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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행복한 책 읽기

게으름뱅이 독자의 ‘책 읽기’

by 낮달2018 2019.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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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멸렬해진 요즘 나의 ‘책 읽기’

▲ 최근에 내가 산 책들.

언제부턴지 모르겠다. 책 읽기가 ‘지리멸렬’해진 게. 들쑥날쑥하긴 하지만 정기적으로 사야 할 책을 정리해 두었다가 일괄 구입 주문을 내는 것은 예와 다름이 없다. 책은 시간은 다투어 택배로 도착한다. 그러나 기다렸던 책을 펴는 순간의 긴장이나 설렘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읽을 날을 위하여 새로 산 책은 따로 서가에다 꽂지 않고 쌓아둔다. 그러나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어느 날부터 그것들은 시나브로 한 권 두 권 서가에 꽂히고 만다. 어쩌다 한번 들쳐지기나 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배달되어 온 모습 그대로 손때 하나 묻지 않은 채 얌전히 서가로 처박히고 마는 책들!

 

지리멸렬해진 ‘책 읽기’

 

세상에 가장 비싼 책은 ‘읽지 않은 책’이라 했던가. 지난 몇 해 동안 그런 과정이 무심히 반복되지 않았는가 싶다. 그러나 올해는 그게 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느낌이 있다. 가끔 그걸 ‘위기’라고 느낄 때가 있긴 하다. 도대체 무엇이 이 ‘책 읽기’를 불가능하게 하는가. 눈을 붉히고 돌아봐도 마땅히 그 까닭을 찾기는 어렵다.

 

학교를 옮기고 난 뒤 이 증상은 좀 심해졌다. 문제는 아침저녁으로 빽빽하게 든 수업으로 여유를 잃어버린 것이다. 하루 여섯 시간쯤 수업하고 집에 돌아오면 만사가 흐리멍덩해진다. 저녁을 먹고 잠시 쉬다 보면 수마가 덤벼드는데 이걸 이길 재간이 없다. 그리고 그런 날들이 하루, 이틀, 사흘……, 반복되는 것이다.

 

<한겨레>에 실린 칼럼이 은근히 자신을 도발한다. 시인과 영문학자의 글이다.

 

“전화기는 ‘스마트’해졌지만, 사용자는 전화의 노예가 되어, 카카오톡이 10분만 중단되어도 불만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책은 구석으로 밀리고 ‘책을 읽지 않는다’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사람이 늘어납니다. 언론인과 법조인들이 정치 바람 속에서 길을 잃으면서 컴퓨터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 모두 언론인, 법조인이 되어 말을 옮기고 타인과 세상을 재판합니다.” - 김홍숙(시인)

“언제부턴가 한국 문학은 전형성을 잃고 협소한 내면성의 외딴 방, 지금, 이곳의 현실이 아니라 후일담의 세계, 관념과 언어조작의 세계에 갇혀 있다. 그러나 문학적 ‘기념비는 과거에 일어난 어떤 사건을 기념하거나 축하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건에 신체성을 부여하는 지속적인 감각들을 미래의 귀에 들려주는 것이다.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인간의 고통, 다시 시작되는 인간의 항거, 가차 없이 재개되는 투쟁을.’”(들뢰즈) - 오길영(충남대 교수·영문학)

 

시인이 조곤조곤 들려주는 이야기는 우리의 무심한 일상을 환기해 주고, ‘작가여 당대로 돌아오라’는 영문학자가 인용한 들뢰즈는 매력적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들뢰즈를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가 지워버렸다. 소설을 읽는 것도 지겨워하면서 들뢰즈를 읽겠다고? 아서라, 욕심은 후회를 낳는다…….

 

두어 달 전부터 사 모은 책을 책상 앞에 쌓아본다. 자그마치 열세 권이다. 친지의 집에서 읽으려고 가져온 묵은 책, 인터넷 서점에서 산 책, 지인이 읽으라고 보내준 책, 선배가 출간한 책, 후배가 구매를 권한 책 등 사연도 여러 가지다.

