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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행복한 책 읽기

아이라쿵께요, 키가 커삐가 치마가 짧아진 거라예

by 낮달2018 2019.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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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윤명희 외 <경상도 우리 탯말>

▲ <경상도 우리 탯말> 윤명희 외, 소금나무, 2006

2006년 5월 일단의 시민들이 헌법재판소에 “현행 표준어 일변도의 어문정책을 폐지하고, 지역의 학생들에게 사투리를 교육할 수 있게 해 달라”는 내용의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이들이 바로 네티즌들이 결성한 지역어 연구 모임인 ‘탯말두레’다.

 

이들이 헌법소원을 제기하며 제출한 심판청구서에서는 ‘서울말’을 표준어로 정한 현행 어문규정을 강하게 비판했다. 비표준어 사용자를 ‘교양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는 현 어문정책은 국민의 기본권과 평등권, 교육권, 행복추구권을 명백히 침해했다고 보는 이들의 논거는 대충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사투리는 더는 놀림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 문화를 풍부하게 하는 자산이다.”
“전국이 반나절 생활권에 포함된 지금은 굳이 지역어(사투리)를 차별해야 할 이유가 없다.”
“획일적인 표준어 정책이 문화의 다양성을 해치고 있다.”
“지역 사투리를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보다 풍요로운 언어생활을 누리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각 지역의 언어는 해당 지역의 문화와 역사가 응축된 것으로서 서로 간에 우열이 있을 수 없다.”
“단지 수도에서 쓰는 말이라는 이유로 다른 지역에서 쓰는 말을 ‘사투리’로 규정해 교육과정에서 차별하는 것은 헌법이 보장한 평등정신에 어긋난다.”
“서울 경기 지역 말 중심의 표준어 체계를 전국 각지의 말이 고루 반영된 형태로 고치자.”
“다른 지역 주민들이 반발하는 경우만 아니라면, 기존 표준어와 같은 뜻을 가진 사투리를 모두 표준어에 편입시키자.”
“표준어 자체를 없애자는 것은 아니다. 단지 모든 지역에서 쓰이는 말이 동등한 자격으로 표준어에 편입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남북통일이 되면 어차피 현행 표준어 체계는 뜯어고쳐야 한다. 통일 이후에도 서울 경기 지역에서 쓰이는 말을 표준어로 삼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위 보도를 보고 나는 전문 연구자도 아닌 이들이 ‘대단한 일’을 했다는 정도로 스쳐 버렸다. 그들의 주장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문제를 별로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던 탓이었다. 나는 사투리가 민족어로서 중요한 언어 유산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국어교사로서 표준어에 얼마간 기울어 있었던 듯싶다.

 

최근에 나는 지인으로부터 <경상도 우리 탯말>이라는 단행본 한 권을 선물 받았다. ‘어머니와 고향이 가르쳐 준 영혼의 말’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2006년에 출판되었는데 경상도 ‘고장 말’에 대한 만만찮은 내공이 실려 있다. ‘책머리에’를 읽다가 나는 이 책의 지은이들이 바로 ‘탯말두레’의 회원들이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탯말’은 아직 사전에 오르지 않은, 한자말 ‘태(胎, 태반이나 탯줄과 같이 태아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조직을 일상적으로 이르는 말.)’에다 고유어 ‘말’을 붙여서 만든 말이다. 책에서는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 탯줄을 통해 들어온 말,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맨 처음 어머니에게 배우고 고향의 친구들과 같이 써 온 말, 그래서 고향과 어머니가 가르쳐 준 말’로 탯말을 풀이한다.

 

‘사투리’라는 이름으로 멸시해 온 지역 언어를 ‘탯말’이라고 부르는 것은 ‘방언’ 대신에 ‘고장 말’이라고 부르는 것만큼이나 의미 있는 일이다.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표준말 우선의 어문정책의 결과는 표준어와 대비되면서 ‘사투리’나 ‘방언’이 열등한 언어라는 편견을 보편화해 버렸기 때문이다.

 

<경상도 우리 탯말>은 탯말두레가 펴낸 <전라도 우리 탯말>에 이은 두 번째 노작이다. 출판사 이름도 낯설고 표지 장정도 어쩐지 촌스러워서 긴가민가하면서 읽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거기 푹 빠져 버렸다. 마치 그것은 차츰 잊어가고 있는 ‘경상도 말’로의 시간 여행 같은 것이었던 것이다.

 

책은 △ 탯말 예화 1·2, △ 탯말 독해, △ 문학작품 속의 경상도 탯말, △ 탯말 사전 등으로 짜여 있다. 그중 단연 고갱이는 안동 중심의 경북 내륙지방(예화 1), 대구 주변· 경남 북부 지역과 진주 중심의 경남 서부 지역(예화 2)의 탯말로 짠 탯말 예화다.

 

안동을 중심으로 한 의성·봉화·영주·영양 등지의 언어로 구성한 예화 1은 가족·친족들이 나누는 대화를 통해 부친의 장례를 진행하고 삼년상을 지내는 과정을 재구성한 것이다. 알다시피 안동 지역은 경상도 안에서도 유교적 전통이 가장 깊은 곳이어서 매우 엄격한 가운데 상례가 진행되는 곳이다.

