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공부 ‘오늘’] 1962년 1월 26일, 덕혜옹주 38년 만의 환국
1962년 1월 26일, 소학교 5학년이던 1925년에 볼모로 일본에 끌려갔던 고종의 외동딸 덕혜옹주(1912~1989)가 38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외로움과 향수 때문에 조발성 치매증을 앓던 이덕혜는 대마도(對馬島) 번주(藩主)의 아들 소 다케시(宗武志)와 강제 결혼했다가 이혼당한 뒤에야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마지막 황녀, 38년 만에 귀국하다
나라를 잃은 왕족들의 삶은 그들 조국의 운명처럼 파란만장했다. 이들의 삶 앞에 ‘비운’이라는 형용이 관습적으로 쓰이는 이유다. 제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지만, 고종(1852~1919)은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강제퇴위 당했고, 그 아들 순종(1874~1926)은 경술국치 이후 ‘창덕궁(昌德宮) 이왕(李王)’으로 전락했다.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 1897~1970)은 이토 히로부미에게 끌려 일본으로 가 일본인으로 살았다. 그는 일본군의 장교가 되어 중장까지 올랐으나 패전 뒤에 예편되었고, 1947년 일본의 헌법이 시행되면서 일본 왕족의 지위와 국적도 잃었다. 그가 국적을 회복하고 고국으로 돌아온 것은 1962년이었다. (관련 기사 : 이토 히로부미에 끌려간 ‘마지막 황태자’의 삶)
덕혜옹주는 회갑을 맞은 고종과 궁녀인 양(梁)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서녀(庶女) 소생이라 옹주(翁主)인 그의 호는 덕혜(德惠). 덕혜를 낳고 양씨는 복녕당(福寧堂) 당호를 받고 귀인이 되었다. 딸 넷을 얻었으나 갓난애 때 모두 여의어서 고종의고명딸이 된 덕혜는 나이 많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서녀라는 이유로 총독부로부터 왕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던 덕혜가 정식으로 황적(皇籍)에 입적한 것은 여섯 살 때인 1917년이었다. 고종은 어린 딸이, 일본에 강제로 끌려가 일본인과 혼인하게 된 왕세자 이은처럼 되는 걸 원하지 않았다.
열세 살에 강제 유학, 일본인과의 원치 않은 결혼도
고종은 1919년, 딸을 일본인에게 시집보내지 않으려고 황실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과 덕혜의 약혼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고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를 여읜 덕혜에게 오라버니인 이은이 걸었던 길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준명당(浚眀堂)에 개설한 유치원을 거쳐 덕혜는 1921년 경성 거주 일본인 거류민단이 자녀들을 교육하기 위해 세운 소학교인 히노데(日出)소학교에 입학했다. ‘복녕당 아기씨’로 불리던 그는 조선인 고관 자제도 다니던 이 학교에 적을 두면서 ‘덕혜’라는 호를 내려받았다.
모든 수업이 일본어로 진행된 히노데 소학교에서 공부한 덕혜는 일본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총명하여 공부를 잘했고 특히 습자에 능하였다고 한다. 1925년 3월, 소학교 5학년, 열세 살이 된 덕혜는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해야 한다’는 일제의 요구에 따라 강제유학길에 오른다.
경성에서 열차를 타고 부산을 거쳐 배편으로 시모노세키(下關)까지 갔으며 열차로 도쿄에 닿았다. 도쿄에 도착하자 영친왕 이은의 처인 올케 마사코(이방자)가 마중을 나왔다. 덕혜는 아오야마(青山)에 있는 여자 가쿠슈인(学習院)원을 다녔는데, 늘 말이 없었고 급우들과 어울리지도 못했다.
1926년 순종이 위독해져 오라버니 이은과 함께 귀국하였는데, 4월 25일 순종이 승하하자 국장에 참석하지 못하고 다시 일본으로 떠났다. 덕혜의 국장 참례를 허락하지 않았던 일제는 이듬해 1주기 때에야 참석을 허락했다.
1929년 5월, 생모 귀인 양씨가 영면하자 덕혜는 귀국하였으나 이번에도 복상(服喪)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그에게 몽유증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한 게 1930년 봄, 열여덟 살부터였다. 영친왕 이은의 거처로 옮겨 치료를 받았는데 조발성 치매증(조현증)이라는 진단이 나왔고, 이듬해엔 병세가 호전되었다.
