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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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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있지 않아도 좋다! 건강하게 돌아와다오!

by 낮달2018 2020.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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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 신병 교육훈련 수료식 참관, 면회기

 

‘그래도 군대는 가야 한다’는 ‘숙맥’ 조카[기사 바로 가기]는 기어코 입대했다. 조카는 군대를 마치고 복학하는 타이밍까지 고려해 육군에 응모했다. 그러나 지원자가 몰리는 바람에 입대에 실패한 조카는 궁여지책으로 해병대에 지원했다.

 

“하필이면 해병대야. 그러잖아도 고생스러울 텐데 굳이 해병대를 지원할 게 뭐람.”

 

친지들의 근심도 당연히 컸다. 한 다리를 건너긴 했어도 나 역시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30년도 전의 기억이긴 하지만 나도 해병에 대한 인상이 별로였기 때문이다. 물론 세월이 많이 흘렀다. 군대도 달라졌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지만, 여전히 군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는 트라우마가 겹겹이 묻어 있지 않은가.

 

그러나 아무도 녀석의 입대 결심을 말리지 못했듯 해병대 지원도 다르지 않았다. 혀를 차거나 못마땅해 한 마디씩 걸치고 말았을 뿐 모두가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녀석은 지난 4월 하순에 부산 등에서 달려온 고모들의 배웅을 받으며 포항의 해병대 교육훈련단에 입소했다.

 

해병으로 입대한 ‘숙맥’ 조카

 

아내는 바빴다. 돌아오자마자 수시로 인터넷에 접속하여 조카의 훈련 상황을 주기적으로 확인했고, 인터넷 편지 쓰기 따위에 참여하기도 했다. 교육훈련단에서 올려놓은 단체 사진 속에 앉아 있는 조카를 확인하고 울먹이기도 했다.

 

수료가 가까워질 무렵, 마침내 인터넷에 훈련병들의 안부 동영상이 올랐다고 했다. 아내는 부리나케 인터넷에 접속하여 예의 동영상을 찾아냈다. 나도 그 동영상을 보았다. 카메라가 침상에 2열로 앉은 훈련병에게 다가가면 병사들이 관등성명을 대고 고래 고함을 지르며 부모님과 가족들에게 인사를 하는 형식이었다.

 

얼마나 연습을 했는지 아직 어린 티가 나는 병사들이 작은 실수도 하지 않고 절규하듯 인사말을 외치는 것을 보면서 조금 씁쓸한 느낌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어쨌든 그게 우리의 방식이다. 이왕 간 군인, 병사답게 절도 있고 씩씩한 모습을 보여주는 게 부모들에겐 더 미더울지도 몰랐다.

 

지난 5일이 조카 기수가 훈련을 마치는 날이었다. 가족들이 수료식을 참관할 수 있고 행사 후에는 몇 시간 동안 동반 외출이 허락된다고 했다. 가족들이 다시 떠들썩하게 다시 모였다. 당일 아침 나는 연가를 내고 운전대를 잡았다.

 

내비게이션의 인도로 포항 현지에 도착한 게 오전 10시께. 부대에 들어서자 훈련병들이 열을 지어 연병장으로 집결하고 있었다. 연병장 가의 둑 위에서 나는 병사들의 행렬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사람들을 의식한 병사들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고, 군중들 가운데 자신의 가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과 설렘이 가득했다.

 

잠깐 나는 까마득한 시간 저편의 기억을 떠올렸다. 병사들은 흔치 않은 민간인의 시선 앞에서 자신의 자리를 돌아보게 되고 거기서 힘을 얻기도 한다는 것을. 병사들은 민간인들의 애틋함과 연민이 가득 찬 눈길 앞에서 새삼 자신이 감내해야 하는 고통과 시련의 목적을 막연하게 깨닫기도 하는 것이다.