 

그러나 이 가운데 읽은 책은 딱 한 권이다. ‘기구하여라 덴동어미, 그 운명을 넘었네’라는 기사를 쓴 덕에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 ‘덴동어미전’이다. 역시 소설이어서 접근하기가 쉬웠던가. 나는 ‘뻔한 소설’일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다가 소설을 다 읽고 나서는 생각을 바꾸었다. 뭐랄까, 공감이 여운처럼 마음에 닿아오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기억하라>는 ‘시사만화로 엮은 MB 4년의 현대사’다. 손문상과 장봉군, 김용민, 권범철, 유한이 등 시사 작가의 작품이 수록된 시사 만화집이다. ‘희망 2012, 대한민국 민주주의 교과서’라는 부제대로 이 만화집은 MB 시대를 돌이켜보는 자료집으로서 가치가 쏠쏠할 듯해 구매한 것이다.

 

도리언 세이건과 타일러 볼크가 지은 <죽음과 섹스>는 ‘생명의 시종(始終)’을 다룬 책이다. ‘존재하는 것은 왜 소멸하는가?’와 ‘살아 있는 것은 왜 섹스를 하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에 대한 답을 다룬다. 흥미로운 주제에 끌려서 구매했으나 초반부 생명의 기원과 관련한 장황한 서론에 질려서 훗날을 기약하고 처박아 두었다.

 

난 ‘게으름뱅이 독자’일 뿐

 

나는 원래 시오노 나나미의 책을 일부러 읽지 않았다. 글쎄, 일본인이 쓴 로마사 따위가 무엇이람 하는 억하심정이 있었고, 일본 작가들 특유의 문체에 대한 저항도 있었다. 무엇보다 나는 로마와 그 주변의 세계 고대사를 굳이 일본인의 시각을 빌려서 읽고 싶지 않았다.

 

그나마 뒤늦게 나나미의 책을 구매한 것은 역사를 가르치는 후배 교사가 나나미의 책을 읽고 ‘읽을 만하다’고 추천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취향 탓일까. 나는 <십자군 이야기>와 <로마인 이야기>의 평이한 서술, 좀 몸에 힘을 뺀 채 설렁설렁하는 해설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잡아당기는 맛이 달렸다는 얘긴데, 시간이 좀 먹나 까짓것, 나는 책을 덮어두기로 했다.

 

처가에 갔다가 서가에서 발견한 <트로트의 정치학>은 흥미로울 듯해서 가져왔으나 아직 표지도 들추어보지 못했다. 사실 책을 구매해 놓고도 정작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한 책이 어디 한두 권인가. 글쎄, 서가 어디쯤 있으면 언젠가 당기면 열어보겠지.

 

일본 작가 소노 아야코가 사학(死學)의 권위자 알폰스 데켄 신부와 나눈 편지글을 모은 <죽음이 삶에게>는 요즘 잔뜩 공부에 빠져 있는 해님이 보내준 책이다. 소노 아야코는 별로지만 ‘죽음’은 흥미로운 주제다. 더구나 ‘사학’을 가르치는 가톨릭 신부와의 대화다. 그러나 웬일인지 이 책도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한 1/3쯤 읽었는데, 이렇게 읽어서 될 일이 아니다 싶어서 당분간 묵혀 두려고 한다.

 

김상봉 교수(전남대)의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는 ‘노동자 경영권을 위한 철학적 성찰’이란 부제가 달린 책인데, ‘노동자 경영권’ 관련 활동을 하는 후배 교사의 권유를 받아 그에게서 샀다. 나는 김상봉 교수의 도전적 문제 제기를 높이 평가하는 편이지만 이 책 역시 아직 엄두가 나지 않아서 펼쳐보지 못했다.

 

한 온라인 서점에서 반값에 끌려 산 책이 <프로이트의 의자>와 <유혹의 역사>다. 앞엣것은 아직 표지도 열어보지 않았지만, 뒤엣것은 화장실 선반에 얹어두고 드문드문 읽기 시작한 게 반이 가깝다. 말 그대로 이 ‘유혹’은 여성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성적 유혹’이다. 거기 뭐 대단한 사회과학적 인식이 개재될 리 없으니 재미 삼아 읽는데 아무 거추장스러울 게 없을 수밖에.

 

공연히 새기지도 못하면서 머리 지끈거리게 하는 사회과학 서적이나 비평서 따위에 목을 맬 일이 아니라는 건 명백하다. 소설 읽기조차 게으름을 피우는 형편에 독자로서의 체모 따위를 지킬 계제가 아니다. 나는 내가 그저 그런 책들만 소비하는 게 편한 보통의 독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재미있는 책은 오래 가까이 두고 재미없고 어려운 책은 멀리하는 건 이른바 ‘인지상정’이다. 녹슨 머리, 쇠퇴한 기억과 집중력에도 불구하고 고상(?)한 독서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은근히 ‘고급’ 독자로 자기를 매기는 기만은 그만둘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소울 로드>는 말 그대로 ‘영혼을 치유하는 한국의 명품길’이라는 부제가 담긴 우리 길 에세이다.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의 추천도서인 이 책은 “내 영혼의 치유처이자 사유의 공간으로 ‘걷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묻는” 책이라고 한다.(인용의 형식을 빌린 것은 아직 이 책을 읽지 못해서다.)

