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륙의 섬마을 예천 회룡포와 삼강주막
* 가로 사진은 누르면 더 큰 사진으로 볼 수 있음.
‘물돌이동’은 하회(河回)의 다른 이름이다. 낙동강이 그 유장한 흐름으로 마을을 휘감고 흘러가는 형국이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모두 그만그만한 우리 하천들의 규모와 배산임수의 땅에다 터를 잡아온 선인들의 지혜를 헤아려 보면, 그런 모양새의 마을은 쌔고 쌨어야 한다.
경북 예천군 용궁면 대은리 회룡포(回龍浦) 마을도 그런 마을 중 하나다. 하회마을보다는 덜 유명하지만, 관광자원을 개발하려는 지방자치단체의 이해와 저마다 승용차를 부리는 시대에 힘입은 데다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TV 드라마 ‘가을동화’ 덕분에 온 나라에 알려졌다.
<가을동화> 덕에 널리 알려진 회룡포
하회와 다른 점이라면 그 물이 낙동강 상류의 지류 내성천이라는 점과 그것이 휘감고 있는 마을이 명문거족 하회 류(柳)씨의 양반 마을이 아닌 소박한 농촌 동네라는 것뿐이다.
물이 휘감고 도는 각도는 오히려 하회보다 더 크고 둥글다. 이 각도가 350°라는데 마지막 10°에 해당하는 부분이 이웃 개포면과 이어지니 ‘육지 속의 섬마을’이라는 표현은 사실이 아닌 셈이다.
이 마을을 소개하는 글에는 ‘강이 산을 부둥켜안고 용틀임을 하는 듯한 특이한 지형의 회룡포’라 하지만, 원래 이름은 의성포였다. 이웃 의성군과 혼동된다고 하여 ‘회룡포’로 불리게 되었는데, ‘용틀임’ 따위의 과장도 그리 새삼스럽지는 않다.
이 땅에 흔하디흔한 명명법일 터이나 이곳 지명이 ‘용궁(龍宮)’이니 용이 있어도 무방하겠다. 마을 건너편의 산이 높이 190m의 비룡산인데 회룡포에서 용틀임한 용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언덕이라 보면 얼추 격이 맞아떨어진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두 군데다. 차를 타고 들어가려면 인근 개포에서 비포장길로 가야 하고, 용궁에서 들어가려면 부득이 공사장에서 흔히 쓰는 구멍 숭숭 뚫린 철판(비계용 발판) 두 개의 폭으로 이어진 이른바 ‘뿅뿅다리’를 건너 걸어가야 한다.
이태 전만 해도 속이 훤히 비치는 얕지만 맑은 물 위에 뜬 듯하기도 하고, 더러는 물에 살풋 잠기기도 하는 나지막한 다리였는데 지금은 두어 자쯤 높여 놓았다. 시간에 쫓기지 않는다면 다리를 천천히 건너가 보는 것도 쓸 만하다. 10여 가구밖에 남지 않은 호젓한 마을을 가로질러 저 끝자락부터 강둑을 따라 한 바퀴 돌아 나오는 것도 괜찮은 경험이다.
값싼 사진기로 찍어도 감동은 다르지 않다
산은 산을 나와야 보인다. 마을을 보려면 뿅뿅다리를 건너와 물을 따라 완만하게 누운 비룡산을 올라야 한다. 잘 정돈된 산책로를 따라오르면 ‘회룡대’란 이름의 전망대가 있다. 요즘 이름난 경승(景勝)에서 흔히 보듯, 거기엔 시커멓고 커다란 수백만 원짜리 사진기를 든 사진가들이 삼각대를 세워놓고 오래 뜸을 들여 풍경을 담고 있는데, 무어 그리 기죽을 일은 없다.
우리가 가진 손바닥 안에 드는 보급형 디카로도 회룡포 마을의 아름다운 모습쯤은 담아내고도 남으니까. 이태 전에 찍은 400만 화소짜리 똑딱이 디카로 찍은 사진이나 천만 화소의 DSLR 카메라로 찍은 것이나 그것이 주는 감동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아쉬웠던 점은 거리가 마땅치 않아 마을을 안고 도는 강물을 담을 수 없었다는 점뿐이다.