 

“염하기 전에는 빈소 들따 보는 게 아이따.”(염하기 전에는 빈소 들여다보는 게 아니다.)
“아뱀 가실 때 어맴 병 다 가 가시라꼬요.”(아버님 가실 때 어머님 병환 다 가져가시라고요.)
“널찌머 어옐라꼬 거를 기 올라가노?”(떨어지면 어쩌려고 거기를 올라가느냐?)
“나락짚으로 만들어 노으이 까끄러버가 이마가 다 삐끼질라 카네.”(볏짚으로 만들어 놓으니 깔끄러워서 이마가 다 벗겨지려고 하네.)
“저야 대댕기마 대댕기는 대로 해야지예.”(저야 닿으면 닿는 대로 해야지요.)
“1년이사 어예 삐대도 안 할니껴?”(1년이야 어떻게 버텨도 안 하겠습니까?)
“우야든동 다음에사 좀 수웁게 하입더.”(어떻게든지 다음에는 좀 쉽게 합시다.)

 

예화의 장면에 붙은 제목들이다. 상례의 순서, 망자에 대한 바람, 저지레하는 아이들 나무라기, 굴건 쓴 상주의 불평, 삼년상에 대한 둘째 며느리의 발언, 일년상으로 결정하자는 차남의 의견, 제사 차리기에 대한 둘째 며느리의 권유들인데, 이런 탯말에 힘입어 이 장면들은 뜨끈뜨끈하게 살아 있다.

 

이 장면들이 건조한 표준말로 이루어져 있었다면, 마치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지는 듯한 생동감은 맛보지 못하였으리라. 예화 1은 대구 출신으로 안동의 반가 장손 집안으로 출가해 시부의 삼년상을 치르고 있다는 필자가 시댁 어른의 자문을 받아 집필했다. 이 글은 장례 습속에 대한 탁월한 해설과 전문 연구자에 뒤지지 않는 탯말의 어학적 풀이 등으로 책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이다.

 

경상도 특유의 종결어미인 ‘-니더’, ‘-니껴’, 중세의 반치음과 순경음 ㅂ의 변화, 복모음이 단모음으로 바뀌는 현상, ‘마이(많이)’, ‘그라마(그러면)’ 등에서 보이는 자음 탈락, 2인칭 복수 대명사로 ‘너거’가 쓰인다던가 하는 것들은 필자의 경상도 탯말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반증한다.

 

예화 2는 대구와 경남 북부에서 쓰이는 말과 진주를 중심으로 한 사천·함양·산청·하동 등지에서 쓰는 말로 구성했다. 주인공은 갓 대학을 졸업하고 여고로 부임한 대구 출신의 국어교사와 진주의 여고생들. 억양과 발음의 차이는 물론이고, 말이 달라서 빚어지는 오해 등을 다루고 있는 이 글은 가벼운 만큼 유쾌하다.

 

“오이가 오때서예?”(어디가 어때서요?)
“니 진짜 와 이라는데?”(너 진짜 왜 이러는데?)
“갱내 맞잖아예?”(경례 맞잖아요?)
“아이라쿵께요. 키가 커삐가 치마가 짧아진 거라예.”(아니라니까요. 키가 커 버려서 치마가 짧아진 거예요.)
“니는 호부 그런 거 갖고 소문 지어내나.”(너는 기껏 그런 거 갖고 소문 지어내나.)

 

대구말을 쓰는 교사와 진주 토박이 여학생 사이의 사연은 정겨우면서도 익살스럽다. ‘어디’를 ‘오이’라 쓰는 아이들을 흉보는 교사에 대한 아이들의 항의에서부터 복모음 ‘ㅕ’를 ‘ㅐ’로 발음하는 특유의 발음법 때문에 ‘경례’를 ‘갱내’로 쓰는 아이들과 이를 교정하려는 교사 사이의 승강이가 재미나게 그려진다.

 

탯말 독해는 생활, 음식, 사람, 자연별로 많이 쓰이는 아름다운 탯말 문장을 표준말로 풀이한 부분이다. 또 문학작품 속의 경상도 탯말은 주로 박목월·이육사·박재삼의 시와 박경리·이문열의 소설에 쓰인 탯말을 다룬다. 마지막은 가나다 순서로 탯말 사전을 실었는데, 비록 전문 사전 편찬 형식은 아니지만, 경상도 탯말을 오롯이 담고 있어 자료로서의 가치를 더한다.

 

지은이들은 이 책에 경상도 탯말 전부가 담기지도, 담을 수도 없다고 하면서도 이 책이 탯말을 아끼고 보존하려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고 탯말의 가치와 소중함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앞으로 저자들은 제주도와 충청도의 탯말을 집필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북한 지역의 탯말도 다뤄 봤으면 하는 소망을 숨기지 않는다.

 

최근 방송과 영화 등에서 탯말의 ‘복권’이 이루어지면서 ‘변방의 언어’였던 탯말이 언어의 중심부로 시나브로 진출하는 양상이다. 이에 따라 국어원 등 정부 기관에서 ‘표준말 : 사투리’라는 이분법적 구도를 벗으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을 저자들은 바람직한 일로 바라본다.

 

윤동주의 아름다운 시 「별 헤는 밤」에 쓰인 ‘헤다’는 사전에 ‘강원도 방언’, ‘북한어’로만 올라 있다. 굳이 표준말로 바꾸자면, ‘세다’나 ‘헤아리다’로 바꿔 써야 한다. 그러나 기왕의 표준어에 ‘헤다’ 하나를 더하면 우리는 더 풍부한 어휘체계를 가질 수도 있지 않나 싶다.

 

지은이들의 주장도 다르지 않다. 좋은 탯말들을 표준어에 포함하여 우리말의 어휘를 더욱 풍부하고 풍성하게 만들자는 것이니 이들의 주장이 어문정책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듯하다. 탯말두레가 제기한 헌법소원의 결과를 기대해 본다.

 

 

2009. 2. 27. 낮달

 

 

아이라쿵께요, 키가 커삐가 치마가 짧아진 거라예

[서평] 윤명희 외 4인 <경상도 우리 탯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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