 

어버이에겐 ‘모두 자랑스러운 아들’

 

새로 받은 깨끗한 신형 전투복과 전투화, 팔각모에 자랑스레 달린 작대기 하나, 빨간 명찰에 새긴 자신의 이름자……, 영내를 가득 메운 사람들, 특히 여자들의 높다란 목소리를 들으며 병사들은 지난 몇 주간의 고통이 덧없이 스러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 것이다.

 

면회객들은 단연 부모고 형제들이었다. 그러나 이른바 ‘하의 실종’의 옷차림을 한 스무 살 남짓의 처녀애들도 적지 않았다. 그 여자애들의 하이 소프라노의 목소리가 섞인 병영 안에는 아연 활기가 도는 듯했다. 앳된 여자아이들이 몰고 다니는 지분 냄새는 병영 안이 단연 사내들의 공간이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해 주는 듯했다.

 

수료식은 10시 반에 시작되어 정확히 30분 후에 끝났다. 이틀에 걸친 예행 연습 덕분에 의식은 절도 있고 정연하게 진행되었고 면회객들은 아낌없는 박수로 병사들이 보여준 군기와 질서를 치하했다. 관람석을 가득 메운 가족들의 조바심이 정점을 치달을 무렵, 병사들은 큰절로 가족에 대한 예를 다했다.

 

병사들이 가족들 앞에 자신의 성숙한 모습을 자랑스러워했다면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보내고 노심초사했던 어버이들은 씩씩한 병사가 된 아들의 모습을 자랑스러워하면서 그 자랑스러움에 안도감을 보탰을 것이었다. 비록 ‘신의 아들’처럼 면제를 선물할 수 없었지만, 병역의 첫 단계를 훌륭하게 마친 자식의 모습을 통해 그 미안함을 조금이라도 덜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의식이 끝나자마자 가족들은 너나없이 연병장에 늘어선 아들과 연인을 향해 일제히 달려갔다. 오늘만큼은 장모님도 서둘러 움직이셨다. 어느새 딸들을 제치고 연병장으로 치닫고 계셨던 거였다. 중대의 후미에서 웃음을 깨물고 있는 조카를 발견한 아내와 처제는 환성을 질렀다.

 

장모님과 아내는 아이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아이는 행복하고 자랑스러워 보였다. 아이는 굳이 할머니 앞에 목청을 높여 정식 신고를 했다. 그것 역시 얼마나 연습을 했던 것인가. 군살이 빠지고 얼굴이 그을리긴 했지만 아이는 오히려 단단해져 있었다.

 

“어떠냐? 괜찮지?”

“괜찮습니다. 아주 재미있습니다.”

 

아이는 ‘재미있다’고 했다. 어쨌든 좋은 일이다. 훈련을 피할 수 없는 고통이 아니라 새로운 경험과 발견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면 크게 걱정할 일은 없겠다. 아이를 데리고 나와 오천 읍내에서 우리는 주로 먹이는 일에 신경을 썼다. 아이만큼 우리도 열심히 먹긴 했다.

 

“아침은 반밖에 먹지 않았습니다. 많이 먹으려고요.”

“동기들이 배탈이 나더라도 많이 먹는 게 낫다고 하데요.”

 

먼저 돼지갈비를 사 먹였고 회와 통닭, 그리고 준비해 간 과일 등으로 아이는 푸짐하게 먹었다. 식당을 나오니 마땅히 갈 데가 없어 우리는 인근 대형 할인마트 앞으로 갔다.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서 음식을 즐기면서 아이는 끊임없이 친구들과 안부를 나누었다.

 

오후 5시까지 아이는 부대로 복귀해야 했다. 백령도나 연평도로 배속된 친구들과는 달리 아이는 서울 근교로 배속되었고, 훈련단에서 후반기 교육을 받게 되었다고 했다. 오, 하나님! 가족들은 아이가 휴전선 가까운 섬으로 배속되지 않은 것을 거듭 감사해했다.

