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공부 ‘오늘’] 1919년 2월 8일, 동경유학생들 ‘조선 청년 독립선언’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의 해지만, 100돌을 맞이하는 게 3·1운동만은 아니다. 기미독립선언 한 달 전에 동경에서 선포된 2·8독립선언과, 한 달쯤 뒤인 4월 11일에 중국 상하이에서 이루어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도 역시 100주년을 맞는다. 3·1운동은 2·8독립선언의 영향을 받아 거족적인 민족운동으로 발전했고, 이는 다시 망명지 상하이에서의 임정 수립으로 이어졌다.
동경유학생들, '조선청년독립단'의 이름으로 '독립선언'
동경유학생인 와세다(早稻田)대학의 최팔용(崔八鏞) 등이 조직한 조선청년독립단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서'가 발표된 것은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도쿄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였다. 이날 열린 조선 유학생대회에서 400여 회원이 환호하는 가운데 발표된 독립선언에는 실행위원 11명이 대표자로 이름을 올렸다.
당시 식민지 조선 청년들은 식민지배 종주국이 먼저 받아들인 문명과 개화를 배우러 일본으로 가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이미 대한제국 말기부터 유학생들은 대한흥학회(大韓興學會)를 조직하고 학회지 <대한흥학보>를 펴내 국내에 배포하는 등으로 애국 개화운동에 참여했다.
이들은 경술국치(1910) 이후 조선유학생학우회·조선기독교청년회·조선학회·조선여자친목회 등 자치단체를 조직하여 상호 간에 민족적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또 선진문물을 남 먼저 배우고 익힌 지식인으로서 조국과 민중에 대해 봉사하고 헌신해야 한다는 의무감도 부채처럼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이들의 자치조직 가운데 1912년 10월 조직된 조선유학생학우회는 동경유학생 전원이 자동 가입하는 단체였다. 이 모임은 회지 <학지광(學之光)>을 펴내는 한편, 웅변·토론·강연·졸업생축하회·신입생환영회 등 각종 교양과 친목 모임을 통해 결속을 다지고 있었다. 이들이 학업을 계속하면서 조국 독립과 관련된 세계정세를 챙겨보고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들은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1914)할 때부터 조국 독립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결정적으로 미국의 우드로 윌슨(T.W.Wilson) 대통령이 발표한 평화원칙 14조와 1차대전 휴전조약(베르사유조약)에 직접적인 자극을 받았다.
윌슨의 평화원칙은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했고, 1918년 11월 베르사유에서 체결된 휴전조약은 국제연맹에 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르사유조약에서 국제연맹에 관한 부분은 윌슨이 구상한, '국제법으로 조절되는 열린 외교'를 계승하고 있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다
1918년 1월 8일 우드로 윌슨이 의회에 보낸 연두교서의 '평화원칙 14개 조'에서 제시된 이른바 '민족자결주의'는 "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외부의 간섭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천명한 것이었다. 이듬해(1919) 윌슨에게 노벨 평화상을 안겨준 이 14개 원칙 가운데 문제의 조항은 다음과 같았다.
5. 식민지에서 주권과 같은 문제를 결정함에 있어, 당사자인 주민들의 이해는 법적 권리의 결정을 기다리는 정부의 정당한 청구와 동등한 중요성을 가져야 한다. 이 원칙을 엄격히 준수하는 기반 위에서 모든 식민지 문제는 자유롭고 열린 자세로, 절대적으로 공평하게 조정해야 한다.
실제 당시 국제정세에 어떻게 적용될 것인가 하는 문제와 무관하게 '민족자결주의'는 전 세계의 숱한 피압박 민족에게 독립의 희망을 불어넣었다. 그것은 한국에서 3·1운동으로, 중국에서는 5·4운동, 인도에서는 마하트마 간디가 이끄는 저항 운동으로 이어졌다.
유학생들을 고무한 것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물론이거니와 그로부터 촉발된 독립운동과 관련된 움직임과 우호적인 주변 정세였다. 이들은 재미교포들이 독립운동에 대한 미국의 원조를 요청하는 청원서를 미국 정부에 제출하였다는 <저팬 애드버타이저(The Japan Advertizer)>의 보도기사에 환호했다.
그 보도는 고베(神戶)에서 영국인이 펴내는 영자지 <저팬 애드버타이저> 1918년 12월 15일 자에 실린 "한국인, 독립을 주장(Korea, Agitate for Independence)"이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사흘 후인 12월 18일 자 "약소민족들 발언권 인정을 요구"라는 제목의 기사도 이들을 고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기사는 뉴욕에서 열린 세계약소민족동맹회의 2차 연례총회에서 파리강화회의와 국제연맹에서 약소민족의 발언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보도였다.
자력으로는 털끝만한 것도 바꿀 수 없는 식민지 현실에서 이 기사들이 유학생들을 얼마나 고무했는가는 미루어 짐작할 일이었다. 유학생들은 1919년 1월 6일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웅변회를 열었다. 이들은 "현 정세가 독립운동을 펴는 데 가장 적당한 시기라는 것과 이미 실행에 들어간 재외동포들과 발맞추어 구체적인 운동을 개시하여야 한다"고 결의했다.
유학생들은 실행위원으로 최팔용(와세다대학 3)·서춘(동경고등사범학교 3)·백관수(정칙영어학교)·이종근(동양대학)·송계백(와세다)·김도연(게이오대학) 등 10명을 선출하였다. 이들은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일본 정부와 각국 대사·공사, 그리고 일본 귀족원·중의원에 보내기로 결의하였고, 다음날 이를 회원들에게 보고하고 만장일치로 동의받았다.
