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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지바고>,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그리고 노벨문학상

by 낮달2018 2020. 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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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닥터 지바고>, 소설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 1958 년 파스테르나크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지명되었으나 이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모니터 화면으로 영화 <닥터 지바고>를 다시 보았다. 상영 시간이 무려 3시간 12분이었다. 이 영화를 처음 보았던 열네 살 때도 이렇게 길었던가, 그러나 거짓말처럼 기억이 전혀 없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영화의 어떤 장면에선 어렴풋하게 기시감이 느껴졌다. 맞아, 저랬어!

 

그러다가 문득 뒷날 이 영화를 새로 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우리의 기억이란 기실 그리 믿을 게 못 되지 않은가. 나는 기억하고 있지 못하지만, 성장의 어떤 길목에서 나는 닥터 지바고를 다시 만났을지도 모른다.

 

다시 본 영화 <닥터 지바고>

 

영화가 끝났을 때, 나는 잠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문득 나는 오랜 시간의 강을 이미 건너왔다는 걸 새삼스레 깨달았다. 이미 알 만큼 아는 이야기니 새로울 게 무어 있겠는가. 그러나 오래된 이야기 속을 넘나들면서 나는 거기 담긴 혁명과 사랑과 인생을 한꺼번에 알아챈 듯한 느낌이었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어머니의 정부에게 유혹되어 버린 라라에게서 느꼈던, 설명할 수 없는 소년 시절 질투의 감정을 아련하게 추억했다. 그리고 혁명 청년 파샤의 순수한 열정과 우연히 만난 여인 라라에게 향하는 지바고의 연민을 고개를 주억거리며 받아들였다.

▲ 혁명 이후 혼란스러운 모스크바를 떠나 우랄산맥의 산골 마을을 향하는 지바고 일행을 태운 기차.

영화는 혁명이 어떻게 시작되고 완성되어 가는지, 혁명의 폭력성과 그 그늘 가운데에서 개인이 어떻게 파괴되고 마멸되고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멈출 줄 모르고 내닫는 혁명은 파샤를 무자비한 도살자, 우랄 적군(赤軍) 스트렐니코프 사령관으로 변모시키고 온유한 시인 지바고를 우랄의 시골 마을로 유폐시켰다.

▲ 제1차대전에서 군의관으로 근무하던 지바고는 종군간호부가 된 라라와 만나 사랑에 빠진다.
▲ 지바고는 유리아틴의 한 도서관에서 라라와 재회하고 폭풍 같은 사랑에 빠진다.
▲만삭의 아내에 대한 가책 때문에 이별을 통보하는 지바고에게 눈물을 흘리며 이를 받아들이는 라라.
▲ 라라 모녀의 안전을 위해 이들을 떠나보내고 지바고는 유리창을 깨고 떠나는 그들을 지켜본다.

사랑하는 아내 토냐와 함께 시골 생활에 적응해 가던 지바고는 이웃 동네의 도서관에서 라라를 재회하고 폭풍 같은 사랑에 빠진다. 혁명의 격랑 속에서 비극적이고 운명적인 사랑을 껴안을 수밖에 없었던 동시대의 지식인 유리 지바고는 작가의 자화상 같은 존재다.

 

혁명과 사랑의 서사

 

만삭의 아내에 대한 가책을 이기지 못하고 라라에게 이별을 고하는 지바고와 눈물을 흘리며 이를 받아들이는 라라의 모습은 사랑의 아픔과 고뇌가 세상 어디서나 다르지 않음을 확인케 해 준다. 적군 빨치산에게 납치되었다가 탈출한 지바고는 라라와 다시 만난다.

 

토냐가 떠난 얼음 궁전에서 곱은 손을 불면서 시를 쓰고 있는 지바고의 모습은 가장 절박한 순간에도 펜을 놓지 않는 시인의 모습을 환기해 준다. 라라 모녀의 안전을 위해 이들을 떠나보내고 두 사람을 태운 마차가 지평선 너머 멀어지는 모습을 창문을 깨고 바라보던 지바고의 모습도 오래 가슴에 남았다.

