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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조선어학회,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

by 낮달2018 2024.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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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공부 ‘오늘’] 1933년 10월 29일, 첫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

▲ 조선어학회에서 1933년에 제정한 '한글마춤범통일안'(왼쪽)과 1940년 개정한 '한글맞춤법통일안'

1933년 오늘(10월 29일)은 당시의 한글날이었다. 이날, 조선어학회(지금의 한글학회)는 한글 반포 487돌을 기념하여 ‘한글맞춤법통일안’을 정식으로 발표하였다.
 
‘조선어의 정확한 법리를 연구’할 목적으로 설립된 조선어연구회가 1930년 12월 13일 총회를 열어 대한제국기의 한글 연구를 기초로 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아래 ‘통일안’)을 제정할 것을 결의한 지 3년 만이었다.
 
통일안 제정을 결의한 조선어연구회는 적극적인 사전 편찬 작업을 위해 1931년 1월 조선어연구회를 ‘조선어문의 연구와 통일’을 위한 기관인 ‘조선어학회’로 개편하였다. 조선어학회는 1932년 12월에 통일안의 원안을 발표하였다.
 
원안 작성에는 권덕규·김윤경·박현식·신명균·이극로·이병기·이윤재·이희승·장지영·정열모·정인섭·최현배 등 12명이 참여하였는데 뒤에 김선기·이갑·이만규·이상춘·이세정·이탁 등 6명이 증원되어 원안을 심의하였다. 원안은 2차례의 수정을 거쳐 이날 최종안이 발표된 것이다.

▲ 통일안 제정에 헌신한 국어학자들. 주시경 사후에도 제자들 중심으로 통일안 제정이 이루어졌다.

한글 규범화 과정
 
실제로 한글 규범화 정책은 일제에 의해 처음으로 시행되기 시작했다. 1912년 조선총독부는 ‘보통학교용 언문 철자법’을 제정하고 이를 조선어 교과서에 적용했으며 이후에도 여러 번 철자법을 개정했다. 일제는 1920년에 <조선어사전>도 편찬했다.
 
물론 조선총독부 어문정책의 목표는 일본어 상용화였으므로 이 한글 정책은 식민지 교육 정책의 기조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고, <조선어사전> 역시 ‘조일(朝日) 사전’의 일종이었을 뿐이다.
 
을사늑약(1905) 이후 일제의 식민지배가 가시화되고 있었지만, 이 무렵에 국문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국문 사용이 확대되고 국문의 통일이 긴요해지면서 정부는 1907년 한글 규범화를 위한 국가 연구기관인 국문연구소를 설립하였다.
 
국문연구소 어문 연구는 정책으로 실현되지 못한 채 연구소는 1909년 해체되었지만, 이 기관에서 연구에 참여한 학자들은 국어 연구를 계속했다. 국어 문법 연구를 통해 문법과 철자법 정리의 기초 안을 만들고 이후 사전 편찬 사업을 주도한 주시경(1876~1914)이 대표적인 학자였다.

▲ 조선어연구회(지금의 한글학회)의 기관지 '한글'

초기 어문 연구자들은 하나같이 국어사전이 있어야만 한글을 정확하고 통일되게 사용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국문연구소의 활동은 사전 편찬으로 이어지지 못한 채 일제에게 국권을 침탈당했다. 사전 편찬 사업은 1911년 민간단체인 광문회에서 주시경과 최남선의 주도로 다시 시작되었지만, 주시경이 사망하면서 표류하고 말았다.
 
한편 국어 연구는 1921년 장지연, 이윤재, 최현배 등에 의하여 조선어연구회가 창립됨으로써 본격화되었다. 한글 연구와 보급을 목적으로 조선어연구회는 전국 주요 도시 10여 곳에서는 월례 발표회를, 중소 도시에서는 교양 강좌를 열어 우리 말글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보존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1926년에는 오늘날의 한글날인 ‘가갸날’(음력 10월 29일)을 제정하고 기념행사를 펼쳐 한글 보급과 대중화에 노력하였다. 한글 연구를 심화하기 위한 잡지 <한글>을 간행하기도 했다. 1930년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을 결의한 조선어연구회는 사전 편찬 작업을 위해 이듬해 조선어학회로 확대 개편되었다.
 
