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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역사 공부 「오늘」

[오늘] 대종교 개조(開祖) 나철 순교·순국

by 낮달2018 2023.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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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공부 ‘오늘’] 1916년 9월 12일, 대종교 개조 나철 자결 순교·순국

▲ 1909년 대종교를 창시한 초대 종사 홍암 나철(1863~1916) 선생.

1916년 9월 12일은 대종교(大倧敎) 창시자 홍암(弘巖) 나철(羅喆, 1863~1916)이 순교, 순국한 날이다. 이틀 전 시봉자(侍奉者) 6명을 대동하고 구월산 삼성사(三聖祠)에 들어가 수행을 시작한 그는 이날,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9월 10일, 사당 앞 언덕에 올라 북으로는 백두산, 남으로는 선조의 묘소를 향해 참배한 뒤 그는 “오늘 3시부터 3일 동안 단식 수도하니 누구라도 문을 열지 말라.”고 문 앞에 써 붙인 뒤 수도에 들어갔다. 12일 새벽, 인기척이 없어 제자들이 문을 뜯고 들어가니, 그는 죽음을 택한 이유를 밝힌 유서를 남기고 조식법(調息法)으로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나철이 1909년 민족 종교 대종교를 연 이래 교세를 확장해 온 데 대해 당황한 일제는 1915년 종교 통제안을 공포하고 대종교를 불법화하였다. 교단의 존폐 위기에 처한 홍암은 이듬해 일제의 폭정을 통탄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한 것이었다.

 

대종교 창시, 독립운동가 나철

 

나철은 한국사 교과서에 잠깐 등장하는 낯선 이름이다. 그가 대종교 창시자로서보다 독립운동가로 더 많이 알려진 것은 그가 구국운동의 하나로 민족 종교 운동에 주력했기 때문이다. 대종교는 만주 무장독립운동에서 숱한 지도자들을 배출함으로써 항일 무장독립투쟁의 구심점이었다.

 

대종교 초대 종사인 나철은 1907년 을사오적 처단 의거를 주도하여 국권 회복의 의지를 내외에 천명했고, 여러 차례 일본을 드나들며 항일 외교 활동을 펼쳤다. 또 2대 종사 김교헌이 참여한 한국 최초의 독립선언서인 ‘무오독립선언’(1919)은 일본 동경 유학생에 의해 선언된 2·8독립선언과 국내에서 발표된 3·1독립선언의 원동력이 되었다.

 

임정의 국무령과 주석을 지낸 신흥무관학교 초대 교장 이동녕(1869~1940)을 비롯하여 임정 국무령 이상룡(1858~1932), 서로군정서의 김동삼(1878~1937), 대한독립군의 홍범도(1868~1943), 북로군정서의 김좌진(1889~1930), 이범석(1900~1972) 등이 그들이다. ‘청산리 독립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북로군정서는 서일(徐一, 1881~1921)을 총재로 대종교인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관련 글 : 대한독립군단 총재 서일, 자결 순국하다]

▲ 만주에서 활약한 대종교인들. 이들은 주로 무장투쟁에 힘을 보탰다.

홍암 나철은 전남 보성 사람이다. 본명은 나두영(羅斗永)·나인영(羅寅永), 본관은 나주다. 29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으나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하자 물러났다. 1904년, 호남 출신의 뜻있는 선비들과 유신회(維新會)라는 비밀단체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시작했다.

 

을사늑약 체결 직전인 1905년 6월, 오기호, 이기, 홍필주 등과 함께 일본에 건너간 그는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한·일·청 삼국은 상호 친선동맹을 맺고 한국에 대해서는 선린의 교의로써 부조(扶助)하라.”고 하는 의견서를 일본 정치인들에게 제시하였으나 응답이 없자 일본 궁성 앞에서 사흘 동안 단식하기도 했다.

▲ 전남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마을에 있는 나철 선생의 생가. ⓒ 독립기념관

그즈음,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조선과 새로운 협약을 체결한다는 소식이 보도되자, 나라 안에 있는 매국노들을 모두 제거해야 국정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단도 두 자루를 사서 품에 넣고 귀국하였다.

 

1909년, 대종교 창시

 

▲ 대종교 교조 단군한배검 ⓒ 누리집

1906년, 다시 한번 일본의 반성을 촉구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당시 이토 히로부미와 대립 관계에 있던 오카모토(岡本柳三助)·도야마(頭山滿) 등을 만나 협조를 구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귀국길에 폭탄이 장치된 선물상자를 구하여 을사오적을 살해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07년 1월부터 암살 계획을 구체적으로 추진하여 3월 25일을 거사 일로 정하고 오적의 주살(誅殺)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서창보 등이 붙잡히고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자, 동지들의 고문을 덜어 주기 위해 오기호, 최인식 등과 함께 자수하여 10년의 유배형을 받았다.

 

고종의 특사로 풀려나서 1908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구국의 길을 모색했지만, 소득 없이 돌아와야 했다. 교단에 전하는 이야기로 일본을 두 차례 다녀오는 과정에서 그는 도인으로부터 책(<삼일신고(三一神誥)>와 <신사기(神事記)>)을 받고 단군교 포교의 사명을 받았다고 한다. (*대종교(大倧敎)는 ‘큰 종교’가 아니라 ‘상고(上古) 신인(神人=단군)의 종교’라는 뜻이다.)

