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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순·미선이 8주기, “역사는 바래고 노래는 남는다”

by 낮달2018 2019.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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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순·미선이 8주기에 부쳐

▲ 고 신효순, 심미선(1988~2002)

오늘 아침 <한겨레>를 보고서야 어제가 효순·미선이 8주기라는 걸 알았다. 2002년 6월 13일, 친구 생일잔치에 가던 두 여학생 신효순과 심미선(14)이가 50t 미군 장갑차에 치여 희생되었다. 서둘러 장례를 치르고 사고를 봉합하려던 한미 군 당국의 조치는 전 국민적 저항을 불러왔다.

 

결국, 그해 연말의 대통령선거에까지 영향을 미친 이 사고는 소파(sofa, 한미행정협정)를 비롯한 한미 양국 간 불평등 문제를 상징적으로 드러낸 사건이었다. 사건의 미온적 처리가 국민적인 반미열풍을 부르자 미군은 미 대통령의 간접사과를 전하고 소파 개선방침에도 합의했지만, 가해자들은 미군의 군사 법정에서 무죄 평결을 받고 한국을 떠났다.

 

당시 ‘미군 장갑차 여중생 고 신효순·심미선 살인사건 범국민대책위원회’(여중생 범대위) 문예위원장으로 사회를 보고 집회를 주도했던 우위영 민주노동당 대변인은 자신이 부른 노래, ‘약속, 우리 촛불이 되자’를 논평으로 내놓았다. 그는 민중가요 패 ‘노래마을’의 가수로 활약한 이다.

 

민주노동당 누리집에 실린 그이의 5줄 논평을 읽고 노래를 듣는다. 8년 세월에 사람들의 기억은 바래 가는데 그나마 노래는 그날의 분노와 슬픔을 떠올려준다. 시간은 흐르고 바래는 역사 가운데서 기억과 노래는 남아서 살아남은 자들을 적셔 준다.

 

노래 “약속, 우리 촛불이 되자”

▲ 민주노동당 누리집에 실린 우위영 대변인의 논평 중에서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 사건

- 발생일시 : 2002년 6월 13일 10시 45분
- 발생장소 :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효촌리 56번 지방도
- 피 해 자 : 신효순, 심미선 (당시 14세, 조양중학교 2학년 재학 중)
- 가 해 자 : 미군 운전병 워커 마크 병장, 관제병 페르난도 니노 병장 등
               경기도 파주시 캠프하우즈 미2사단 44공병대대
- 사건 유형 : 공무

2002년 6월 13일 오전 10시 45분경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효촌리 56번 지방도에서 대대 전투력 훈련을 위해 이동 중이던 부교 운반용 장갑차가 앞서 갓길을 걷고 있던 여중생 신효순, 심미선 양을 깔고 지나가 두 명 모두 그 자리에서 숨졌다.

사고 도로는 인도도 따로 없는 편도 1차선의 좁은 도로로, 주민들은 평소 갓길을 인도삼아 통행해 왔다. 그런데 유족들은 당시 사고 차량의 너비가 도로 폭보다 넓은 데다 마주 오던 차량과 무리하게 교행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이번 사고는 이미 예견된 살인행위였다고 주장했다.

미군 당국은 사고 당일 미8군 사령관의 유감의 뜻을 전하고, 다음날인 6월 14일에는 미 2사단 참모장 등이 분향소를 직접 방문해 문상하고, 피해 유가족에게 각각 위로금 100만 원씩을 전달하는 등 발 빠르게 사고 수습에 나섰다. 하지만 정작 사고의 진상 규명에는 소극적으로 나왔다.

