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역사 공부 「오늘」

[오늘] ‘지구가 돈다’, 코페르니쿠스 태어나다

by 낮달2018 2024. 2. 19.
728x90

[역사 공부 ‘오늘’] 1473년 2월 19일-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의 출생

▲지구중심설, 즉 천동설을 체계화한 프톨레마이오스가 파악한 세계 지형을 그린 15세기의 지도.

2월 19일은 1473년, 폴란드 출신 독일의 천문학자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가 태어난 날이다. 코페르니쿠스는 중세 교회가 지지해 온 세계관 ‘천동설’을 부정하고 지동설을 주장함으로써 근대 자연과학의 획기적인 전환을 끌어낸 학자다.

 

그 무렵 유럽에서는 모든 천체가 지구 주위를 돈다는 지구중심설, 즉 ‘천동설(天動說)이 유일하게 공인된 세계관이었다. 일찍이 2세기에 클라우디우스 프톨레마이오스(Claudius Ptolemaios)에 의해 체계화된 천동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인간은 그 위에 사는 존엄한 존재이며 달 위의 천상계는 영원한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중세의 우주관이었다.

 

코페르니쿠스, ‘천동설’에서 지구와 태양의 위치를 바꾸다

 

▲유골로 복원 코페르니쿠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는 ‘지구와 태양의 위치를 바꿈’으로써 지구가 더는 우주의 중심이 아님을 천명했는데, 이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 체계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었다.

 

이는 또 한편으로 중세의 우주관을 폐기하는 결과를 가져온 발상의 전환이기도 했다. 이 인간 중심의 지구중심설에서 객관적인 입장의 태양중심설로 바뀌는 발상의 전환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이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1510년에 태양 중심 천문체계의 기본적인 틀을 완성한 뒤 <짧은 해설서Commentariolus>라는 요약본 형태의 원고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1543년,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를 발표, 우주와 지구는 모두 구형이며 천체가 원운동을 하는 것처럼 지구도 원운동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총 6권으로 이루어진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에서 지동설에 관한 철학·사상 부분은 모두 1권에 서술되어 있다. 코페르니쿠스가 주장한 태양중심설은 현재 태양계의 구조와는 차이가 있었다. 그것은 프톨레마이오스의 구조와 비슷하되 우주의 중심에 있던 지구와 달의 위치를 태양과 바꾸어서, 태양이 우주의 중심에 오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은 당시의 주류 세계관이었던 천동설을 반박하는 것이었고 이는 전통적인 교회의 입장과는 다른 것이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자신의 ‘혁명적’인 이론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예상하기 어려웠으므로 출판을 망설였다. 꽤 오랜 기간의 망설임 끝에 책을 출판하였지만, 사흘 뒤 그는 사망했다.

 

그러나 책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은 매우 미약했다. 크게 반발하는 세력이나 열렬한 지지도 물론 없었다. 발행된 초판 400부조차 다 팔리지 않았다. 책의 내용이 전문적이었으므로 당대의 능력 있는 천문학자가 아닌 이상 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암스테르담에서 간행된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제3판의 표지

그런데 책이 출판되기 전부터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코페르니쿠스 모델에 반대하였다. ‘여호와가 그 자리에 서 있으라고 명령했던 것은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라는 말이 성경에 분명 써 있다고 맹비난을 퍼부었다. 책의 출간을 준비하던 루터주의자였던 오시안더(Andreas Osiander)는 책의 내용이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할 것이며 교회와 마찰을 일으킬 것으로 보았다.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허락 없이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는 ‘계산상의 편의를 위한 추상적인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하는 내용의 서문을 추가하기도 하였다.

개신교 신학자들이 코페르니쿠스의 체계에 가장 먼저 반발했던 것과 달리 16세기까지 로마가톨릭은 침묵했다. 그의 이론을 규탄한 쪽은 오히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맹신하고 있던 속세의 교수들이었고 가톨릭계는 오히려 지동설을 하나의 가설로 받아들였다.

 

1세기 뒤 그의 이론을 추종하는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가 종교재판에 부쳐지는 등 박해를 받게 된 것은 본격적으로 근대로 들어서며 종교의 권위가 위협받자 종교가 더욱 보수적 색채를 띠게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대중의 즉각적인 반응은 매우 미약했으나 그의 이론은 시간이 흐를수록 널리 퍼져 나갔다. 1616년에 로마 가톨릭교회의 금서목록에 오르기도 하였으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는 후대에 이르러 천문학과 물리학이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고 이어진 과학혁명의 불씨가 되었다.

 

2천 년 오류 잡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많은 역사가는 코페르니쿠스의 이 책이 출판된 1543년을 과학혁명의 원년으로 이해한다. 코페르니쿠스는 프톨레마이오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 사로잡혀 있던 2천 년의 오류를 바로잡았다는 점에서 과학혁명의 중간적 존재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많은 학자가 그가 제시한 지동설에 찬사를 바치는 이유다. 독일의 문호 괴테와 과학사가 토머스 쿤(Thomas Samuel Kuhn, 1922~1996)의 언급도 다르지 않다.

 

“지구는 우주의 중심점이라는 엄청난 특권을 포기해야 했다. 이제 인간은 엄청난 위기에 봉착했다. 낙원으로의 복귀, 종교적 믿음에 대한 확신, 거룩함, 죄 없는 세상, 이런 것들이 모두 일장춘몽으로 끝날 위기에 놓인 것이다. 새로운 우주관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상 유례가 없는 사고의 자유과 감성의 위대함을 일깨워야 하는 일이다.”
   - 괴테(Goethe), 지동설의 부각에 대한 언급 중에서

“태양중심설은 지구와 그곳에 사는 인간의 우주적 의미를 보잘것없는 차원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 인간은 정말로 신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존재인가에 대한 의문을 자아내게 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는 서양 중세의 우주관, 인간관, 세계관의 뿌리를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이는 인간중심주의 파산의 발단이 되었다.”
   - 토머스 쿤

 

기존의 관념을 뒤집는 혁명적인 생각의 전환은 2천 년 연면하게 이어져 왔던 천동설의 세계를 무너뜨리고 더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인식 가능한 세계를 사람들 앞에 펼쳐주었다. 그리고 거기 기초해 인류의 도전도 더 가속화될 수 있었다. 이어지는 역사의 전개도 이 새로운 세계관에 힘입은 바 컸음을 더 말할 나위가 없다.

 

2010년 5월에 그의 장례식이 사후 거의 500년 만에 폴란드에서 다시 치러졌다. 폴란드 국민과 고위성직자들은 그를 국민적 영웅으로 기렸다. 이 해에 합성 원소 우눈븀의 공식 명칭이 그의 이름을 따라 코페르니슘(copernicium, 원소기호 Cn)으로 명명되었다.

 

 

2016. 2. 18. 낮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