 

1909년 1월 15일, 나철은 오기호, 강우, 유근, 정훈모, 이기, 김인식, 김춘식 등 동지들과 함께 서울 재동에서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제천의식을 거행한 뒤 ‘국수망이도가존’(國雖亡而道可存, 나라는 망했으나 정신은 존재한다)며 단군교를 공표하였다. 이날이 바로 ‘중광절(重光節)’이다.

▲ 천안 목천 평화공원에 있는 홍암 나철 선생의 동상. ⓒ 서울역사 편찬원

초대 교주에 취임하여 5대 종지를 공포하였다. 시교(始敎)한 지 1년 만인 1910년, 대종교(大倧敎)로 교명을 개칭하는 한편, 같은 해 일제의 박해를 피해 만주 화룡현 청파호(靑波湖)에 교당과 지사(支司)를 설치하였다가, 1914년에는 대종교 본사를 이곳으로 옮겨 포교 영역을 만주 일대까지 넓혔다.

 

독립운동에 대거 참여한 대종교인들

 

이 무렵 교세가 일어나 신도가 2만여 명으로 확대되었고, 서일을 비롯한 대종교인들이 독립운동에 대거 뛰어들었다. 이에 당황한 일제는 1915년 종교 통제안을 공포하고 대종교를 불법화하였다. 이 교단 존폐의 갈림길에 나철은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로 들어간 것이었다.

▲ 대종교 삼종사의 묘. 왼쪽부터 서일, 나철, 김교헌의 묘. 중국 길림성 화룡시에 있다.

그는 한배검(단군)에게 제천의식을 올린 뒤 순명삼조(殉命三條, 한배님께 제천하고, 대종교를 위하고, 한배님을 위하고, 인류를 위해 목숨을 끊는다는 내용의 유서)와 일본 총리와 조선 총독에게 한국 침탈과 대종교 탄압의 불의를 각성하라는 내용의 유훈을 남기고 자결했다. 그는 대종교 수양법의 하나인 조식법(調息法- 호흡을 멈추는 방법)으로 목숨을 끊었는데 5년 후, 대종교 종사이자 북로군정서 총재였던 서일이 같은 방식으로 자진 순국하였다. [관련 글 : 청산리 전투의 주역 대한독립군단 총재 서일, 자결 순국하다]

 

일제 치하의 강산에 묻힐 수 없고, 옛 조상의 터전에 묻히겠다는 유언에 따라 유해는 백두산록 청파호 언덕에 봉안되었다. 대종교에서는 그가 운명한 날을 가경절(嘉慶節)이라 하여 사대경절(四大慶節)의 하나로 기념하고 있다. 민족 종교를 창시하여 구국운동에 참여한 홍암의 업적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2대 종사 김교헌과 서일 종사

2세 교주 김교헌(金敎獻, 1868~1923)이 조직한 비밀결사 중광단(重光團)은 뒷날 무장독립운동단체인 북로군정서로 발전하여 청산리전투(1920)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일제의 보복으로 이루어진 이듬해 ‘경신참변’에 수많은 대종교인이 무차별 학살되었다.

 

3세 교주 윤세복(尹世復, 1881~1960)은 총본사를 발해의 옛 도읍 터였던 동경성으로 이전하여 중흥을 꾀하다가 1942년 윤세복 외 20명의 간부가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한 단체구성’이란 죄목으로 일경에 검거(임오교변)되어 고문으로 사망하거나 옥사하였다.

 

감옥서 순국한 두 아들도 건국훈장 추서

 

이때, 나철의 장남 정련(1882~1943)과 차남 정문(1892~1944)이 일제의 혹독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각각 옥사 순국하였다. 이에 두 사람의 공적을 기려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각각 추서하였다.

▲ 전남 보성군 벌교읍에 있는 홍암 나철 선생 초혼비. 왼쪽은 천부경 비문이다. ⓒ 국가보훈처
▲ 지난해 순국 100돌을 맞아 보성군이 건립한 홍암 나철 기념관. 생가 부근에 있다. ⓒ 워크뷰

대종교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계속되어 1932년 만주국 설립과 함께 대종교도 지하로 숨어야 했다. 그러나 광복까지 대종교 시교당의 수는 줄기는커녕 늘어났다. 대종교의 포교 활동은 곧 독립운동의 일환이었으므로 교세 확장은 바로 독립운동의 확대였기 때문이다. 종교로 출발했지만, 대종교가 항일독립운동에 더 많은 공헌을 했다고 하는 이유다.

 

 

대종교는 광복 이후, 급격하게 교세가 위축되었다. 불교와 천주교, 개신교 등에 밀렸고 같은 구한말 민족 종교인 원불교나 천도교보다 교세가 약하다. 원불교(8만4천)나 천도교(6만6천)가 5만이 넘지만, 대종교는 1만에 되지 않는 3천 명(2015) 수준인 것이다.

 

그나마 우리가 대종교를 기억하는 것은 나철을 비롯한 독립운동사에 이름을 남긴 대종교인들 덕분이다. 지난해 홍암의 순국 100주년을 맞아 전남 보성군에서 벌교읍 칠동리 금곡마을 나철 선생 생가 옆에 홍암 나철 기념관을 건립한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017. 9. 11. 낮달

 

 

* 참고

· 대종교 누리집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위키백과>

· 서울의 소리, 독립투쟁의 아버지대종교 홍암 나철 서거 100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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