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의 ‘한국전쟁 형곡동 폭격 민간인 희생자 76주기 추모식’
*PC에서 ‘가로 이미지’는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으로 볼 수 있음.



구미 산 지 14년 만에 알게 된 형곡동의 비극
구미에 옮겨와 산 지 14년이 되었다. 그런데 이 도시에 6·25전쟁 중 미군기의 폭격으로 무고한 주민과 피란민 등 130여 명이 희생된 비극이 있었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전쟁 초기, 북한군에 낙동강까지 밀려 마지막 방어선을 치고 반격하던 시기의 일이라고 했다.
구미는 잘 알다시피 박정희 전 대통령을 낳은 고장으로, 196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에 걸쳐 내륙지역에 개발된 대표적인 산업기지다. 구미는 섬유, 전자, 반도체 등을 중심으로 발전한 국가산업단지에 힘입어 포항에 이은 경북의 두 번째로 큰 도시로 성장했고, 보수 정당이 모든 선거를 거의 독식하면서 이른바 ‘보수의 성지’로 불리고 있다.
미군기 폭격으로 무고한 주민들이 희생된 동네는 시내 형곡동이다. 금오산의 효자봉과 남동고개(지금의 금오산 전망대)에서 내려오는 두 개의 골짜기인 부엉이곡과 불당곡 일대를 개발하여 이루어진 동네로 원평동·송정동과 함께 구미에서 가장 먼저 형성된 원도심이다.

예부터 시무나무가 많은 골짜기라 하여 ‘가시 형(荊)’과 골짜기 곡(谷)을 써서 ‘형곡’이라 불렀다. 구미시 누리집에서는 시무나무가 ‘가시나무의 옛말’이라고 쓰고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일반적인 ‘가시나무’는 참나뭇과에 속하며 상록성 성질을 지니지만, 시무나무는 어린 가지가 날카로운 가시로 변하는 특징을 가진 느릅나뭇과의 낙엽교목이기 때문이다.
주민은 굳이 피란을 떠나지 않았고 피란민도 들어와 살았다
6·25전쟁 당시 형곡동은 70가구가 사는, 시무나무가 많은 ‘시무실’ 마을과 신라 때 양곡을 보관하던 창고가 있어 붙여진 ‘사창(司倉)’ 마을(60가구) 등 두 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있었다. 형곡동은 산으로 둘러싸여 6·25전쟁에도 안전하다고 소문이 난 곳으로 주민은 굳이 피란을 가지 않았고, 피란길에 나섰다가 낙동강을 미처 건너지 못한 다른 지역 피란민도 들어와 살고 있었다.

당시 구미 아래의 칠곡군 왜관읍 지역은 1950년 8월 4일부터 9월 18일까지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일원에서 북한군의 공세를 막아낸 낙동강 방어선 전투가 이루어진 6·25 전쟁 최대의 격전지이자 최후의 보루였다. 낙동강 유역과 칠곡(다부동), 영천, 포항, 마산 일대로 이어진 이 지역을 미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중장의 이름을 따 ‘워커 라인(Walker Line)’이라 불리기도 했다.
워커 장군이 천명한 ‘더 이상의 후퇴는 없다(Stand or Die).’ 정신으로 방어선을 고수함으로써 한국군과 유엔군은 전세 역전의 교두보를 확보했고, 이는 성공적인 인천상륙작전(9월 15일)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대구 함락 우려한 미군이 감행한 낙동강변 ‘융단 폭격(carpet bombing)’
8월 11일, 육군본부는 국군의 방어선을 303고지(왜관 북쪽 작오산 303.2m)∼다부동∼군위∼보현산을 잇는 선으로 축소 조정했다. 이에 따라 국군 제1사단과 제6사단은 다부동∼군위 선에서 대구를 방어하게 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미 극동 공군사령부는 8월 16일(음력 7월 3일) 낙동강 강변에 이른바 ‘융단 폭격(carpet bombing)’을 단행했다.
이는 대구 정면이 위태롭다고 판단한 미 제8군사령부가 낙동강 대안의 적 주력부대를 제압하기 위해 유엔군사령부에 건의해 실시된 폭격이었다. 융단 폭격의 성과는 명백하게 확인되지 않았으나, 북한군 지휘관들에게 대단히 큰 심리적 충격을 준 것으로 판단되었다고 한다.