 

제발, 건강하게만 돌아와다오!

 

4시 반께 우리는 부대로 다시 들어갔다. 벌써 귀대하는 아이들로 정체가 시작되고 있었다. 영내의 숲에 앉아 잠깐 쉰 다음 우리는 서둘러 아이와 헤어졌다. 좀 서두르는 게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이는 마지막으로 친구와 통화를 하고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잘해라. 배속되면 동기들만 있는 교육대와는 다르다. 거기는 층층시하 선임들이 버티고 있다. 각오하고 있겠지?”

“예, 알고 있습니다.”

“자신을 챙겨 줄 사람은 너뿐이다. 잊지 말아라.”

“알겠습니다.”

우리가 그랬듯 아이도 ‘나라에 충성’하기 위해서 입대한 것은 아닐 것이었다. 아이에게 병역은 이 나라의 보통 젊은이들이라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다. 그리고 그것을 통과하는 것이 자신이 감당해야 할 과제라는 걸 아이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  아이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우리는 아이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부대를 떠났다. 아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막사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눈시울을 적시긴 했지만 아이 할머니도 아이를 대견히 여겼으리라. 앞으로 20개월 남짓. 아이는 더 성숙한 젊은이가 되어 우리 곁으로 돌아올 것이다.

 

요즘 군대는 예전과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바뀌었다고 한다. 면회 문화는 말할 것도 없고, 이른바 ‘군대리아’라 불리는 간식 문화도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고 한다. 병사들이 피부 관리를 위해 스킨로션과 선크림 따위를 이용하기도 한다니 우리의 상상력은 가난하기만 하다.

 

그러나 변하지 않은 건 본질이다. 군대가 수직적 명령과 복종의 질서가 강요되는 폐쇄된 공간이라는 사실, 그리고 거기서의 행운과 불운은 ‘줄서기’에 달렸다는 것 등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대다수 젊은이가 쫄병 시절을 거쳐 노회한 선임병이 되면서 ‘사람’이 되어 돌아오긴 하지만 거기서 돌아오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여전히 적지 않은 곳이라는 사실도 그대로다.

 

해마다 100명에서 150명 이내의 병사들이 각종 안전사고로 혹은 군기 사고로 사망한다. 그 사고의 원인이 무엇이었든 자식을 군대에 보내고 노심초사해 온 부모에게 그 죽음은 동질적이다. 생때같은 자식을 군대에 보냈다가 잃은 어버이의 심정을 ‘국가’와 ‘조국’이 얼마나 위로할 수 있을 것인가.

 

아버지, 어머니 당신이 있어 제가 있습니다.

대한민국, 조국이 있어 우리가 있습니다.

 

연병장 뒤편에 걸린 펼침막에는 그렇게 씌어 있다. 부모가 자식의 근원이듯 조국이 국민의 뿌리라는 명제를 부인할 수 있는 부모는 없다. 그러나 자식을 잃고 나서 그래도 ‘조국’이 있다고 위로받을 부모는 많지 않다. 아들을 남기고 부대를 떠나는 어버이들의 바람이 한결같은 이유다.

 

아들아! 멋있지 않아도 좋다.

용감하지 않아도 좋다.

건강하게만 돌아와다오!

 

 

2013. 6. 8. 낮달


물론 아이는 무사히 만기 전역했다. 그리고 지금 대학원 공부를 하고 있다. 그가 굳이 지원해 치른 해병대 복무가 아이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알 수 없다. 우리야 그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을 뿐이니. 

 

병역을 마쳤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학교를 마치면 취업하는 일이 화급한데, 시절이 워낙 힘든 때니 모두가 걱정하고 있다. 그러나 아이가 군 복무를 마칠 수 있었던 것처럼 아이의 앞날도 잘 헤쳐가리라고 믿고 싶어 할 뿐, 우리가 정작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누구나 제 몫의 삶은 스스로가 살아가야 하는 법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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