1931년, 덕혜는 쓰시마섬(對馬島) 번주(藩主)의 아들인 소 다케시(宗武志) 백작과 강제 결혼해 이듬해 딸 마사에(정혜 正惠)를 낳았다. 결혼 후에도 이어진 지병이 남편과 주변의 간호에도 호전되지 않자, 1946년 마츠자와(松澤) 도립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
조현병, 딸의 실종, 이혼으로 이어진 기구한 삶
악화한 병세가 호전되지 않자 1955년, 소 다케시는 영친왕 부부와 협의 후에 덕혜와 이혼하였다. 덕혜옹주는 호적에 어머니의 성씨인 양(梁)과 봉호(封號)인 덕혜를 조합한 ‘양덕혜’(梁德惠)로 일가(一家)를 창립하였다. 이후 15년 동안 덕혜는 마츠자와 병원에서 지냈다.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한 뒤, 1947년 일본의 헌법이 시행되면서 영친왕 이은과 마찬가지로 덕혜도 일본 왕족의 지위와 국적을 잃었다. 평민이 되어 자금 지원이 끊어져 생계와 치료에 곤란을 겪게 되자 영친왕이 그의 입원비를 부담하였다. 1956년 8월, 유일한 혈육인 마사에가 이혼한 뒤, 산에서 자살하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남알프스 산악지대에서 실종되었다.
그것은 덕혜가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부정당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강제로 유학길에 올랐고 원치 않은 혼인을 해야 했다. 혈육마저 죽겠다고 나가 실종되었으니 그는 완벽하게 홀로 남겨진 셈이었다. 어려서 고국을 떠나야 했던 그가 빠질 수밖에 없었던 향수병이 정신질환인 조발성(早發性) 치매증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그는 결혼 당시부터 완전한 실어증 증상을 보였으며 조현병도 이미 깊어져 있었다.
덕혜옹주가 고국으로 돌아오는 일도 순조롭지 않았다. 당시 이승만 정부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우려하여 귀국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귀국을 도왔다. 미국 방문 도중 일본에 들른 그는 영친왕 부인인 이방자(1901~1989)를 면담하고 이듬해 덕혜옹주의 귀국을 허락한 것이었다.
고종의 외동딸 덕혜옹주는 1962년 1월 26일에 38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귀국 직후부터 5년 동안 서울대학교 병원에 입원해 생활했고 그 후 창경궁 낙선재와 이어져 있는 수강재(壽康齋)에 들었다. 그가 국내에 호적을 만든 것은 귀국한 지 20년이 지난 1982년이었다.
실어증과 지병인 조현병과 싸우다 덕혜옹주는 1989년 4월 21일 낙선재에서 파란 많았던 삶을 뒤로하고 눈을 감았다. 향년 76세. 대한제국이 사라진 지 79년, 마지막 황녀의 죽음을 눈여겨본 국민은 아무도 없었다. 1963년에 환국하여 1970년에 세상을 떠난 오라버니 영친왕 이은이 마지막 황태자로 다시 한번 여론에 소환되었을 뿐이었다.
덕혜옹주는 오라버니 이은이 잠든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홍유릉(洪裕陵)에 묻혔다. 아흐레 뒤(4월 30일)에 낙선재에서는 올케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 이방자)가 극적인 생애를 마감했다. 대한제국의 명목상 황족 중 의민태자비 이방자가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마침내 ‘잊힌 제국’의 시대는 종언을 고했다.
대한제국의 왕족에게는 망국에 대한 정치적·도의적 책임을 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덕혜옹주는 열세 살 때 강제 유학길에 올라 원치 않은 혼인에, 자식과 남편을 잃고 평생을 병마와 싸우다 고통 속에서 눈을 감았다. 그는 왕족으로서 영화를 누리기보다 여성으로서의 평범한 삶조차 빼앗겼다.
덕혜옹주의 ‘빼앗긴 삶’
그의 삶은 ‘비운’이라는 형용으로도 마저 설명할 수 없는 간난(艱難)의 삶이었다. 덕혜옹주의 삶이 연극(<덕혜옹주>, 1995), TV 특집극(<비운의 황녀 덕혜>, 2008), 창작 뮤지컬(<덕혜옹주>, 2013), 영화(<덕혜옹주>, 2016) 등으로 재현·변주된 것은 그의 생애를 관통한 극적 서사 때문이었다.
그것은 식민지로 전락한 전제국가의 왕족이 감당해야 할 모든 열패의 삶을 뭉뚱그려 놓은 것과 같았다. 왕족들은 남녀 불문하고 식민 종주국의 왕족과의 정략결혼을 강제당했다. 남자는 영친왕 이은처럼 빼앗은 종주국 군대의 군인이 되어 일왕에게 충성해야 했다.
일본인과 강제로, 원치 않은 혼인을 하고 관습에 따라 남편의 성을 따라야 했던 것은 덕혜에게 더할 수 없는 치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의 삶에서 한번도 주체로 살지 못한 여인이었다. 망국이 인간으로서, 여성으로서, 어머니로서 그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아 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2019. 1. 2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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