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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어떤 ‘측은지심(惻隱之心)’

by 낮달2018 2020.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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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대통령의 딸에게 보내는 민초들의 ‘연민’

▲ 이 연민에 참여하는 이들의 공통점이다.

맹자가 말한 사단(四端)의 하나로 인(仁)의 본질이라고 하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은 ‘불쌍히 여겨서 언짢아하는 마음’이다. 물에 빠진 아이의 예로 제시한 측은지심은 이성적 판단 이전에 인간이 본능으로 가진 어진 마음이다.

 

그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상대를 불쌍하게 여길 때 말하곤 하는 ‘안됐다’라고 하는 감정과 상통한다. 따라서 ‘측은하다’거나 ‘안됐다’고 하는 감정은 타인이 겪고 있는 어려움과 고통에 대한 일종의 공감인 것이다. 그 공감이 상대에 대한 이해의 기반이 됨은 말할 것도 없다.

 

‘참 안됐고 측은하다’

 

뜬금없이 ‘측은’을 이야기하는 것은 외출에서 돌아온 아내가 툭 던진 한마디 때문이다. 아내가 만난 60대 이웃들이 막다른 골목에 몰린 대통령을 보고 ‘측은하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어이가 없어 듣기만 했어. 어쨌든 ‘측은하다’는 거야. 인터넷에 찧고 까부는 이야기를 다 믿을 수는 없는 거 아니냐며. 하긴 그런 사람보다 욕하는 이들이 더 많기야 했지만…….”
“불쌍하다고? 불쌍한 건 자기 자신 아닌가? 철석같이 믿고 찍어주었는데 발등을 찍히고 말았으니. 아니, 더 불쌍한 건 찍지도 않았는데 그 실정을 고스란히 견뎌내야 했던 국민이고.”

 

‘안됐다’, ‘불쌍하다’는 감정은 그를 지지하는 이쪽 동네 사람들, 특히 5, 60대 이상 여성들의 기본 정서다. 걸핏하면 ‘맘이 짠해서…….’다. 전적으로 부모를 비명에 보낸 그의 개인사를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정치인으로서의 자질과 능력 따위에 대한 고려가 설 자리는 없다.

 

최근의 갤럽 여론조사에 드러난 이들 박근혜 열성 지지자는 14%, 이들은 ‘대구·경북-여성-60대 이상-새누리당 지지-가정주부-생활수준 하-보수 이념’이라는 특징을 지녔다. 표본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런 특징을 갖는 이들은 대통령의 직무수행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가능성이 일반인보다 더 높다고 볼 수 있다. [관련 기사]

▲ 이 부녀의 영욕과 비극은 그들의 불행에 그치지 않고 이 나라와 국민들의 불행으로 확장되었다.

최소한 나이가 60대가 되어야 청소년기에 박정희나 육영수의 존재를 유의미하게 겪었다고 할 수 있다. 박 대통령이 우리 나이로 예순다섯이니 그 어름은 되어야 그가 겪은 가족의 비극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양친의 불행한 죽음을 겪었다. 아버지는 종신 집권을 꿈꾸었던 절대권력이었고 그 어머니는 지아비의 독재 이미지를 중화할 수 있는 자애로운 지어미의 상징이었다. 평생 한 번도 제 손으로 생계를 꾸린 적도, 누군가의 아랫사람이 되어 본 적이 없는 그는 부친이 죽은 뒤 권력의 성채를 비워주고 ‘바깥세상’에 나와야 했다.

 

짠한 마음은 ‘콘크리트 지지’로 이어지고

 

여기부터가 지지자들의 측은지심이 발동되는 지점이다. 천애 고아(?)가 된 독재자의 딸이라는 존재 그 자체가 연민의 대상이 된 것이다. 절대권력이었던 그 부친은 어쨌든 국민을 절대빈곤에서 구해낸 위대한 지도자다. 재임 시절의 독재를 기억하기보다는 내 삶이 윤택해진 게 훨씬 기억에 선명하다.

