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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의열투쟁6

[순국] 백발의 독립투사 강우규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다 1920년 11월 29일, 강우규 의사 서대문 형무소에서 처형 순국 1920년 11월 29일 오전 10시 30분, 서대문형무소 형장에서 사형집행으로 ‘백발의 독립투사’ 강우규(姜宇奎, 1855~1920) 의사가 순국하였다. 1919년 9월, 남대문 정거장(지금의 서울역)에서 폭탄 거사를 감행한 지 14개월 만이었다. 그는 처형 직전에 유언 대신 ‘사세시(辭世詩)’ 한 수를 남겼다. “단두대에 홀로 서니 춘풍이 감도는구나. (斷頭臺上 猶在春風) 몸은 있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有身無國 豈無感想)” 강우규는 평안남도 덕천 사람으로 가난한 농가의 4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누님 집에서 성장하였고, 청소년기에 친형에게 한학과 한방 의술을 익혀 이를 생활의 방편으로 삼.. 2023. 11. 28.
[오늘] 약산 김원봉의 ‘의열단(義烈團)’ 출범 [역사 공부 ‘오늘’] 1919년 11월 9일-김원봉, 항일비밀결사 ‘의열단’ 조직 1919년 11월 9일 밤, 만주 길림성 파호문 밖 한 중국인의 집에 모인 독립지사들은 밤새워 논의한 끝에 이튿날인 급진적 민족주의 노선을 지향하는 항일비밀결사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했다. 결사의 성격은 조직 후 만든 공약 10조의 첫 조항인 ‘정의(正義)의 사(事)를 맹렬(猛烈)히 실행한다.’에서 유래한 단체명[의열(義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의열단의 단원은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중심으로 고문에 김대지와 황상규, 단원은 김원봉·윤세주(1900~1942)·이성우·곽경·강세우·이종암·한봉근·한봉인·김상윤·신철휴·배동선·서상락·권준 등 13명이었다. 단장에는 약산(若山) 김원봉(1898~1958)이 선출되었다. 의열.. 2023. 11. 9.
[순국] ‘경술국적 이완용 처단 미수’ 이재명 의사 순국하다 1910년 9월 13일, 이완용을 처단하려다가 실패한 이재명(李在明, 1887~1910) 의사가 경성감옥(뒷날의 서대문형무소) 형장에서 순국했다. 1년 전(1909) 12월, 그는 이완용을 찔렀지만 실패해 체포되었고 2010년 5월 일제의 법정으로부터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칼끝에서 살아남은 이완용은 8월 22일 데라우치 통감 관저에서 매국 문서(한일합병조약안)에 서명했고 합병은 일주일 후 발효되었다. 이재명은 평안북도 선천 사람이다. 어릴 때 평양으로 이주하여 개신교계 사립학교인 일신학교를 졸업했다. 1904년 미국노동이민회사의 이민 모집에 응하여 하와이로 가 농부로 일하다가 1906년 3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서 한인의 독립운동단체인 공립협회(共立協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이재명, ‘국적 이완용.. 2023. 9. 13.
그날, 장진홍은 죽어서도 ‘독립만세’를 불러냈다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사건 장진홍 의사 순국 90주기 추모제 열려 지난 30일 저녁 7시 30분에 구미시 진미동 동락공원에서는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사건(1927)의 주역 장진홍(張鎭弘, 1895~1930) 의사의 90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장진홍 의사 기념사업회와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에서 연 이 추모제는 탄신 120주년 추모식 및 동상 제막식(2015)과 매년 3·1절의 약식 추념식을 빼면 순국일 전야에 치러지는 추모제는 처음이다. 그는 죽어서도 재소자 1천여 명의 ‘독립만세’를 불러냈다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의거로 대구지방법원과 대구복심법원의 사형선고를 받은 뒤, 고등법원 상고가 기각되어 장진홍의 사형이 확정된 것은 1930년 7월 21일이었다. 8월 1일, 예정대로 사형이 집행되었다면 일제는.. 2020. 7. 31.
[순국]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대구형무소에서 순국 1921년 8월 11일, 고헌 박상진, 대구형무소에서 처형되어 순국 1921년 8월 11일, 대구형무소에서는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朴尙鎭, 1884~1921)이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일찍이 경성감옥에서 순국한 왕산 허위(1855~1908, 1962 대한민국장)의 시신을 수습하여 금오산 아래에 모시고 1년의 시묘(侍墓)로 스승을 배웅한 제자, 반민족적 친일부호들을 처단하는 의열투쟁을 전개한 청년 독립운동가는 서른일곱에 뜨겁던 삶을 마감했다. 박상진은 울산 출신이다. 호는 고헌(固軒). 고향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열아홉 살(1902) 때 의병장 출신으로 서울 평리원 판사로 있던 왕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04년 양정의숙 전문부에서 법률과 경제학을 공부하고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하여 평양법원에 발.. 2019. 8. 10.
[오늘] 장태수, ‘원수의 돈’ 일제 은사금 거부하고 목숨을 거두다 [역사 공부 ‘오늘’] 1910년 12월 28일, 장태수 24일 단식으로 순국하다 1910년 12월 28일(음력 11월 27일) 수요일, 전북 김제 금구의 남강정사(南崗精舍)에서 일유재(一逌齋) 장태수(張泰秀, 1841∼1910) 선생이 예순아홉 살을 일기로 순국하였다. ‘불충과 불효한 죄를 죽음으로 씻는다’고 하며 단식에 든 지 24일 만이었다. 장태수는 전북 김제 출신으로 내부협판 장한두의 아들이다. 본관은 인동, 자는 성안(聖安), 호는 일유재(一逌齋). 1861년 약관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출사(出仕)한 이래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등 청요직(淸要職)을 거쳐 정3품 당상관인 통정대부에 이르렀다. 일유재, 24일 단식 끝에 순국 1895년 단발령이 내리자 장태수는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왔.. 2018. 12.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