미군 측은 6월 14일 저녁 사고 현장에서 유족들을 상대로 일방적인 브리핑을 진행한 데 이어 6월 19일 미2사단에서 한미 합동 조사 결과를 공식 발표했다. 미군 측은 “이번 사고는 결코 고의적이거나 악의적인 것이 아닌 비극적인 사고”임을 강조하며 사고 원인으로 차량 구조상 오른쪽 시야에 사각지대가 있어 운전병이 학생들을 발견할 수 없었고, 관제병이 커브를 돌아 약 30m 전방에서 학생들을 발견하고 운전병에게 경고하려 했지만, 소음과 타 무전 교신 등에 의한 통신 장애로 제 때에 경고가 전달되지 못해 발생한 우발적 사고라고 주장했다. 

또한, 당시 차량은 시속 8~16km의 속도로 중앙선을 넘지 않고 계속 직진 운행 중이었으며 마주 오던 장갑차는 서로 교행하지 않고 사고 차량과 1m 떨어진 지점에서 정차했다고 밝혀 그동안 유족들이 제기해온 사고 차량이 마주 오던 장갑차와 교행하면서 갑자기 우측 갓길로 틀었을 가능성에 대해 전면 부인했다.

하지만 이 발표는 설사 차량 구조상 시야가 제한되더라도 운전병의 고개 방향에 따라 그만큼 시야가 확보될 수 있는 점 통신 장애란 통신장비 고장이거나 헬멧을 착용하지 않는 이상 발생하기 어렵다는 점 궤도차량의 경우 마찰계수가 커서 8~16km의 느린 속도로 운행한다면 제동장치 작동 시 보통 그 자리에서 정지하게 되는데, 어떻게 피해 학생 두 명이 일렬로 누워 두개골이 다 깨질 정도로 완전히 밟고 지나갈 수 있는지 우측 갓길 주변에 갑자기 우측으로 궤도를 틀면서 생긴 것으로 보이는 아스콘이 깨지고, 풀이 눌린 흔적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 등의 의혹들에 대해 속 시원한 대답을 해주지 못하고 있다.

특히, 차량 속도의 경우 지난 현장 브리핑 때는 16~24km라고 했다가 절반으로 줄여서 발표했다. 주민들에 대해 훈련 사실을 사전 통보했는지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통보했다고 했다가 마침 그 자리에 참석한 마을 이장이 전혀 그런 사실이 없다고 반박하자 죄송하다며 바로 말을 바꾸기도 했다. 거기에다 6월 28일 미2사단 공보실장이 라디오 프로에서 “그 누구도 책임질만한 과실이 없다”고 말하면서 비난 여론은 급속히 확산되어 갔다.

사태가 점차 심상치 않게 발전할 낌새를 보이자 미군 당국은 7월 3일 운전병과 관제병을 과실치사죄로 미 군사법원에 기소하는 한편, 라포트 주한미군 사령관의 사과를 전했다. 그와 별도로 한국 검찰도 관련 미군들에 대해 자체 조사를 벌이기로 했다.

이는 유족들이 지난 6월 28일 차량 운전병과 관제병, 미2사단장 등 미군 책임자 6명을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의정부지청에 고소하고, 미측의 재판권 포기를 요청한 데 따른 것이다. 하지만 미군 측은 신변 위협을 이유로 검찰의 소환조사에도 제대로 응하지 않았고, 더 이상 명분이 없던 법무부는 7월 10일, 사상 처음으로 미측에 재판권 포기 요청서를 보냈다.

그러나 8월 7일 미군 당국은 “동 사고가 공무 중에 일어난 사고이고, 이제껏 미국이 일차적 재판권을 포기한 전례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재판권 포기를 거부했다. 한국 검찰이 자체 수사 결과 미군 측의 수사와 기본적으로 같은 결과를 발표한 지 이틀만이었다.

이후 11월 18일부터 23일까지 동두천 캠프 케이시 내 미 군사 법정에서 열린 군사재판에서 배심원단은 기소된 미군 2명 모두에게 무죄 평결을 내렸다. 재판장에서부터 배심원까지 모두 현역 미군인으로 구성된 데다 사건의 진상조차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가운데 진행된 재판 결과란 어차피 뻔한 것이었다. 이들 미군은 무죄 평결이 있은 지 5일 만인 11월 27일, 짤막한 사죄성명을 발표한 뒤 유유히 한국을 떠나갔다.