구미 형곡동이 이 융단 폭격의 목표가 되어 무차별 폭격을 당한 것은 미군 문서로써 입증된다. ‘제1기병사단 병력은 8월 16일 칠곡군 왜관의 사각 지역에 B-29 융단 폭격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로버트 푸트렐(Robert F. Futrell) 박사가 쓴 한국전쟁 당시 미 공군의 작전을 기록한 공식 전사(戰史)인 《The United States Air Force in Korea, 1950-1953, 개정판 1988》는 기술하고 있다.
낙동강 서쪽인 칠곡군 약목면과 구미 사이 가로 5.6㎞, 세로 12㎞의 직사각형 구역이 대구를 공격하기 위한 적의 주력이 몰려 있던 곳으로 판단된 폭격 대상이었다. 미 공군은 이 직사각형 지역을 남에서 북으로 정밀하게 구획해 빈틈없이 폭탄을 퍼부어 지역은 쑥대밭이 되었다. 폭격의 표적이 된 형곡동은 참혹한 죽음의 현장으로 바뀌었다.
푸트렐은 “이날 폭격은 맥아더 장군의 지시와 오도넬 준장의 지휘로 이뤄졌고, 미군은 폭격 지역을 12곳으로 나눠 지역당 폭격대대를 보내 자유낙하 폭탄 500파운드 형 3천84기와 1천 파운드 형 150개를 투하했다”라고 쓰고 있다.

폭격을 목격한 이들은 “1950년 8월 16일 오전 8시쯤 비행기 정찰에 이어 오전 10시쯤 B-29 폭격기 2개 편대가 남쪽에서 날아와 1시간 동안 폭격과 기총소사 공격이 있었다”라고 증언했다. “이날 폭격으로 시무실과 사창 마을의 희생자는 131~133명에 이른다. 형곡 냇가에 모여있던 수많은 피란민이 희생되면서 사상자 핏물이 한여름 냇가에 흐를 정도로 참혹했다”라는 증언도 여러 곳에 기록되었다. [피해 증언은 맨 아래 그래픽 참조]
폭격, 그리고 잊힌 죽음들 …, 사건 정식 명칭도 없다
전쟁 중이긴 하지만, 아무런 사전 경고도 없이 무차별 폭격으로 주민들이 사는 마을들을 결딴낸 이 사건은 그러나 역사에 묻혀서 오래도록 잊혔다. 한날한시에 가족을 잃은 유족들이 매년 음력 7월 3일 밤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밝힌 불빛만이 희미하게 이어졌다.
이번에, 이 사건을 처음 알게 되어, 정확한 정보를 찾으려고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서 느낀 점은 이 사건의 정식 명칭이 없다는 것이었다. 전쟁 중 미군이 민간인을 공격하여 다수가 희생된 사건으로 ‘노근리 사건’이 있는데, 이는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으로도 불린다. [관련 글 : 충북 영동 노근리, 미군이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하다]
그런데, 이 ‘형곡동 사건’은 이 사건을 매우 상세하게 보도한 지방지 <영남일보>에서도 명확한 명칭 없이 기사를 쓰고 있다. 또, 기사 가운데, ‘미군 오폭’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과연 이 사건을 ‘오폭’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오폭(誤爆)은 “폭탄을 정하여진 대상이나 위치가 아닌 곳에 폭격함”(표준국어대사전)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미군 전폭기가 형곡동을 폭격한 것은 작전 명령에 명기된 ‘가로 5.6㎞, 세로 12㎞의 직사각형 구역’ 안이었으니, 이를 오폭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숨을 죽이며 살아온 유족들이 형곡동위령탑건립위원회(이하 위원회)를 결성한 것은 사건 뒤 42년이 지난 1992년이었다. 위원회는 국방부에 진실 규명과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진정을 하였으나, 국방부의 반응(“미국의 ‘미’도 꺼내지 말라”)은 냉담했다.
과거사정리위원회, 미군 폭격으로 최소 29명 사망 확인
위원회는 또 1992년에 이어 2005년에도 구미시에 위령탑 건립을 요구하는 진정을 했으나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답변만 받아야 했다. 2006년 위원회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진정했고, 과거사위는 ‘2010년 6월 미군 폭격으로 최소한 29명이 사망했다고 규명한 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희생자 위령 사업을 지원하라’고 권고했다.
과거사위는 미군 문서를 통하여 ‘미8군은 형곡동·왜관읍 등에 B-29 융단 폭격을 준비하라’고 명령한 내용을 확인했다. 미군은 임시 수도 대구의 함락을 우려해 적군의 전투력과 사기를 꺾을 목적으로 인민군 병력이 은신했다고 의심한 민간인 마을을 폭격했다. 그러나 유족들은 당시 마을엔 인민군이 없었다고 진술했고, 이에 따라 과거사위는 미군 폭격을 인정한 것이었다.

