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공부 ‘오늘’] 1910년과 1941년 9월 15일, 독립운동가 오성술, 이규선 순국
1910년과 1941년 9월 15일에 두 분의 독립운동가가 순국하였다. 한 분은 처형으로, 또 한 분은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물론 건국훈장으로 기리긴 하지만, 세상엔 잘 알려지지 않은 이들이다. 순국한 지 108년과 77년이 넘어서만은 아니다.
2018년 8월 15일 현재 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을 받은 이는 대한민국장 30명, 대통령장 93명, 독립장 824명, 애국장 4,306명, 애족장 5,664명 등 10,917명이고, 건국포장 1,253명, 대통령 표창 2,887명 등 모두 15,057명이다.
생각보다 많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해방 당시 우리나라 인구가 2천5백만이니 0.0006%밖에 되지 않는다. 건국훈장의 등급이 높을수록 유명 인사고, 이들의 업적도 남다르긴 하다. 그러나 그들의 업적과 공훈은 등급이 낮아질수록 많아진 수훈자들로 말미암아 더욱 빛나는 것이라는 걸 지나칠 수 없다.
여기엔 중국을 비롯한 이국땅에서 스러져 간 무명의 투사들은 포함되지 않는다. 이름 한 자 제대로 남기지 못하고 스러져간 이들 희생의 누적 위에서 해방과 광복의 감격이 빛났다는 것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그나마 살아서 광복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음은 또 얼마나 부신 축복이었을까. 순국한 선열들의 생애를 돌아보면서 2, 30대 젊은 나이에 처형으로, 옥중의 모진 고문으로 유명을 달리한 이들을 만날 때마다 혹은 불과 몇 줄의 이력만 남긴 이들의 삶을 헤아려보면서 뜨거운 무엇이 목구멍에 걸리는 느낌이 그것이다.
1910년 오늘 - 의병장 오성술, 스물여섯에 처형되어 순국하다
1910년 오늘, 전라남도 광주 출신의 의병장 오성술(1884~1910)이 대구감옥에서 순국했다. 같은 해 6월, 교수형을 선고받은 뒤 가족이 항소했으나 기각되었다. 항소가 기각된 뒤 일제는 서둘러 그의 형을 집행한 것이다. 향년 스물여섯 살.
을사늑약 이후 기울어가는 나라를 차마 보지 못해 거의(擧義)했으나, 그는 결국 감옥에서 경술국치를 겪어야 했다. 일제는 강제 병합 직후 회유 가능한 인사들에게는 은사금과 사면, 복권 조치를 하고, 그것이 불가능한 인사들에 대해서는 서둘러 형을 집행하였다.
내 평생 시름없는 사람이라 자위했건만
나라의 운명이 어려워져 그 걱정뿐이네.
술 속의 취기는 밤낮이 없건만
글 속에 대의는 춘추를 지녔구나.
집안이 기울어도 천금 부자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붓을 내던지니 오직 백성 시중들 생각만 하네.
세상살이에 마음속 일을 알기 어렵지만
분노 그 밖에 다시 무엇을 구하겠는가.
生平自謂我無愁天步艱難是可憂
酒褒微罔晝夜書中大義有春秋
傾家不顧千金富投筆唯思萬戶候
處世難知心內事慨然此外更何求
- 오성술이 의병 활동 중 읊은 시
오성술은 1884년 전라남도 광산군 삼도면 송산리 죽산마을에서 지방 양반가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뒷날 의병을 일으킬 때 50여 마지기의 전답을 팔아 군자금으로 충당한 사실로 미루어 가산도 넉넉했던 듯하다.
어린 시절에 한학을 배우다 18세 때부터는 집안 숙부뻘 되는 오준선(1851∼1931)이 강학하던 용진정사(聳珍精舍)에서 한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였다. 오준선은 장성의 기우만(1846~1916, 1980 독립장)과 쌍벽을 이룬 호남의 거유(巨儒)로 도학과 문장이 높았다.
