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선산(구미) 이야기

수도산에서의 하룻밤, 그리고 귀로의 방초정(芳草亭)

by 낮달2018 2026. 6. 19.

수도산 자연휴양림에서 1박, 그리고 귀로에 들른 정자 방초정(芳草亭)

*PC에서 ‘가로 이미지’는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으로 볼 수 있음.

▲ 수도산(1,317m)은 가야산 북서쪽, 김천시 증산면과 경남 거창군 가북면의 경계에 우뚝 솟은 산으로 고찰 청암사, 수도암을 품고 있다.
▲ 수도산 자연휴양림 안의 시설을 잇는 포장 도로변에 피어난 덩굴장미가 아름다웠다.

아내의 생일이 가까워지자, 어디 휴양림에라도 가서 하루 묵고 오면 좋겠다 싶었다. 처음엔 영주의 국립산림치유원으로 갈까 했었다. 숲이 주는 치유 효과를 경험하는 공간으로, 치유숲길과 수(水) 치유센터, 숙박 시설 등을 갖춘 곳인데, 숙소에는 TV나 에어컨, 와이파이가 없다고 했다.

 

영주의 국립산림치유원 대신 찾은 김천 수도산 자연휴양림

 

고작 하룻밤 쉬고 올 텐데, 길이 멀었다. 가까운 김천 수도산자연휴양림(김천시 대덕면 증산로 326-71)으로 가는 거로 계획을 바꿨다. 지난 11일 목요일 오후에 길을 나서 한 시간가량 달려서 수도산 자연휴양림에 닿았다. 수도산은 거기 깃들인 통일신라 시대의 고찰 청암사(靑巖寺)와 수도암(修道庵)으로 알려진 산으로 ‘불령산(佛靈山)’이라 불리기도 한다. [관련 글 : 그 절집에서 굳이 ‘비구니’를 찾지 말라]

 

가야산 북서쪽, 김천시 증산면과 경남 거창군 가북면의 경계에 우뚝 솟은 수도산(修道山, 1,317m)은 웅장한 산세와 울창한 숲이 아름답다. 산 이름은 통일신라 도선국사가 창건한 수도사(지금은 청암사 부속 암자인 수도암)에서 말미암았는데, 산자락에 국립 김천 치유의숲과 인현왕후 길이 있어 숲속 트레킹과 산림치유를 즐길 수 있다.

 

수도암으로 오르는 계곡은 조선 중기의 학자 한강 정구(1543~1620)가 명명한 무흘구곡(武屹九曲) 가운데 일부다. 한강은 주희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따 성주 대가천을 거슬러 오르며 풍광이 빼어난 아홉 곳을 무흘구곡이라 이름 붙였다. 무흘구곡의 1곡부터 5곡까지는 성주에, 6곡부터는 김천시에 있는데 이 수도계곡이 바로 7곡부터 9곡에 해당하는 곳으로 경치가 빼어난 곳이다.

▲ 우리가 하룻밤 묵은 수도산 자연휴양림 숲속휴양관은 2층의 목조건물이었는데, 당일 이 숙소에 묵은 이는 우리뿐이었다.
▲ 숙소에서 내려다본 수도산 자연휴양림의 시설을 잇는 내부 포장도로. 숲은 울창했고, 평화로웠다.
▲ 숲속휴양관 주변의 느티나무. 주변은 입산이 금지된 빽빽한 숲으로 둘러싸였다.

아름다운 수도계곡을 기대했지만, 휴양림은 다른 쪽

 

구미로 옮겨온 이듬해에 처음 수도산과 청암사, 수도암을 찾았는데, 자연휴양림은 처음이었다. 나는 휴양림이 수도계곡과 가까운 곳에 자리 잡은 곳으로 여겼지만, 나중에 확인하니 방향이 달랐다. 우리는 휴양림 관리소에서 숙소의 열쇠를 받고 간단한 안내를 받은 후 내처 달려서 휴양림 끄트머리에 있는 숲속휴양관 102호에 들었다.

 

숲속휴양관은 목조 2층이었다. 4인실(33㎡)인데, 지은 지 오래된 흔적이 역력했다. 텔레비전 한 대가 덩그러니 놓였을 뿐, 침대도 소파도 없는 좌식이었다. 그나마 주방은 갖춰져 있었는데, 욕실에는 순간온수기로 온수를 공급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하룻밤 묵어가는 데 그게 무어 문제겠는가.

 

아마 휴양관에 든 숙박객은 우리가 다인 모양이었다. 잠깐 숙소 둘레를 돌아보고 미리 포장해 간 돼지국밥으로 저녁을 먹었다. OTT 서비스에 접속(꽤 오래된 텔레비전인데 그게 됐다)하여 영화를 한 편 보듯 마는 듯했고, 나란히 누워서 각자 스마트폰과 태블릿을 들여다보며 시간을 보냈다.

 

산골의 밤은 어두웠는데, 바깥 도로에 가로등이 불을 밝히고 있었지만, 하늘에 뜬 별이 하나둘 헤아려졌다. 잠자리를 바꾸었지만, 우리는 산골의 밤을 편안하게 잤다. 새벽에 일어나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7시쯤, 어제 남은 음식을 끓여 아침을 먹었다.