이는 곧 수많은 한국민들의 저항을 불러왔다. 너무도 비상식적인 재판 결과에 그동안 이 사건에 별 관심이 없던 사람들까지 항의 대열에 합류하면서 전 국민적인 반미열풍을 불러왔다. 이에 위기를 느낀 미군 당국은 11월 27일 주한 미 대사를 통해 부시 대통령의 간접적인 사과를 전하고, 12월 13일에도 부시 미 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 다시 한번 유감을 표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미 당국 간 SOFA 개선방침에도 합의했다. 하지만 국민들의 분노를 가라앉히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미군 당국은 이번 사고와 관련해 무죄 평결 직전 사고 차량 소속 중대장, 중대 선임하사, 소대장, 소대 선임하사 등 훈련 지휘관 4명에게 견책의 징계를 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기도 했다.

한편, 유족들은 국가배상을 신청해 2002년 9월, 각각 1억9천여만 원 상당의 배상금을 수령했다.

사건 일지 (2002)

▷ 6월 13일 여중생 2명 미군 궤도차량에 깔려 사망, 미8군 사령관 유감 성명 발표
▷ 6월 19일 한·미 합동 조사 결과 발표
▷ 6월 26일 여중생 범대위 결성 및 1차 범국민대회
▷ 6월 27일 유가족, 의정부지청에 미군 관련자들 고소
▷ 7월 3일 미군 측, 운전병과 관제병을 과실치사 혐의로 미 군사법원에 기소, 주한미군
    사령관 유감 표명

▷ 7월 10일 법무부, 미측에 일차적 재판권 포기 요청
▷ 7월 20일 법무부, 피해자 1인당 1억9천6백여만 원의 배상금 지급 결정
▷ 7월 29일 의정부지청, 미군 피의자 2명에 대한 소환 조사
▷ 7월 30일 주한 미 대사, 한국 국방장관과 만난 자리에서 사과 표명
▷ 8월 2일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 한미 외무장관 회담 시 사과 표명
▷ 8월 5일 의정부지청, 사고 조사 결과 발표
▷ 8월 7일 미군측, 한국 정부의 형사재판권 포기 요청 공식 거부
▷ 8월 9일 주한미군 사령관, 국방부 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다시 한번 사과 표명
▷ 8월 13일 토머스 B. 파고 미 태평양 사령관, 국방부 장관에게 사과 전달
▷ 8월 29일 존 볼튼 국무부 국제안보차관, 한미협회 연설에서 파월 국무부 장관을 대표
    하여 사과 표명

▷ 9월 18일 여중생 추모비 제막식
▷ 11월 18일~22일 미 군사 법정에서 관제병과 운전병 두명 모두에게 무죄 평결
▷ 11월 27일 부시 미 대통령, 주한미국대사 통해 간접 유감 표명
▷ 12월 2일~11일 여중생 범대위 미국에 대표단 파견, 항의 시위
▷ 12월 5일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 한미 국방장관 공동기자회견에서 유감 표명
▷ 12월 11일 한미 외교·안보 당국 간 회의에서 SOFA 운영 개선 특별팀 구성 합의
▷ 12월 13일 부시 미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 유감 표명
▷ 12월 14일 여중생 사건 이후 최대 규모의 범국민대회 (전국적으로 약 10만여 명 집결)
▷ 12월 16일 미군 당국이 무죄 평결 직전 사고 차량 소속 중대장, 중대 선임하사, 소대
    장, 소대 선임하사 등 훈련 지휘관 4명에게 견책의 징계를 한 것으로 뒤늦게 알려짐


출처 :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 노래 듣기 https://www.youtube.com/watch?v=t551L2mYU_U

 

 

2010. 6. 14.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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