 

공산당 간부로 나오는 지바고의 이복 아우 역 고 알렉 기네스(1914∼2000)의 모습도 새롭다. 말끔하게 면도한 그의 모습은 8년 전의 영화 <콰이강의 다리>(1957)의 니콜슨 대령 역보다 훨씬 젊어 보여서 흥미롭다. 헌신적이고 슬기로운 여인 토냐 역을 맡은 배우 제랄딘 채플린(1944∼ )은 찰리 채플린의 딸이다.

▲제랄딘 채플린(Geraldine Chaplin)과 알렉 기네스(Alec Guinness)
▲ 라라의 집 현관 벽돌을 들어내면 나오는 열쇠. 빨간색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은 무채색이었다.
▲ 시를 쓰고 있는 지바고의 모습은 가장 절박한 순간에도 펜을 놓지 않는 시인의 운명을 보여준다.

내 기억의 착오도 있다. 오마 샤리프의 부음을 전한 글[닥터 지바고 세상을 떠나다]에서 나는 라라가 빨간 벽돌집 현관에서 외벽의 벽돌 하나를 들어내고 숨겨놓은 열쇠를 찾아 문을 연다고 썼는데, 다시 본 영화에서 그 벽돌집은 우중충한 무채색이었다.

 

<닥터 지바고>의 원작자 보리스 파스테르나크(Boris Pasternak, 1890~1960)는 모스크바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레오니드는 화가로 예술학교 교수였고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다. 레오니드는 톨스토이의 장편소설 <부활>의 삽화와 레닌의 초상화를 그린 화가였다니 유명인사였던 모양이다.

 

상징주의 신인 서정시인으로

 

파스테르나크는 작곡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루 살로메, 레프 톨스토이 같은 이들이 그의 집을 드나드는, 매우 문화적이고 사교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그는 릴케가 애인 루 살로메와 함께 기차에 오르는 모습을 기억하고 있어서 그 장면을 자신의 뛰어난 산문 <안전통행증>(1931)의 첫머리에 썼다고 한다.

 

파스테르나크는 처음엔 음악을 공부하다가 철학으로 방향을 틀어 모스크바 대학과 독일 마르부르크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신체상 이유로 병역을 면제받는 대신 우랄 지방의 화학공장에서 일했고 혁명 후엔 소비에트 교육부 도서관에서 근무했다.

 

첫 번째 시집 <구름 속의 쌍둥이>는 1914년에 출간되었다. 두 번째 시집 <장벽을 넘어서>(1916)에 이어 <누이, 나의 삶>(1922)을 펴내면서 그는 역량 있는 신인 서정시인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 시기 그의 시는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소비에트의 기준으로 볼 땐 전위적이고 비종교적이었지만 그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1933년부터 1943년까지의 작품은 공식적인 작품 양식(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너무 동떨어져 출판할 수 없었다. 1930년대 말의 대숙청 기간에 파스테르나크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 전전긍긍해야 할 정도였다. 그는 셰익스피어, 괴테,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들, 베를렌, 릴케 등을 번역하면서 간신히 생계를 유지했다.

▲ 1924년, 벗들과 함께. 왼쪽에서 세 번째가 예이젠시테인, 중앙의 키 큰 이가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다.

파스테르나크는 1945년부터 스탈린이 죽는 1953년까지는 페레델키노에 처박혀 소설 <닥터 지바고>를 썼다. 1956년 그는 큰 기대를 하고 모스크바의 유력 월간지에 이 소설을 기고했으나 ‘10월 혁명과 혁명의 주역인 인민, 소련의 사회건설을 중상했다’라는 비방과 함께 거부당했다.

 

1958년 노벨상 수상 지명과 거부

 

1957년 이 소설은 이탈리아의 출판사를 통해 서유럽에 알려졌고, 파스테르나크에게서 저작권을 사들인 이 출판사는 ‘수정을 위해’ 원고를 되돌려달라는 그의 요청을 거절했다. 영역본이 출간된 1958년에는 이미 <닥터 지바고>는 18개 국어로 번역되었고 소련에서는 금서로 읽히고 있었다.