과거사위의 권고에 따라 구미시의 지원으로 형곡동 산33-5번지에 ‘6·25전쟁 형곡동 폭격 희생자 위령탑’이 세워진 건 2016년 8월로, 사건 뒤 66년 만이었다. 그리고 거기까지였다. 이후 유족들의 활동도 이어지지 않았고, 정부나 구미시에서도 문제 해결을 위한 어떤 움직임도 보여주지 않았다.
우리 사회는 박정희와 전두환, 노태우 집권 시의 권위주의 정부 시기를 힘들여 건너왔다. 더는 정부의 눈치를 볼 일도, 그래서 개별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양보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도 유족들의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 같은 요구가 이어지지 못한 부분은 아쉽다. 그것은 어쩌면 이른바 ‘보수의 성지’라고 하는 구미의 지역성이 걸림돌이 아니었을는지. 정부와 미국을 향해서도 당당히 그 책임을 묻는 일은 절대 주저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
지난 16일 오후 4시, 종일 비가 내리는 형곡동 위령탑 앞에 천막을 친 가운데, ‘한국전쟁 형곡동 폭격 민간이 희생자 76주기 추모식’이 베풀어졌다.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역위원회가 주최 주관한 이 추모식은 유족과 형곡동 주민, 민문연을 비롯한 구미의 시민단체 회원 등이 모인 가운데, 불교, 천주교, 기독교의 종교의식 등이 치러졌다.





구미 대둔사 서원 스님, 군위 천주교 묘원의 임성호 신부, 구미 새길교회 김정락 목사가 각각 집전한 종교의식에서는 희생자의 명복을 빌고, 사건과 진실 규명과 명예 회복 등을 촉구했다. 특히 이 의식들에서 ‘국가 폭력’이라는 화두가 등장하기도 했다.
비록 전쟁 중에 참전한 미군의 군사작전으로 빚어진 사건이긴 하다. 그러나 무고한 시민들 다수가 폭격에 희생된 이 사건이, 사건 이후 76년이 지났는데도 배상·보상이나 명예 회복은커녕 진상 규명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건 또 다른 의미에서 ‘국가 폭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자국의 안보조차 유엔에 의지해야 했던 가난한 분단국가 대한민국은 경제, 외교, 국방,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세계를 선도하는 절대 강소국의 반열에 올랐다. ‘대체 불가’ 대한민국을 말하려면, 형곡동에서 희생된 무고한 시민들의 죽음이 역사의 침묵과 어둠을 뚫고 햇살 아래 당당히 드러나야 하지 않겠는가.


2026. 8. 19. 낮달
* 참고
· 백종현, [대구 경북 아픈 역사의 현장] (4) 미군 폭격기 모심듯 융단폭격...매년 음력 7월3일 밤이면 집집마다 불 켜는 구미 형곡동, 영남일보, 2021.08.31.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 풍진 세상에 > 선산(구미)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옛 쓰레기 매립장 위에 피어난 수국(水菊)의 정원 (2) | 2026.07.06 |
|---|---|
| ‘느티나무 가로수 터널’ – 도리사 가는 길 (2) | 2026.07.03 |
| 수도산에서의 하룻밤, 그리고 귀로의 방초정(芳草亭) (2) | 2026.06.19 |
| 들성 산림공원, 저수지 옆 산비탈의 나무와 숲 (1) | 2026.06.01 |
| ‘세렝게티’에 견주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답다, 구미 ‘강정 습지’의 풍경 (2) | 2026.05.3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