오성술은 1905년 7월, 21세의 나이에 유림의 추천으로 종9품 충의 참봉을 제수받았다. 그의 의병부대가 오 참봉 부대로 알려진 것은 이런 연유였다. 그러나 넉 달 후, 일제는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자주적 외교권을 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내정까지 간섭하기 시작했다.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疏)와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려 매국(賣國) 대신들의 처단을 요구하던 면암 최익현(1833~1906)이 태인 무성서원에서 창의(倡義)한 게 1906년 6월이었다. 일찍이 면암의 강론을 들으며 그를 존경해 왔던 오성술도 광산에서 거의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광주 용진산에서 거의, 호남창의회맹소에도 참여
부친이 50여 마지기의 전답으로 마련해 준 군자금으로 무기를 구입하는 한편 동지 규합에 나서 1907년 2월 의병항쟁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수학하던 용진산(聳珍山)을 근거로 2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의진을 편성한 것이다.
오성술의 의병부대 규모는 그해 7월께에는 각지에서 몰려든 의병들로 500여 명에 이르렀다. 또한, 휘하 장수들의 지휘 아래 납과 구리를 구해 와 탄환을 제작하였고, 군사훈련을 시행하였다. 일본군과의 격전을 앞두고 전투력을 갖춘 것이었다.
그럴 즈음 나주 출신의 의병장 김태원(金泰元, 1870~1908, 1962 독립장)이 합진(合陣)을 제의해 왔다. 창의 목적이 똑같은데 흩어져 싸우면 적에게 허점만 드러낼 뿐이라는 김태원의 논리에 오성술 부대는 합진을 받아들이고 두 사람은 14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형제가 되었다.
이후 오성술은 김태원과 함께하면서 1907년 9월 기삼연(1851~1908, 1962 독립장)을 창의대장으로 하여 편성된 호남 의병부대의 연합 의진인 호남 창의회맹소(倡義會盟所에)도 참여하였다. 그는 김태원의 막료로서 그해 9월 23일 고창 문수사에서 일본군을 격파하고, 나아가 고창읍성을 탈환하는데도 동참하였으며, 특히 12월 7일 김태원 의병장이 앞장선 호남 창의회맹소의 영광 법성포 탈환전에도 참여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이후 의병들이 일본군의 추적을 피해 소규모로 활동하게 되자 오성술도 독립 부대를 이끌면서 호남평야에서 경제침탈에 앞장선 일본인 소유 농장을 공격했다. 이들 일본인 지주들은 식민 농업 수탈의 전위대로 활동하면서 한국 농민들과 대립하고 있었다.
1908년 1월 오성술은 2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광주군 마지면 반촌에 있는 일본인 지주 사쿠마 토키조오(佐久間時三郞)의 농장을 습격하였다. 이듬해 1월에도 25명의 의병부대를 이끌고 광주군 대지면 전촌에 있는 일본인 지주 모리 주우(森十內)의 농장을 다시 습격하였다.
의병항쟁이 격화하자 일제는 1908년 초부터 대대적인 탄압 작전을 벌였다. 이에 호남창의회맹소를 이끌던 기삼연 의병장이 순창에서 붙잡혀 총살, 순국하고 김태원 의병장도 4월 광주 박산동 어등산 전투에서 일본군과 교전 끝에 전사, 순국하였다.
이후에 오성술은 의병부대를 소규모로 나누어 활동하다 필요시에 다른 부대와 합치는 방식의 전술을 택했다. 이 이합집산의 유격 전술은 매우 효과적이어서 오성술 부대는 수시로 전해산(1879~1910, 1962 대통령장) 부대, 심남일 부대, 안규홍(1879~1911, 1963 독립장) 부대 등과 이합하며 의병투쟁을 이어갔다. 1908년 전해산 부대와 연합하여 광산군 적량면 석문산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것이 한 예다.
나주 용문산으로 근거지를 옮긴 오성술 부대는 친일 주구(走狗)의 처단에 나서 밀정 황도현과 나귀종을 각각 총살 처단하였다. 일본군에 대한 공격 또한 멈추지 않아 고막원 헌병분파소를 기습 공격하였다. 1909년 3월 초에 호남 의병장들은 심남일(1871~1910, 1962 독립장) 의병장의 주선으로 합동작전을 벌이기로 하고 나주 남평면 거성동에서 일본군을 무찔렀다.
대구감옥에서 처형되어 순국한 호남 의병장들
그러나 일제는 남한대토벌작전을 세워 호남 의병부대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해왔다. 1908년 영산포 헌병대는 토벌대를 파견하여 오성술 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용문산을 공격해 왔다. 요시무라(吉村) 중위가 이끄는 일본군과 토벌대에 맞서 의병들은 결사 항전하였지만, 마침내 오성술은 일본군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1907년 용진산에서 창의한 이래 세 해 동안 광주, 나주, 담양, 함평, 고창 일대를 누빈 오성술의 항일 의병투쟁은 마침내 막을 내려야 했다. 오성술은 일본이 대한제국의 사법권과 교도 행정에 관한 업무를 탈취한 조약인 기유각서(1909) 이후인 11월 30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강도죄로 징역 15년을 받았다.