나중에 실행위원에 베이징에서 서울을 거쳐 도쿄로 온 이광수와 김철수(동경제대)가 추가되었는데 이들 11명의 실행위원은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독립선언서를 기초하였다. 기초위원으로 백관수·김도연·이광수 등이 선임되었으나, 실제 문안작성은 이광수가 전담하였다고 한다.
완성된 선언서 초안 한 부는 송계백과 최근우에 의해 국내로 전해져, 이를 받아본 송진우와 최남선 등을 잔뜩 흥분케 했다. 최팔용은 2월 7일, 도쿄의 인쇄소에서 일문으로 된 '민족대회 소집 청원서' 1천 부를 인쇄했다. 선언서에 붙인 국문·일문·영문으로 작성한 '결의문'은 등사판으로 밀고 타자로 직접 쳤다.
이튿날 실행위원들은 준비된 청원서와 선언서를 도쿄 주재 각국 대사관·공사관과 일본 정부 대신들, 일본 귀족원·중의원, 조선 총독과 각 신문사로 우송했다. 이날 오후 2시에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유학생대회에서 2·8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이는 백관수였다.
'2·8독립선언서'는 일제의 침략 과정을 역사적으로 설명하면서 병합이 '민족의 의사'가 아니라 '사기와 폭력'으로 이루어짐을 지적하면서 이를 규탄하였다. 또 일제가 '무력과 억압을 사용한 국가 장악과 부정하고 불평등한 정치'로 민족의 '생존과 발전'을 방해하기 때문에 '생존의 권리를 위하여 독립을 주장'한다고 역설했다. 선언서는 "일본이 만일 우리 겨레의 정당한 요구에 불응한다면 우리 겨레는 일본에 대하여 영원한 혈전을 선언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표명하면서 마무리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2·8독립선언서'가 '3·1독립선언서'보다 두 가지 점에서 남다른 의미가 있다고 서술한다. 첫째는 최남선이 3·1독립선언서를 기초할 때 참고한 문서였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의도적으로 온건하게 서술된 3·1독립선언서에 비교해 '영원한 혈전'을 내세울 만큼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는 점이었다.
'2·8독립선언서'의 결의문은 제1항에서 독립을 주장하고 제2항에서 우리 민족의 운명을 결정할 기회를 달라고 요구하고, 3항에서는 만국평화회의 민족자결주의를 우리 민족에게 적용하기를 요구한 다음 마지막 제4항에서 다음과 같이 천명한다.
4. 전(前) 제항(諸項)의 요구가 실패될 시에는 일본에 대하야 영원히 혈전(血戰)을 선(宣)함. 차(此)로써 발생하는 참화는 오족(吾族)이 기책(其責)을 임(任)치 아니함.
2·8독립선언이 굳이 '피의 전쟁[혈전(血戰)]을 언급하면서 강경한 태도로 일관한 것은 "무단통치하에 신음하는 2000만 민족의 고통과 강렬한 독립요구를 한층 절실하게 표명한 것"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무오독립선언과 함께 도쿄에서의 2·8독립선언은 국내에서의 3·1운동의 '마중물' 노릇을 톡톡이 했다. 1918년 말부터 손병희 등 천도교 측이 대중화·일원화·비폭력 등 독립운동의 3대 원칙에 따라 구상해 온 독립선언이 구체화되고 확대되어 거족적인 저항으로 발전한 3·1운동은 그런 뜻에서 국외에서의 투쟁을 수렴한 셈이었다.
11명 중 일곱 분은 서훈, 이광수·서춘은 변절해 친일부역
2·8독립선언을 주도한 실행위원들은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워낙 지명도가 높은 데다가 선언을 기초해 가장 많이 알려진 이가 이광수다. 그러나 그는 뒷날 변절하여 민족을 등진 친일 부역자로 남았다.
실행위원 11명 가운데 1월에 중국으로 돌아간 이광수와 국내로 선언문을 전달하러 귀국해 형을 면한 최근우를 제외한 나머지 9인은 금고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최팔용과 선언문을 낭독한 백관수가 1년, 김도연과 김철수, 서춘, 윤창석이 9개월, 이종근, 송계백, 김상덕이 7개월 15일을 선고받았다.
최팔용(1891~1922, 1962년 독립장)은 복역 후 귀국해 일경의 감시 속에서 생활하다가 3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송계백(1896~1920, 1962년 독립장)은 복역 중 순국했다. 백관수(1889~1961)는 뒷날 동아일보사 사장을 지냈다.
이종근(1895~1975)과 김도연(1894~1967)은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는데, 김도연은 뒤에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2년간 옥고를 치렀고 광복 후에는 정계에 투신했다. 김철수(1896~1977, 1990년 애국장)는 복역 후 재일유학생들의 독립운동과 물산장려 운동을 주도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김상덕(1891~1956, 1990년 독립장)은 임정에서 활동하다가 광복 후 제헌 의원이 되어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윤창석(1889~1966)은 1991년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최근우(?~?)는 임정의 의정원의원을 역임했고, 광복 후 건국준비위원회에서 활동하다 월북했다.
서춘(1894~1944)은 중일전쟁 이후 일제에 협력하기 시작하여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주필을 지냈다. 1963년 서훈을 받았으나 1996년 친일 행적이 알려져 서훈이 취소되고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었던 유해도 이장해야 했다. 그는 이광수와 함께 <친일인명사전>에도 이름을 올렸다.
1세기가 지나도 조국 독립을 위해 나선 젊은이들의 선택과 그 실천을 기록한 역사는 엄중하다. 한갓진 기림으로 형용할 수도, 누적된 시간으로도 묻힐 수 없는 젊은이들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은 100년을 넘었는데도 그날처럼 붉게 빛나고 있는 것이다.
2019. 2. 8. 낮달
참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 공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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