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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역사 공부 「오늘」

[오늘] 레이테만 전투와 마쓰이(松井) 오장의 행방

by 낮달2018 2023.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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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공부 ‘오늘’] 1944년 10월 23일, 레이테만 전투 시작

▲ 1944년 10월 24일,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연합해군의 공격을 받고 있는 일본 해군의 항공모함 무사시호 .

1944년 오늘(10월 23일), 필리핀 주변 해역에서 제2차 필리핀해전으로 알려진 레이테(Leyte)만 전투가 막을 올렸다. 필리핀의 레이테섬, 사마르(Samar)섬, 루손(Luzon)섬에서 10월 26일까지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 해군 연합과 일본제국 해군 사이에서 벌어졌던 이 전투는 2차 세계대전 중 가장 큰 해전이었다.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일본군은 중앙 태평양 지역에서부터 남태평양 지역에 이르기까지 점령하고 있던 지역을 하나씩 잃기 시작했고 솔로몬·비스마르크·애드미럴티 제도(諸島), 뉴기니섬, 마셜군도, 웨이크섬과 같은 지역의 기지는 고립되고 있었다.

 

2차대전 중 가장 큰 해전, 레이테만 전투

 

1944년 6월에는 미 해군 5함대 소속의 고속 항공모함 기동함대가 수행한 여러 상륙 작전으로 미군은 로타 섬을 제외한 마리아나 제도의 섬 대부분을 점령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의 근접 방어선이 무너졌고 미군은 보잉 B-29 같은 장거리 폭격기를 이용하여 일본 본토를 직접 공격할 수 있는 비행 기지를 확보하게 되었다.

 

필리핀해전(1944.6.19~21.)에서 일본 해군은 반격에 나섰지만, 미 해군은 3척의 일본군 항공모함을 침몰시켰고 600기가량의 일본군 항공기를 파괴하였다. 이후 일본 해군은 항공모함 기반으로 한 전력과 숙련된 조종사를 거의 잃게 되었다.

 

전쟁 초반에 잃었던 필리핀 탈환을 원하고 있던 미군은 10월 중순부터 일본의 고립-특히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석유의 공급을 방해하기 위한-을 목적으로 하는 일련의 작전으로 레이테섬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10월 23일 0시를 지나 브루나이에서 출발한 일본 해군의 구리다(栗田) 함대는 레이테만으로 향하다가 미 해군 잠수함 다터(USS Darter)에 발각되었다. 다터는 일본 함대를 추적하다가 새벽에 구리다 함대의 기함 아타고와 마야에 4발의 어뢰를 명중시켰다. 그것이 레이테만 해전의 시작이었다. (정작 레이테만에서는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는데도 이 해전의 이름은 ‘레이테만 전투’다.)

▲ 1944년 10월, 상륙함(LST)으로 필리핀 레이테섬에 상륙한 미군 병사들.
▲ 미 육군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휘하 장교들과 함께 레이테섬에 상륙하고 있다.(1944.10.20.)

이후 레이테만 전투는 시부얀(Sibuyan) 해전(10.24.)으로 시작하여 수리가오(Surigao) 해협 전투(10.24~25.), 엔가노(Engano) 곶 전투(10.25.), 사마르(Samor) 해전(10.25.)에 이르는 4번의 연속적인 전투로 이어졌다.

 

가미카제 공격이 처음 수행된 전투

 

필리핀해전으로 전력의 상당 부분을 잃은 일본은 미국의 압도적 전력 앞에 적수가 될 수 없었다. 미국은 일본보다 정규 항공모함이 8배, 경항공모함과 호위 항공모함에서도 2~3배의 차이를 보였고 항공기는 일본의 5배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공식적으로 제2차 필리핀해전으로 불리는 레이테만 해전의 전개

레이테만 전투의 결과는 일본 해군 연합함대의 패망이었다. 일본은 정규 항공모함 1척을 포함, 27척의 전함을 잃었고 항공기 300여 대가 격추되고 1만2000 명의 병사가 전사했다. 그러나 미군은 경항공모함 등 6척의 전함과 200여 기의 항공기를 잃고 전사자는 2800명에 그쳤다.

 

레이테만 전투는 일본군에 의하여 조직적인 가미카제 공격이 처음 수행된 전투였다. 레이테 해전을 눈앞에 두고 마닐라에 부임한 일본 제1 항공함대 사령관 오니시 중장에게 남아 있던 전투기는 고작 30여 기뿐이었다. 오니시는 일본 해군의 항공 병력으로는 적을 공격하는 게 불가능한 상황에서 ‘신푸(神風) 특별공격대’를 편성할 것을 명령한 것이었다. [관련 글 : 가미카제 된 식민지 청년, 그는 과연 친일파인가]

 

그것은 일본 항공모함 탑재기인 제로센(零戰)에 폭탄 250Kg을 실은 뒤 적 항공모함의 갑판에 몸체 공격을 감행하는 작전이었다. 그 정도 공격으로 적의 항공모함이 가라앉지는 않겠지만, 일시적으로 갑판을 사용불능 상태로 만들 수 있으리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 가미가제 특공대원이 출격을 보고하고 있다.

첫 출격에서 세 번째 출격까지는 적을 발견하지 못하거나 날씨나 기체 고장으로 작전이 수행되지 못했다. 그러나 네 번째 출격에서 신푸 특공대는 상상하기 어려운 전과를 거두었다. 다섯 대의 비행기로 항공모함 두 대에 큰 피해를 주고 경순양함 한 대를 침몰시켰기 때문이었다.