10월 초순의 회룡포 마을은 고즈넉했다. 이태 전보다 볏논의 면적이 줄어든 게 뚜렷하다.
정갈하게 갈아놓은 밭에 10여 동이 넘는 비닐하우스가 이마를 맞대고 서 있는데, 빼곡히 들어찬 나무 사이로 얼굴을 내민 빨갛고 파란 기와와 슬레이트 지붕이 정겹게 다가온다. 거기 사는 사람들의 고단한 삶과는 무관하게.
갈수기로 가까워져 내성천의 수량이 줄고 있는지 마을을 휘감고 펼쳐진 백사장이 허옇게 그 켜를 드러내고 있는데, 멀리 뿅뿅다리는 마치 지워진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성곽처럼 마을 가장자리를 삥 둘러싼 둑길이 외롭다.
전망대에서 마을 반대편으로 내려가면 장안사(長安寺)가 있다. 천년고찰이라지만 지금의 절집은 1984년부터 ‘불자들의 간절한 원력으로 일으켜 세운’ 것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국태민안을 염원하여 전국 세 곳의 명산에 장안사를 세웠으니, 금강산과 양산(지금은 부산 기장), 그리고 이곳 국토의 중간인 용궁 비룡산에 깃든 장안사가 그것이다.
몇 해 전, 동종(銅鐘)이 땀을 흘린다 하여 한 지상파 방송이 화제로 보도하기도 했던 이 절집의 초창주(初創主)는 신라 경덕왕 때(759) 의상대사의 제자인 운명조사. 중창주(重創主)로 고려 명종 때의 지도림(支道林) 화상이 있는데, 그와 교유한 고려 문인 이규보가 이 절집에 머물다 가며 남긴 시편이 회룡대에 걸려 있다.
산에 이르니 번뇌가 쉬어지는구나.
하물며 고승 지도림을 만났음이랴.
긴 칼 차고 멀리 날 때에는 외로운 나그네 마음이더니
한 잔 차로 서로 웃으니 고인의 마음일세.
맑게 갠 절 북쪽 시내엔 구름이 흩어지고
달 지는 성 서쪽 대숲에는 안개가 깊구려.
병으로 세월을 보내니 부질없이 졸음만 오고
옛 동산 소나무와 국화는 꿈속에서 잦아드네.
‘가족 건강’에서 ‘로또 1등 당첨’까지
절집 뜰에 차곡차곡 쟁여 놓은 기와는 기와 불사의 흔적인데, 기왓장마다 쓰인 갖가지 기원은 산문(山門) 도량에 들어도 떨치지 못하는 번뇌의 한 끝일지도 모른다.
대박의 꿈은 절집에 와서도 쉽사리 사위지 않는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로또 2등 이상 당첨’이나 ‘로또 1등 당첨’으로 원망(願望)의 조건도 다양하다.
반면에‘아토피 퇴치’, ‘스케이트를 잘 타게 해주소’라거나 ‘이사 가서 페럿(유럽긴털족제비 품종의 하나)을 기르게 해주세요’라는 소박하고 간절한 기원들도 있다.
어쩌면 앞과 뒤 두 기원 사이는 진흙과 연꽃, 번뇌와 해탈 사이만큼이나 멀지도 모른다.
다시 비룡산의 산책로 따라 길을 재촉하면 낙동강·내성천·금천(錦川)의 세 물줄기가 합쳐지는 삼강(三江)을 만나게 되지만 거기 남았던 ‘마지막 주막집’이었다는 ‘삼강주막(경북 민속자료 304호)’을 찾으려면 다시 차에 올라야 한다.
낙동강과 내성천, 금천의 세 강줄기가 몸을 섞는다고 해서 ‘삼강’이란 이름을 얻은 곳은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다. 삼강은 한때 낙동강 하구 김해에서 올라오는 소금 배가 하회마을까지 가는 길목이어서 내륙의 미곡과 소금을 교환하던 상인과 보부상들로 북적이던 곳이었다. 그 나루터 곁, 200살이 넘은 회화나무 그늘에 삼강주막이 있다.