 

춘천 ‘봄내 길’에서부터 화순 ‘정자 길’에 이르기까지 이 땅의 명품 길 스물몇 개를 걸으면서 이른 성찰과 사유의 기록인 이 책에는 오마이뉴스 블로그 “이 땅에서 잘 놀기”의 주인장인 초석 님도 저자로 참여했다. 그가 쓴 글은 팔공산의 운부암과 백흥암으로 가는 길 이야기다. ‘곱게 늙어가는 절집으로 이어지는 길’에는 늘 글쓰기가 젬병이라며 손사래를 치는 그의 만만찮은 내공이 담겨 있다.

 

‘김명희의 문학기행’ <낯선 익숙함을 찾아서>는 전교조 원년 멤버로 만났던 안동의 김명희 선생이 펴낸 책이다. 권정생부터 황순원까지 모두 22명의 시인, 작가를 찾아 떠난 이 기행은 80년대부터 시작된 국어 ‘교재연구’의 일부였다고 그이는 말한다.

 

국어교육 관련 서적을 주로 간행해 왔던 ‘나라말’에서 펴낸 이 책은 꽤 두꺼워 360쪽을 훌쩍 넘는다. 이 책이 관심 있는 국어 교사들에겐 문학기행에서 살가운 길라잡이가 되고도 남겠다. 선약 때문에 출판 모임에 참석하지 못한 미안함을 ‘서평’으로 대신하겠다고 한 ‘자백’이 ‘글빚’으로 남았다.

 

두툼한 책을 보면서 잠깐 흔히들 ‘출판’ 또는 ‘활자 공해’로 일컬어지는 주변 문화를 생각했다. 퇴임을 전후해 너나없이 책을 내는 좀 ‘거시기’한 풍토 말이다. ‘인사유명(人死留名)’을 위해서일까, 이런 문화는 특히 교육계에 두드러져 보인다.

 

“짬이 안나? 귀찮아서가 아니고?”

 

초등학교 교장으로 퇴임을 전후하여 무려 예닐곱 권의 책을 낸 분이 있다. 시집, 수필집, 기행문집, 서간집 등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고 있는 그의 책들을 일별하고 난 느낌은 ‘공해’가 달리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활자’로 찍었다는 걸 빼면 달리 의미를 찾기 어려운 이런 책들은 저자 주변의 이웃들을 성가시게 할 뿐이다.

 

블로그를 열어놓고 시답잖은 글쓰기를 계속하다 보니, 벗이나 지인으로부터 ‘책 한 권 내지 않느냐’는 질문을 더러 받는다. 나는 ‘그러잖아도 넘치는 공해에 하나 더 보탤 일이 없다. 그런 민폐 따위는 끼치지 않으려 한다’ 정도로 잘라버린다. 나이 들면서 망령이 나서 일을 저지를지는 모르는 일이라고 단서를 붙이긴 하지만.

 

김명희 선생의 책에는 알 만한 미사여구 따위는 없다. 이른바 ‘웅문옥장’도 아니다. 그러나 거기 담긴, 수십 년 동안 그것을 파 온 한 이의 오롯한 생각과 느낌이 주는 여운은 만만치 않다. 글쎄, 이 정도의 내용만 담을 수 있다면 굳이 출판을 백안시할 일은 없다는 생각을 해 보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책 읽기’에 대한 생각을 두서없이 풀었다. 학교에선 매일 평균 다섯 시간쯤의 수업 때문에 책 읽을 짬을 내는 게 쉽지 않고, 귀가하면 늘어져 버리는 생활이라고 스스로 변명하지만, 기실은 ‘책 읽기’가 귀찮아서 하는 변명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변명 뒤에 도사린 건 무릇 책이 들려주는 것이란 ‘모두 그렇고 그런 이야기’일 뿐이라는 방자하고 성급한 결론인지도 모르겠다.

 

 

2012. 6. 27.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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