 

이 전과에 고무된 일본 군부는 이를 전세 역전을 위한 필승의 전술로 받아들였다. 천황 히로히토도 사실상 이를 추인하였다. 그러나 이 상식 밖의 자살 공격으로 전황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레이테 해전에서 일본 해군은 궤멸적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다.

▲ 미당 서정주가 <매일신보> 1944년 12월 9일 자에 발표한 '송정 오장 송가'.

 

여동생의 증언, 마쓰이 오장은 ‘생환하지 않았다’

 

레이테 해전은 미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레이테만에서 미군과 일본의 전투는 계속되고 있었다. 조선인 최초의 가미카제 특공대원 마쓰이 히데오(松井秀雄), 곧 인재웅이 연합군의 필리핀 진공을 막기 위해 펼쳐진 ‘쇼이치고(捷一号)’ 작전 현장인 레이테만에서 적함에 몸체공 격을 감행해 숨진 것은 11월 29일이었다.

 

글라이더 날리기를 즐겼던 개성의 인재웅(1924~1944)이 소년 비행병으로 도쿄 육군항공학교에 입학한 것은 1941년이었다. 그는 1년 뒤 육군 비행학교에 입학했고 필리핀전쟁이 시작될 무렵에는 육군 초기 특공대인 야스쿠니대에 편성되었다.

 

그는 10월 19일 필리핀에 도착했고 11월 29일 새벽 4시 35분 필리핀 네그로스(Negros)섬의 시라이(Silay) 기지에서 여섯 명의 대원과 함께 출격했다. 그는 레이테만에 정박 중이던 적 수송 선단에 몸체 공격을 감행해 숨졌다.

▲ 가미카제 특공대가 폭탄을 싣고 적 항공모함의 갑판에 몸체 공격을 감행한 항공모함 탑재기인 제로센(零戰).

그의 사망 소식을 조선총독부는 철저히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매일신보>는 3주에 걸쳐 그의 일대기와 애도와 추모의 물결 등으로 지면을 도배했고 일본 육군성은 오장(하사)이던 그를 무려 네 계단 특진시켜 소위로 특별 임관하게 했다. 모교 개성상업학교에서 열린 고별식에는 3천 명의 조문객이 참석했고 유족들은 가족을 잃은 고통 대신 ‘마쓰이 오장’의 ‘유족으로서 모범적인 삶을 강요당했다’.

 

서정주를 위시한 친일 문인들은 시와 글로 ‘조선인 최초의 가미카제 특공대원’ 마쓰이 오장의 삶을 미화했다. 서정주는 <매일신보> 12월 9일 2면에 ‘마쓰이 오장 송가’를 발표했지만[관련 글 : 친일은 하늘 뜻에 따랐다?] 노천명[여성 화자를 앞세운 친일시들]은 그보다 앞선 12월 6일에 <매일신보>에 ‘신익(神翼, ‘신의 날개’라는 뜻)’을 실었다.

 

    신익(神翼)
  - 송정오장 영전에

靑磁(청자)빛 하늘가에
보이지 않는 神翼(신익) 소리를 들으며
이천만 동포의 피가 沸騰(비등)한다
우리 지금 물 끓듯 감격함은
松井伍長(송정오장)의 壯(장)하고 嚴(엄)한 죽음이어라
11월 29일!
우리 松井伍長(송정오장)이
거룩한 죽음을 약속한 이날
해와 달이 무심했으랴
레이테灣(만)의 거친 파도를 베며
魚雷(어뢰)를 안고
몸소 艦艇(함정)에 부딪쳐
그대 혜성처럼 떨어지다
오― 숭고한 최후여
그 용감한 투혼에 기백에
조선의 청소년들아 뒤를 잇자
그 몸 레이테만 속에 가라앉았으나
충혼 정든 조국의 하늘을 날아 영원히 우리 안에 거하리
죽으러 떠나던 마당
상관이 부어 주는 마지막 술잔
받아드는 얼굴은
지극히 조용하고 겸손했다
일찍이 어느 나라 민족이
죽음을 이처럼 용감하게 태연하게
받은 일이 있었더냐
나 이제
옷깃을 가다듬고
명복을 비나니
그대
내 머리 위에
성좌같이 빛나도다

 

▲ 마쓰이 히데오(인재웅)

1990년대에 발견된 뜻밖의 기사(<동아일보> 1946. 1. 10.) 때문에 인재웅이 생환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관련 기사 : 정운현, “서정주가 미화한 ‘가미카제 조선 청년’ 미스터리”(2011. 7. 20.)] 가미카제를 추적한 저서 <나는 조선인 가미카제다>(2012)[서평 : 가미카제 된 식민지 청년, 그는 과연 친일파인가]를 펴낸 <한겨레> 길윤형 기자는 이를 부인하고 있다.

 

인재웅의 여동생 인순혜(1934년생)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생환하지 않았다.’ 그가 수용되어 있었다는 하와이 포로수용소의 포로 명부에도 그의 이름은 없었다. 인재웅의 유족은 대일항쟁기 강제 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에 피해 사실을 인정해 달라는 서류를 접수하여 2011년 2월 23일, 2000만 원으로 정해진 사망자 위로금을 받았다.

 

레이테만 전투는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더는 미국과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한 해전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일제가 한반도에서 자행한 강제 동원의 결과로서 조선인 가미카제 문제와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한 부역 문인의 문제를 환기하게 해 준 전투이기도 했다.

 

 

2017. 10. 22. 낮달

 

 

참고

· 길윤형, <나는 조선인 가미카제다>, 서해문집, 2012

· <위키백과>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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