이 주막이 들어선 것은 1900년께. 소발에 짚신 신겨 서울로 몰고 가던 소몰이꾼이 소를 싣고 강을 건너기도 해 삼강 나루가 붐볐을 때는 소 여섯 마리를 실을 수 있는 큰 배와 작은 배, 두 척이 있었다고 한다. 일제 말기까지는 소금 배 상인과 보부상이, 소금 배가 끊긴 후에는 강을 건너 읍내와 서울·대구 등지로 가려는 주민과 나그네들이 이 주막의 길손이었다.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70년대 다리가 놓이고 제방이 생기면서 주막은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나루에 인적이 끊어졌으니 주막을 지나는 길손도 끊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 더구나 2004년 봄에 삼강교가 개통되면서 호젓했던 삼강의 풍광마저 사라졌다.
마지막 주모의 한이 서린 삼강주막
철근 콘크리트를 지은 우람한 다리 삼강교 밑에 폐가가 된 주막은 초라하고 쓸쓸했다. 퇴락한 팔작 형태의 슬레이트 지붕은 그나마 새마을운동의 은전을 입은 걸까. 우리 시대의 ‘마지막 주모(酒母)’였던 옛 주인이 세상을 떠난 것은 그이가 아흔 살이던 2005년이다. 열여섯 살에 네 살 위 남편과 혼인한 그이가 이 주막의 주인이 된 것은 3년 뒤, 꽃다운 열아홉 살 때였다던가.
그이는 이 주막에서 5남매를 길렀고, 반세기 전에는 남편을 먼저 떠나보냈다. 드센 나루터 주막을 꾸려가는 고단한 세월에 아로새겨진 상처는 또 얼마일까. 그이가 흙벽에다 그어 놓은 가로 세로의 금이 외상장부였다는 것은 호사가들에겐 전설이 되었지만, 그 바람벽에 새기지 못한 ‘술어미’의 한과 슬픔은 또 얼마였을지.
6년 전 처음 이 주막을 찾았을 때와 다르지 않게 삼강주막은 거기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낡고 헌 흙벽의 속살을 드러내고 방문을 죄다 열어젖힌 채. 사람들은 왜 이 낡은 주막집을 잊지 못해 잊을 만하면 다시 찾는 걸까. 우리가 주모에게 청해 소주를 마셨던 방의 문은 문살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채 간신히 돌쩌귀에 걸려 있었다.
임자를 잃은 지 어언 이태. 주인이 세상을 떴던 그해 연말에 이 낡은 주막집은 경상북도 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 ‘규모는 작지만, 그 기능에 충실한 집약적 평면구성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어 건축역사 자료로서 희소가치가 크고 옛 시대상을 읽을 수 있는 지역의 역사와 문화적 의의가 커서’다. 경상북도는 낙동강 1300리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이 조선시대 주막의 복원 사업을 올해 안에 시작한다고 한다.
주막이 복원되면 사람들은 한갓지게 승용차와 관광버스를 타고 와 이 ‘전근대’의 풍경에 머물다 저 ‘낡은 시절’의 향수에 젖다 갈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만나는 것은 다만 한 시대의 모사(模寫)와 재현일 뿐, 그 시절 사람들의 땀내와 피 울음으로 얼룩진 한 시대의 고단한 삶은 아니리라.
삼강리를 떠나는데 누렇게 익어가는 볏논과 주변 무성한 코스모스 더미 너머 웅크린 주막의 모습이 아련히 멀어 보였다. 열린 방문으로 사람 좋은 넉넉한 미소로 나그네를 맞던 여섯 해 전 주모의 모습이 얼핏 스쳐 간 것 같기도 했다.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삼강교 위에 차를 세우고 우리는 세 물줄기가 하나로 섞여 흘러가는 강물을 잠깐 굽어보았다. 뒤척이며 흐르는 강물 저편에서 지난 세기의 시간과 역사도 흘러갔을 터였다. 그렇다. 삼강의 나루터와 주막에 모이는, 사람들의 ‘오래된 그리움’은 이 밀레니엄 시대에 여전히 우리의 마음이 넘지 못하고 있는 19세기, 그 ‘전근대의 실루엣’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2007. 10. 1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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