한글맞춤법통일안은 이러한 과정에서 제정되었고 1936년에는 ‘표준어 사정안’도 공포되었다. 통일안 제6장에 간단하게 실렸던 외래어 표기 원칙은 1941년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제정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노력이 조선어사전 편찬을 위한 기초가 되었음을 말할 필요도 없다.

▲ 일제가 독립운동단체로 몰아간 '조선어학회 사건'(1942)으로 복역하고 살아남은 국어학자들. (1946년)

그러나 때는 일제 강점기, 천신만고 끝에 <우리말 큰 사전> 편찬 작업이 거의 완성된 시점에 ‘조선어학회 사건’(1942)이 일어나면서 이 작업에 참여했던 학자들은 모두 투옥되고 원고도 압수당해야 했다. 일제는 조선어학회와 관련 인사들을 독립운동 혐의로 구속하고, 치안유지법의 내란죄를 적용하였다.
 
이때 통일안 원안 작성에 참여한 이들 중 이윤재·최현배·이희승·정인섭·김윤경·장지영·김선기·이병기 등이 구속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며, 이윤재(1888~1943), 한징(1886~1944)은 옥사하고, 11명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조선어학회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면서 중단되었던 사전 편찬은 해방 이후에야 비로소 완성될 수 있었다. [관련 글 : 일제, ‘조선어학회 사건기획, 검거를 시작하다]
 
총론 3항, 각론 7장 63항의 ‘통일안’

 
한글맞춤법통일안은 총론 3항, 각론 7장 63항, 부록 1, 2로 구성되었다. 총론에서는 표준어를 ‘현재 서울의 중류 사회에서 쓰는 말’로 규정하고 맞춤법은 표음주의에 따르며 단어는 띄어 쓴다는 원칙을 규정하였다.
 
문자체계에서 실질적으로 변화한 것은 두 가지, 당시까지 써 오던 ‘ㆍ(아래아)’를 폐기한 것과 된소리 표기인 ‘ㅺ, ㅼ, ㅽ, ㅾ’과 ‘ㅄ’을 각각 ‘ㄲ, ㄸ, ㅃ, ㅆ, ㅉ’로 바꾸어 표기한 것이었다. 이후 한글맞춤법은 시대 변화에 따라 여러 차례 수정을 거쳤지만, 1933년 제정된 한글맞춤법통일안은 여전히 한글맞춤법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 &lt;조선말 큰사전&gt; 제1권 (1947)

통일안은 그 뒤 여러 차례 조금씩 수정되었다. 1937년에 이어 1940년에 수정되면서 ‘마춤법’을 ‘맞춤법’으로 쓰기로 했고, 해방 후에도 1946년과 1948년, 1958년에 각각 부분 개정이 이어졌다.
 
1988년 개정에서는 ‘한글맞춤법통일안’에서 ‘통일안’을 버리고 ‘한글맞춤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일제의 식민 통치 중이었는데 불구하고 이루어진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의 의미는 가볍지 않다. 그것은 처음으로 한글 규범을 마련했다는 점뿐 아니라 우리말의 구조적 특성에 맞게 형태 음운론적 원칙을 도입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맞춤법이라는 점에서 각별한 의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통일안 바탕 <큰사전> 1957년 완간
 
이 통일안을 바탕으로 편찬한 <조선말 큰사전>은 제1권이 1947년에 나왔고 1957년에는 <큰사전>으로 이름을 바꾸어 모두 여섯 권으로 완간되었다.

▲ (한글학회지은) 큰사전(전6권) ⓒ 국립한글박물관

<큰사전>은 한국에서 만들어진 첫 번째 대사전으로, 한국인의 손으로 한국어를 처음 집대성한 것이었다. 큰사전 완간 후 한글학회는 1967년부터 새로운 대사전 간행을 준비한 끝에 1991년에 <우리말 큰사전>을 간행하였다.
 
1443년에 창제되었지만 ‘언문’이나 ‘암클’ 따위로 불리다가 비로소 대중의 문자로 쓰이기 시작한 한글의 맞춤법이 통일되기까지 꼭 490년이 필요했다. 한글은 현존 문자 중에서 가장 합리적인 문자체계로 알려졌고 <훈민정음 해례본>은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반포 570돌을 맞는 2016년의 한국에서 온전히 ‘백성들이 이르고자 할 바’를 능히 펼 수 있게 된 이 문자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 같아 보인다.
 
 

2016. 10. 28.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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