그러나 복역 중 살인과 방화죄가 추가되어 이듬해 6월 17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가족들이 대구공소원((控訴院, 2심법원)에 공소하였으나 그해 7월 16일 기각됨으로써 형이 확정되었다.
오성술은 1910년 9월 15일, 대구감옥에서 형 집행으로 순국했다. 의병연합 부대 호남창의회맹소에서 함께 싸웠던 의병장 기삼연과 김태원은 1908년 순국했고, 그가 떠나고 난 뒤 심남일은 10월에, 안규홍은 이듬해 각각 대구감옥에서 교수형을 받아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오성술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그의 묘소는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산동에 있다.
1941년 오늘 - 이규선 선생,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다
1941년 9월 15일, 서대문형무소에서 10년째 복역하고 있던 독립운동가 이규선(李奎善, 1885~1941)이 옥중 순국했다. 향년 56세. 그는 일찍이 1919년 3·1운동 때 만세 시위에 참여한 이래, 만주로 망명하여 임정의 밀명으로 군자금을 모금하다 체포되어 12년형을 선고받고 수감 중이었다.
이규선은 경기도 화성 사람이다. 집안의 내력과 성장 과정을 비롯한 정보는 전하지 않는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물론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도 공적 사항만이 짧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는 1919년 화성군 송산면 사강리 일대에서, 홍면·왕광연·문상익·홍명선·김교창 등이 주동한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그는 3월 26일 오후 5시께 송산면사무소에 모인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내걸고 독립 만세를 외쳤다. 28일 오후에는 송산면 뒷산에 모인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대대적인 만세 시위를 벌였다.
3·1운동 때 일본인 순사부장 살해 후 망명 독립운동
일본인 순사부장 노구치(野口廣三)가 제지하려 했으나, 시위군중은 더욱 기세를 올리며 홍면 등 수십 명이 면사무소로 달려가, 면장과 면서기에게 독립 만세를 부를 것을 강요하였다. 오후 3시께 뒤따라온 노구치가 홍면 등을 강제로 주재소로 연행하려 하여, 시위군중과 충돌하게 되었다.
사태의 위급함을 느낀 노구치가 권총으로 홍면을 쏘아 쓰러뜨리자 격노한 시위군중은 일시에 일경에게 달려들었다. 노구치는 사태가 불리해지자 자전거를 타고 주재소 방향으로 도주하였다.
이때 이규선은 왕광연·홍명선·김교창·문상익·홍남후·김명제·민용운·정군필 등 20여 명과 함께 순사부장을 뒤쫓았다. 이규선은 미처 주재소에 이르지 못한 그를 붙잡아 돌과 곤봉으로 살해하고 일제의 눈을 피하여 만주로 망명하였다.
1923년부터 1928년까지 임시정부의 밀명을 받고, 3차에 걸쳐 입국하여 군자금 모금하여 임정에 송금하였다. 1928년 8월 사리원(沙里院)에서 체포되어 10일간 구류처분을 받았다.
1931년 1월 대대적인 군자금 모금 운동을 벌이다 체포되었으며,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68년,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화성시 송산면 중송리에 그의 집터가 남아 독립기념관 국내 독립운동·국가수호 사적지로 소개되고 있을 뿐 그의 흔적은 더는 찾을 수 없다.
2018. 9.14. 낮달
참고
· 독립유공자 공훈록, 국가보훈처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위키백과>
'이 풍진 세상에 > 역사 공부 「오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늘] 박정희 정권, 「오적(五賊)」필화사건…<사상계> 폐간 조치 (8) | 2024.09.28 |
---|---|
[오늘] 레이철 카슨, 명저 <침묵의 봄> 출간하다 (10) | 2024.09.27 |
[순국] ‘경술국적 이완용 처단 미수’ 이재명 의사 순국하다 (8) | 2024.09.13 |
[오늘] 대종교 개조(開祖) 나철 순교·순국 (8) | 2024.09.12 |
[오늘] 부관연락선 이키마루[일기환(壹岐丸)], 한국과 일본을 잇다 (9) | 2024.09.1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