 

1958년 10월 스웨덴 노벨상 위원회는 파스테르나크를 문학상 수상자로 발표했다. 시상 이유는 “동시대 서정시 및 위대한 러시아의 역사적 전통에 관한 중요한 공적” 때문이었다. 그는 “너무나 고맙고, 감동적이고, 자랑스럽고, 놀랐고, 몸 둘 바를 모르겠다”라는 전보를 보냈다.

 

그러나 그는 이틀 뒤에 “제가 속한 사회에 수여하는 이 상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고 수상을 사양할 수밖에 없으니 제 결정에 노여워하지 말아 달라”는 메시지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수상 소식이 알려지자 소비에트 작가동맹은 그를 제명하고 그의 추방 운동을 벌였다. 그는 생계유지의 수단마저 빼앗겨버렸다.

 

결국, 파스테르나크는 당시 흐루쇼프 서기장에게 “조국을 떠나는 것은 나에게 죽는 것과 같으니 선처를 바란다.”라는 탄원서를 보내고 수상을 거부하게 된 것이다. 이는 1964년 장 폴 사르트르의 수상 거부와는 내용에서 전혀 다른 것이었다.

 

스웨덴 한림원은 그의 수상 거부를 인정하지 않고 그해의 수상식을 보류하였고, 1989년 파스테르나크의 아들이 그를 대신하여 노벨상을 대리하여 받았다. 이는 1970년 소련의 반체제 작가 솔제니친이 수상을 거부하는 대신 소련을 떠났던 것과는 구별된다.

 

<닥터 지바고>가 혁명의 폭력성과 그 부작용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파스테르나크는 자신의 친척, 친구들 대다수와 달리 혁명 후에도 러시아를 떠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혁명이 가져온 새로운 사상과 가능성에 이끌렸다. 그가 혁명시인 마야콥스키를 열렬하게 숭배했던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파스테르나크는 겨우 망명만은 면한 채 나날이 악화해 가는 폐암과 심장병과 싸우면서 페레델키노에 은거하다가 1960년 5월에 파란 많은 삶을 마감했다. 향년 70세. 1987년에야 그가 사후 복권되면서 소설 <닥터 지바고>는 소련 안에서 출판될 수 있었다.

▲ 소련에서 〈닥터 지바고〉는 1987년 이후가 되어서 출판될 수 있었다.
▲ 페레델키노에 있는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무덤과 묘비. 그는 1987년에 사후 복권되었다.

소설 <닥터 지바고>에 실린 ‘유리 지바고의 시’ 가운데 ‘겨울밤’을 읽으며 혁명과 인생, 사랑의 서사를 그리고 비슷한 삶을 살았던 한 작가의 생애를 생각해 본다.

 

 

겨울밤

 

눈보라가 날려, 온 대지 위에 눈보라가 흩날려

사방 구석구석까지 휘몰아쳤다.

책상 위에 촛불이 타고 있었다.

촛불이 타고 있었다.

 

여름날 날벌레들이

불꽃을 향해 날아들듯이

눈송이들이 안마당에서

창문틀 쪽으로 흩날렸다.

 

눈보라는 유리창 위에

찻잔이며 화살의 모양을 그려 놓았다.

책상 위에 촛불이 타고 있었다.

촛불이 타고 있었다.

 

촛불 비친 천장

비틀린 그림자 어린다.

얽힌 팔, 얽힌 다리는-

교차한 운명의 그림자.

 

두 개의 조그만 신짝

소리를 내며 마루 위에 떨어졌다.

밀랍은 침실용 촛대에서

눈물처럼 옷에 흘러내렸다.

 

그리고 모든 것이 눈의 농무 속에서

회색과 흰색으로 사라져갔다.

책상 위에 촛불이 타고 있었다.

촛불이 타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서 바람이 촛불을 향해 불어댔다.

유혹의 열기는

십자가 형상으로

천사처럼 양 날개를 들어 올렸다.

 

2월 내내 눈보라가 흩날렸다.

그리고 쉴 새 없이

책상 위에 촛불이 타고 있었다.

촛불이 타고 있었다.

 

소설 <닥터 지바고>의 ‘유리 지바고의 시’ 중에서

 

 

 

2015. 7. 22.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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