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공부 ‘오늘’] 1994년 2월 13일, 시인 김남주 지다
1994년 오늘(2월 13일), 자신을 ‘전사’라고 자칭했던 시인 김남주(金南柱, 1946~1994)가 파란 많은 저항의 삶을 마감했다. 이날 새벽 2시 30분, 그는 서울시 종로구 평동의 고려병원에서 췌장암으로 쓰러졌다. 9년 3개월간 복역하고 출옥해 온전히 여섯 해를 채 살지 못하고서였다. 향년 48세.
해남의 산골에서 태어나 이른바 지역 명문 광주제일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김남주는 이듬해 입시 위주의 획일적인 교육에 반대하여 스스로 학교를 떠났다. 부모의 요구를 관행적으로 따르는 여느 고교생의 삶과는 일찌감치 작별한 셈인데, 그것은 그가 선택한 반골의 삶을 예고한 것인지도 모른다.
저항과 투쟁의 삶, 그는 전사이고 싶어 했다
검정고시를 거쳐 전남대학교 영어영문학과로 진학한 김남주는 3선 개헌과 유신헌법을 반대하는 학생 운동에 서슴없이 뛰어들었다. 1972년 유신헌법이 선포되자 그는 법대에 재학하던 벗 이강과 함께 유신을 반대하는 신문인 <함성>을 펴냈다.
1973년, 김남주는 이 신문의 제호를 <고발>로 바꾸어 전국에 배포하려다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고 학교에서 제적되었다.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혐의로 8개월간 복역한 후 그는 해남으로 귀향해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1974년 김남주는 ‘진혼가’와 ‘잿더미’ 등 시 7편을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발표하며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광주에 사회과학서점 ‘카프카’를 열었고(1975), 해남농민회를 창립(1977)했고, 황석영·최관행 등 광주지역 활동가들과 민중문화연구소를 개설(1977)하는 등 지역에서 사회 문화운동을 활발히 벌였다.
1978년 수배 중에 김남주는 서울로 가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준비위원회에 가입했다. 이 조직은 당시 경찰이 ‘북괴의 폭력에 의한 적화통일 혁명노선에 따라 대한민국을 전복,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위한 전위대’, ‘북의 지령을 받지 않는 자생적 공산주의 조직’이라고 발표한 단체였다.
이름부터 기존의 민주화운동과 차별적이었던 남민전은 비합법 전위조직이었고 상당 기간 지하에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여기 ‘가담한 사람들은 혁명가로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일에 목숨을 건 사람들’(한홍구, “유신과 오늘” 이하 같음.) 이었다.
남민전의 주된 활동은 전후 8차례에 걸친 유인물의 배포였지만 1979년 4월에는 남민전의 ‘전사’들이 당시 7공자의 맏형으로 불리던 동아그룹 회장 최원석의 집을 털다가 이학영(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체포되는가 하면 예비군 훈련장에서 총기를 분해해서 훔쳐 나오기도 했다.
1979년 남민전 동지들과 함께 체포, 구속된 김남주는 징역 15년이 확정되어 수감되었다. 1984년 첫 시집인 <진혼가(鎭魂歌)>를 펴냈는데 이 시집에는 그가 감옥에서 우유 팩에 날카롭게 간 칫솔대로 눌러 써서 면회객들을 이용해 감옥 밖으로 몰래 내보낸 작품들이 실렸다.
복역 중에도 그의 문학 활동은 계속되었다. 1987에는 제2시집 <나의 칼 나의 피>(인동)와 일어판 시집 <농부의 밤>을 출간했고, 1988년에는 제3시집 <조국은 하나다>를 펴냈다. 그리고 그해 그는 투옥 9년 3개월 만에 형집행정지로 출옥했다.
이듬해 그는 옥바라지한 남민전 동지 박광숙과 결혼하였다. 김남주는 1990년에 민족문학작가회의 민족문학연구소장이 되었으나 1992년 건강 악화로 사퇴한 뒤 췌장암으로 투병하다 1994년 마침내 눈을 감았다. 그의 유해는 광주 망월동 5·18 묘역에 안장되었다.
그는 스스로 ‘시인’ 대신 ‘전사’라고 칭했지만 나는 전사인 그를 잘 알지 못한다. 나는 그를 시인으로 만났다. 내 서가에는 그의 시집 한 권이 외롭게 꽂혀 있다. 출옥 한 해 전인 1987년 도서출판 인동에서 낸 <나의 칼 나의 피> 초판본이다.
그 무렵에만 해도 그의 시에 일관되게 흐르는 강렬하고 전투적인 이미지와 반외세, 분단 극복, 광주항쟁, 노동 문제 등 현실 모순을 갈기갈기 도려내는 그의 직설적인 호흡이 좀 부담스러웠을 성싶다. 그래도 ‘사랑’ 연작과 같은 작품들에 드러나는 따뜻한 서정성이 그런 전투성을 감싸고 있긴 했다.
시인은 가도 노래는 남는다
1990년대 초반에 나는 경북대 대강당에서 열린 집회 ‘시와 노래의 밤’에서 김남주 시인을 먼빛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투쟁하고 싶은 시인 김남줍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하던 그의 허스키한 목소리는 안치환의 노래 앞에 낭송하는 그의 음성 그대로였다.
그의 시는 노래로 만들어져 투쟁의 현장에서 널리 불리었다. ‘죽창가’로 널리 알려진 ‘노래’를 비롯하여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같은 노래는 이미 그 시절의 고전이 되었다. 시인은 가도 노래는 남는 것이다.
1995년에 유고시집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창작과비평사)이 간행되었고 2000년에는 광주 중외공원에 김남주 시비가 세워졌다. 2004년에는 시선집 <꽃 속에 피가 흐른다>(창비) 간행했고 계간 <시와 시학>이 주관하는 ‘영랑시문학상’ 제2회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꼭 30년 전에는 다소 부담스러웠던 그의 시가 이제는 맘에 감겨올 때가 많다. 때로 은유와 상징보다 담백한 직설이 훨씬 사람의 마음에 닿아오기도 하는 것이다. <나의 칼 나의 피>를 읽던 당시 서른한 살의 청년은 어느새 진갑을 앞둔 초로가 되었지만, 그가 맨몸으로 싸웠던 삶과 세상의 모순은 여전하기만 하다.
김남주가 낭송하고 안치환이 부르는 노래 ‘자유’를 들으며 혁명을 이루지 못한 전사 시인 김남주 23주기를 보낸다.
2017. 2. 13.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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