하는 것이 문학’이라며, ‘문학의 이름으로 이명박 정부를 규탄한다.’ 한편, 작가들은 우리 시대와 현실을 ‘민주주의의 아우슈비츠, 인권의 아우슈비츠, 상상력의 아우슈비츠’로 규정한다. 그리고 그것이 과장이 아니라 ‘문학은 한 사회의 가장 예민한 살갗이어서 가장 먼저 상처 입고 가장 빨리 아파한다. 문학의 과장은 불길한 예언이자 다급한 신호일 수 있다.’고 진단한다.

 

‘예민한 살갗’은 게오르규가 말한 ‘잠수함의 토끼’와 다르지 않은 비유다. 그것은 한 시대의 작가로서 자기 시대에 대한 책임과 의무에 대한 새로운 확인이다. 작가가 시대와 현실 앞에서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에 대한 뜨거운 증언이다. 작가들은 그들의 수단이자 목적인 ‘말’에 대한 자신들의 의지를 확인하면서 이 선언을 마무리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 종이와 펜이 있다. 그러니 동의하지 않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끝내 저항할 것이다. 민주주의의 정원을 갈아엎고 있는 눈먼 불도저를 향해, 머리도 영혼도 심장도 없는 권력자와 그 하수인들에게 저항할 것이다. 가장 뜨거운 한 줄의 문장으로, 가장 힘센 한 문장의 모국어로 말할 것이다. 사람의 말을, 사람만이 할 수 있고 사람이니까 해야 하며 사람인 한 멈출 수 없는 그 말을. 아름답고 정의로운 모든 문학의 마지막 말, 그 말을.

 

나는 선언문 아래에 깨알같이 박힌 작가들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하나하나 호명하듯 읽었다. 더러는 낯익고 더러는 낯선 이름이 교차하긴 하지만, 그것은 우리 시대의 작가들에 대해 한 독자가 바치는 경의이고 공명이었음을 더 말할 나위가 없다.

 

2009. 6. 9.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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