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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한국전쟁 때 이양한 ‘평시 작전통제권’ 44년 만에 회수

by 낮달2018 2023.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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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공부 ‘오늘’] 1994년 12월 1일, 미국 보유 한국군 평시 작전통제권 공식 반환

▲ 한미합동훈련 중인 한국군과 미군

1994년 오늘, 제24차 한미연례안보협의회(1992)의 합의에 따라 미국이 보유하고 있던 한국군의 평시 작전통제권이 한국군에 공식 반환되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17일 이승만 대통령이 맥아더(Douglas MacArthur) 국제연합군 사령관에게 위임, 이양되었던 ‘작전지휘권(operational commands)’의 ‘절반’이 44년 만에 환수된 것이다.

 

주권국가의 작전권은 해당 국가의 군 통수권자에게 있는 것은 상식이고 원칙이다. 그런데도 이 권한을 행사하지 못한 상황이 반세기가 넘게 이어지고 있는 것은 우리의 분단 현실을 상징적으로 드러내 준다. 그것도 ‘때론 비극이거나 희극’으로 말이다.

 

작전통제권, 분단 현실의 표지

▲ 작전통제권의 개념.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작전통제권' 중에서

대통령 이승만과 군 수뇌부는 한국전쟁 발발한 지 불과 사흘 만에 한강 다리를 끊고 도주했다. 그리고 16일 후 이승만은 UN군 사령관 맥아더에게 편지를 써 ‘대신 군을 지휘해’ 달라고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외교적 수사로 점철되어 있지만, 이 편지의 내용은 매우 굴욕적이었다.

▲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시민들에게 서울을 사수한다고 알려놓고는 가장 먼저 서울을 빠져나간 군 통수권자였다.

“대한민국을 위한 국제연합의 공동 군사 노력에 있어 한국 내 또는 한국 근해에서 작전 중인 국제연합의 모든 부대는 귀하의 통솔하에 있으며, 또한 귀하는 그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있음에 감(感)하여 본인은 현 작전상태가 계속되는 동안 일체의 지휘권을 이양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는 바이오며 수여한 지휘권은 귀하 자신 또는 귀하가 한국 또는 한국 근해에서 행사하도록 위임한 기타 사령관이 행사하여야 할 것입니다.

한국군은 귀하의 휘하에서 복무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할 것이며 또한 한국 국민과 정부도 고명하고 훌륭한 군인으로서 우리들의 사랑하는 국토의 독립과 보전에 대한 비열한 공산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힘을 합친 국제연합의 모든 군사권을 받고 있는 귀하의 전체적 지휘를 받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며 또한 격려되는 바입니다.

귀하에게 깊고도 따뜻한 개인적인 경의를 표하나이다.”

               1950년 7월 14일 이승만(당시 대통령)

 

이렇듯 허망하게 작전통제권이 유엔군에게 이양된 상황에 대해 전 주한 미군 사령관(1973~1976) 리처드 스틸웰(Richard Stilwell)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하 <뉴스타파> 기사 참조]

 

“지구상에서 가장 놀라운 형태로 주권을 양보한 사례(the most remarkable concession of sovereignty in the entire world)”

 

전작권이 이양되고 나서도 유엔군은 당분간 형식적으로나마 한국군 지휘부를 통해 명령을 하달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러나 10여 개월 후 한국군 3군단이 현리 전투에서 대패한 뒤 3군단장 유재흥이 유엔군 사령관 밴 플리트(James Alward Van Fleet)에게 치욕적 질책을 당하고 나서 전작권은 온전히 유엔군에 넘어가 버렸다.

 

국군이 수적, 물적 우위에 있는 상태였는데 불구하고 현리 전투에서 대패한 것은 주요 지휘관들이 계급장을 떼고 도주하고 최고 지휘 책임자인 3군단장이 회의 참석을 이유로 현장을 벗어나 군단 사령부로 복귀하는 등 지휘체계가 붕괴함으로써 발생한 것이었다.

▲ 현리 전투의 모습과 대승을 거둔 중공군
▲ 2군단장 재직시절로 추정되는 시기의 유재흥 장군. 맨 왼쪽이 밴 플리트 미8군 사령관.