 

지방자치단체마다 적잖은 예산이 소요되는 박정희 관련 사업에 목을 맬 만큼 이들 유권자의 추억과 회고 정서는 강렬하다. 죽은 권력에 대한 추모를 살아 있는 그 딸자식을 통해 행사하려는 이들 유권자의 회고 정서는 마치 자신이 그 자식의 후견인이나 된 것 같은 착시로 이어진다. 그 ‘짠한 마음’은 꼼짝없이 ‘묻지 마’ 지지로 승화(?)되는 것이다.

 

더구나 박빙의 승부 끝에 그 딸은 부친이 누렸던 자리에 올랐다. 마치 자기 자신이 권력을 얻은 듯한 만족감이 이들을 잔뜩 고무하지 않았을까. 짠한 마음이란 본디 약자를 바라보며 느끼는 감정이다. 권력을 향한 측은지심은 터무니없어야 마땅하다. 그런데도 이 묘한 기분은 마치 내가 그를 다독여 그 자리에 올린 듯한 성취감을 덤으로 준다.

 

“대통령은 외롭고 슬프다.”

 

나는 이 같은 이들의 측은지심이 박근혜에 대한 콘크리트 지지로 이어진 게 아닌가 생각한다. 최근의 최순실 게이트 때문에 지지자 대부분이 떨어져 나갔는데도 아직 지지를 철회하지 않고 있는 이들의 정서란 ‘온 세상이 버렸으니 나라도 지켜 주어야지’인지도 모른다.

 

궁지에 몰린 대통령은, 어정쩡하긴 하지만 여론의 추이에 따르는 자세를 취하면서 비서진 일부를 퇴진시켰다. 그리고 오늘 이 게이트의 뇌관인 최순실이 검찰에 출두한단다. 그러나 ‘최순실 귀국 전후 조직적 증거인멸·짜 맞추기 흔적’이 드러난다는 언론 보도는 이 정국의 향방을 만만찮을 것이라는 걸 예고하고 있다.

 

“외롭고 슬픈 대통령 도와 달라.”

 

퇴진한 정무수석 비서관 김재원이 출입 기자들에게 보냈다는 문자 메시지다. 이 충성스러운 비서관은 나라를 막장으로 몰아넣어 놓고도 제대로 된 사과조차 없는 권력을 ‘외롭고 슬프다’며 지지자들의 정서에 대고 노골적인 호소를 한 것이다. 모른다. 어디서 가련한 만인지상을 위해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올지도.

 

 

2016. 10. 31. 낮달

 


 

그 만인지상은 결국 이듬해 탄핵당해 권좌에서 내려왔고, 지금까지 감옥에 있다. 어깨 수술을 받고 한 민간병원에 입원한 그는 무려 78일 만에 구치소로 되돌아갔다. 하루 수백만 원이 넘는 브이아이피(VIP) 병실을 혼자 쓰며 두 달 넘게 그가 입원해 있을 때, 모락모락 피어오른 사면설도 결국은 측은지심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소설이었던 셈이다.

 

그의 소속정당은 그 유례 없는 국정농단에 대한 사죄 한번 없이 제1야당으로서 국정의 발목을 잡는 일로 지난 시간을 소비했다. 그리고 다시 총선의 해를 맞았다. 그를 ‘누나’라고 불렀다는 한 중진 의원을 울먹이면서 불출마를 선언했고, 외롭고 슬픈 대통령을 도와달라고 읍소했던 정무수석은 무소속으로 수도권에서 출마하기로 했다고 한다.

 

새해 <한겨레>가 시행한 여론조사에서 정당별 지지도는 민주당(39.9%)이 한국당(18.9%)보다 2배쯤 높았는데, 대구 경북에서만 이게 15.1% : 30%로 뒤바뀌었다. 한국당에 대한 지지율은 예전에 비하면 많이 줄긴 했지만, 여전히 살아 있으니, 이는 총선 때에 다시 어떤 방식으로든 터질 가능성이 크다. [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조]

 

그나마 지난 총선에서 대구 경북에서 김부겸, 홍의락 두 의원이 수십 년 만에 당선되었지만, 이들의 생환은 점치기 어렵다는 게 중론인 듯하다. 세상이 변하고 있는데, 여전히 보수 본색의 티케이는 별로 변한 게 없는 것이다.

 

 

2020.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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