* 현리 전투는 한국전쟁 중 1951년 5월 16일 ~ 5월 22일 동안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현리에서 중공군과 조선인민군, 한국군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중공군이 춘계 공세를 벌였을 때 벌어진 전투로 인제군에 있던 한국군 제3군단이 방어에 실패하고 하진부리까지 밀렸다. 한국 역사 3대 패전[칠천량해전(임진왜란), 쌍령전투(병자호란), 현리 전투] 중 하나로 꼽힌다. (위키백과)

 

** 유재흥(1921~2011) : 한국전쟁 최악의 패전으로 기록된 ‘현리 전투’의 지휘관으로 1941년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일본군 소위로 임관한 뒤 태평양전쟁 종전 당시에는 육군 대위로 근무하고 있었다. 미 군정 시기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육군 대위로 임관. 현리 전투 대패의 책임에도 불구하고 그해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제3대 합참의장(1957~59년)과 제19대 국방부 장관(1971~73년)을 거쳐 2011년 사망해 대전 현충원에 묻혔다.

 

그의 부친 유승렬(劉升烈, 1891~1958)은 이응준·홍사익 등과 함께 육군중앙유년학교에 진학했고 1914년에 일본 육사를 졸업, 장교로 임관한 뒤 해방 당시 일본군 보병 대좌였다. 1949년에 군 경력자로 다시 육군에 입대하여 1954년 육군 소장으로 예편했고, 사후 대전 현충원에 묻혔다. 부자가 일본군 출신으로 둘 다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당신의 부대가 어디 있느냐, 모든 포와 수송 장비를 잃었느냐는 밴 플리트의 질문에 3군단장 유재흥은 ‘모르겠다’, ‘그런 것 같다’는, 1개 군단 지휘관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무책임한 답변으로만 일관했다. 이후 한국군에 대한 UN군의 신뢰는 바닥에 떨어지고 이를 계기로 형식적으로나마 존중되던 한국군의 지휘권은 완전히 박탈되었다.

 

“한국군 3군단을 해체하고 육군 본부의 작전권도 폐지한다. 육군 본부의 임무는 작전을 제외한 인사와 행정, 군사 훈련에만 국한한다. 국군 1군단은 내 지휘를 직접 받아야 하고 육군 본부 전방지휘소도 폐지한다.”
     - 1951년 5월 25일 강릉비행장 육군 지휘본부에서 미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전시 작전통제권 없는 주권국가 66년

 

작전통제권 문제가 다시 떠오른 것은 1968년 박정희에 의해서다. 그해 1월, 잇달아 발생한 북한 특수부대의 청와대 습격 사건과 북한의 미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의 대처를 놓고 당시 한미 정부가 충돌하면서였다. 청와대 습격엔 대응하지 않던 미국이 푸에블로호 사건에는 데프콘2를 발령하자 격분한 박정희는 미국에 작전통제권 환수를 요구한 것이다.

 

작전통제권 환수는 1987년 노태우의 대선 공약으로 다시 공식 제기됐다. 냉전 종식과 한반도 주변 환경의 변화, 한국군의 전력 성장에 따라 노태우 행정부는 작전통제권 환수를 추구하며 1988년 초부터 미국과 이에 대한 협의를 시작했다.

▲ 작전통제권 환수는 1987년 노태우의 대선 공약으로 공식 제기된 뒤 1988년 초부터 미국과 협의를 시작했다.

원래는 전시, 평시의 구분이 없이 작전통제권 전체를 환수하는 것으로 한미 양국 사이에서 협의되었으나, 협상 과정에서 1992년 말에 평시 작전통제권만 환수하고 전시 작전통제권은 추후에 환수하기로 합의함으로써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은 전시와 평시로 나뉘게 되었다.

 

그 결과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4년 12월 1일 한국군에 대한 평시 작전통제권은 한국군 합참의장에게 위임되었다. 이로써 44년 만에 한국군은 평시 작전통제권을 되찾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 전시 작전통제권은 한미연합사령부 체제를 유지하면서 1996년 이후에 다시 논의하기로 잠정적으로 합의하였다.

 

평시 작전통제권 회수에 대해선 일부 전 현직 군 장성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던 보수언론은 전시 작전통제권까지 가져와야 한다는 태도를 보였다.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전시 작전통제권까지 환수하는 것이 다음의 과제다.”

      -<조선일보>(1994.12.1.) 사설 중에서

 

“휴전이 성립된 지도 41년이나 지났으니 작전권의 일부가 아닌 전부를 하루속히 되찾아야 할 일이다.”

     -<동아일보>(1994.10.9.) 사설 중에서

 

작전통제권이란 말 그대로 전쟁이 일어났을 경우 군의 작전을 통제할 수 있는 권리다. 1950년에 유엔군에 이양된 작전지휘권(operational commands)은 1954년 11월 한미상호방위조약이 발효되면서 작전통제권(operational control)으로 명칭이 대체되었다.

 

1978년 11월 한미연합사령부가 창설되면서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은 다시 국제연합군 사령관으로부터 한미연합사령관으로 위임되었다. 한미연합사의 사령관은 미군 대장이 맡고 있어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은 사실상 미국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994년 12월 1일 평시 작전통제권은 한국군에 환수되었으나, 전시 작전통제권은 아직도 한미연합사령관이 가지고 있다. 이는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면 한국군은 수도방위사령부 예하 부대를 뺀 모든 부대가 한미연합사령관의 작전통제권 안에 들어간다는 의미다.

▲ 노무현 대통령은 평시 작통권에 이어 전시 작전통제권 회수까지 추진했다. ⓒ 뉴스타파

전시 작전통제권을 주한 미군 사령관에서 대한민국 합참의장으로 전환’(전작권 전환)하는 문제를 재점화한 것은 노무현 정부였다. 이에 보수진영에선 전작권 전환이 노무현 정부의 ‘반미 자주’란 이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비난하면서 반대 운동을 벌였다. [관련 글 : 똥별에게 보낸다]

 

전직 국방부 장관, 참모총장, 군 장성 출신들이 발표한 전작권 환수 반대 성명서에는 낯익은 이름 하나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대패한 현리 전투의 지휘 책임자였던 유재흥 전 3군단장이었다. 반세기가 지났건만 그는 패전의 트라우마를 벗지 못한 것이었을까.

 

평시 작전통제권 환수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던 보수언론들의 태도도 돌변했다. 12년 전에 보였던 태도를 바꿀 만한 정치 사회적 변화 따위는 물론 없었다. 이는 ‘전시 작전통제권을 순수한 안보문제나 주권문제로 보지 않고 정치적 이해득실로 판단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볼 수 있다.

 

“전작권 환수를 주권으로 보는 건 잘못”

    - <중앙일보>(2006.8.10.)

 

“전시작전권에 관한 대통령의 오기와 모험주의”

  - <동아일보>(2006.8.10.) 사설 중에서

 

“전 국방부 장관들 ‘작통권 논의중단 성명서’ 준비”

  -  <조선일보>(2006.8.10.)

 

2006년 9월, 노무현은 부시와의 한미정상회담에서 전시 작전통제권 환수를 합의했고, 이듬해 2월 전시 작전통제권 환수 시기를 2012년 4월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 결정은 다음 이명박 정부 때 간단히 뒤집혔다. 2010년 6월에 전작권 환수 시기를 2015년 12월로 연기한 것이다.

▲ 전작권 전환 무기 연기에 따라 전작권은 여전히 한미연합사령관인 미군 대장이 보유하고 있다. ⓒ 위키백과

이어 들어선 박근혜 정부는 한술 더 떴다. 2013년 미국에 전시 작전통제권 환수 재연기를 제의하더니 결국, 2014년 10월, 한미 국방부 장관이 한미연례안보협의회(SCM)에서 전작권 전환을 무기한 연기하기로 해 버렸다. 애당초 2007년의 결정대로라면 회수되었을 전작권은 여전히 한미연합사령관인 미 육군 대장이 보유하고 있게 된 것이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전작권 환수 ‘연기’ → ‘무기 연기’

 

전작권을 환수한다고 해서 한반도의 안보 상황에 다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전작권 환수 시기를 거듭 미룬 건 보수 여론을 의식해서라고 한다. 지지층인 우파의 이탈을 차단하려는 정치적 셈법이 작용했다는 것이다.

 

사실상 주권을 포기한 것과 다르지 않은 무기한 연기로 전작권 회수는 까맣게 멀어졌다. 찬반을 떠나서 환수를 극렬히 반대한 집단 가운데 전 현직 한국군 장성들이 망라된 것을 바라보는 심정은 씁쓸하다. 한국전쟁 이후, 반세기가 훌쩍 지났는데도 아직도 미국에 ‘작전통제권’을 찾아오는 걸 두려워하는 이들이 한국군 최고 지휘관이라는 사실을 정작 미국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2016. 11. 30. 낮달

 

* 이 글은 <위키백과>, 국가기록원, 일간지 기사 등을 참고했고, <뉴스타파> 기사에서 큰 도움을 받았다.

 

*2010년 당시 이명박 대통령과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군의 전시 작전통제권 전환 시기를 2015년 12월로 연기하기로 합의한 뒤, 재연기는 없는 것으로 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 때인 2014년 10월 23일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안보협의회(SCM)에서 대한민국과 미합중국 국방부 장관은 전작권 전환 시기를 정하지 않고 2020년대 중반에 전환 여부를 검토한다고 합의하여 사실상 무기한 연기하였다.

 

결국, 노무현 전 대통령이 시도한 전작권 환수는 까맣게 멀어졌고, 우리는 전시에도 자국 군대를 외국군의 승인 없이는 통제할 수 없는 유일한 ‘자주 국가’에 머물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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