▲ 숙소 앞 축대 아래에는 마가목이 심어져 있었다. 마가목의 열매가 제법 굵다.
▲ 휴양림 안 내부 진입도로의 추량교에서 내려다본 계곡. 수량은 많지 않았지만, 계곡은 깊었다.
▲ 수도산 자연휴양림의 내부 진입도로의 다리 추량교 근처에는 덩쿨장미가 곳곳에 피어 있었다.
▲ 휴양림 내부 도로 가에 피어난 샤스타 데이지. 순간 구절초가 벌써 하고 착각할 뻔했다.
▲ 휴양림의 도로 갓에는 이제 수국이 이제 막 꽃을 피우기 시작하고 있었다.
▲ 숲속의집 아래 비탈의 새집인 듯한 구조물. 실제로 새집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 휴양림인데도 숲속 산책길도 하나 없어서 매우 아쉬웠지만, 나무와 숲은 푸르고 아름다웠다.
▲ 휴양림을 떠나면서 찍은 휴양림 입구의 진입로.

휴양림인데…, 산책로 하나 없다

 

그리고 떠나기 전에 산책에 나섰다. 그런데 어디 산책로 같은 데가 있나 싶어 살펴봐도 보이지 않는다. 숙소 뒤쪽 숲으로 오르는 언덕도 쇠사슬로 입산을 막고 있었다. 우리가 거닐 수 있는 길은 숲속의 집, 힐하우스, 숲속수련관 등 각 숙소로 이어지는 포장도로뿐이었다.

 

길가에는 막 꽃이 피기 시작한 수국과 잠깐 구절초로 착각하게 한 샤스타데이지, 그리고 계곡을 가로지른 다리 주변에 심어진 덩굴장미가 고왔다. 그래도 길가의 빽빽하게 자란 숲과 그 숲이 드리우는 그림자와 산세는 충분히 멋지고 아름다웠다.

 

9시쯤 우리는 짐을 챙겨 숙소를 나섰다. 입구의 관리소에 숙소 열쇠를 반납하고 나는 잠깐 시설이 너무 낡았다, 어떻게 휴양림에 산책로도 하나 없냐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젊은 관리인은 동감이라며, 곧 숙소는 리모델링으로 들어가긴 하는데, 하고 말끝을 흐렸다. 김천시에서 관리하는 공립 자연휴양림이 때를 벗으려면 막대한 예산이 필요한데 그게 만만찮다는 뜻이겠다.

▲ 귀로에 구성면 상원리에 있는 정자 방초정은 방초 이정복이 임진왜란 이후에 조성한 것으로 짐작되는데 2019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 방초정 앞 연못인 '최씨담' 주변에는 왕버들 고목과 소나무, 배롱나무 등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 방초정 앞 최씨담 연못가에 세워진 '충효' 빗돌과 '방초정' 표지석
▲ 최씨담 못 가운데 원형의 섬 두 개를 조성하여 나무를 심었다. 연못가에는 아름드리 왕버들과 소나무, 배롱나무가 무성하다.

오다가 구성면 상원리에 있는 정자 방초정(芳草亭)에 들렀다. 나는 다녀갔지만, 아내는 초행이어서다. 상원리 원터마을은 15세기 말, 이 지역에서 세거해 지역 명문가로 성장한 연안 이씨 집성촌이다. 이 정자는 방초(芳草) 이정복(1575-1637)이 임진왜란 이후에 조성한 것으로 짐작되는 이 정자는 몇 차례의 중수 뒤 1787년에서 1788년에 걸쳐 ‘5량가 3칸(五架而三間)’ 규모로 중건하였다. [관련 글 : 수백 년간 연못에 수장된 비석의 정체]

 

창건자의 호를 딴 방초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락집인데 규모보다 훨씬 더 크고 높아 보인다. 중심부에 한 칸 크기의 온돌방을 꾸미고 사방으로 개방된 마루방을 둔, 영남에서는 보기 드문, 이른바 ‘중재실형(中在室型)’의 정자로 2019년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방초정은 정자의 아름다움이나 가치보다 정자 앞 네모 난 연못에 얽힌 전근대적 열행(烈行)과 상전에게 바친 노비의 충(忠) 서사가 오히려 흥미롭다. 방초와 혼인한 화순 최씨는 신행길에 임란을 맞았는데, 시가에서 죽겠다며 원터마을로 오다가 왜병을 만나자, 정절을 지키고자 못에 투신한 열행의 주인공인데 그때 그녀는 열일곱이었다.

▲ 연못 이쪽에서 바라본 방초정. 중심부에 한 칸 크기의 온돌방을 꾸미고 사방으로 개방된 마루방을 둔 드문 형식의 정자다.
▲ 처음 왔을 때와 달리 연못에는 좌우를 가로지르는 데크 길이 만들어져 있었다.
▲ 연못에 뿌리 내린 왕버들 고목 가지 너머로 보이는 방초정이 오히려 아름답다. 오른쪽 작은 건물은 최씨 부인의 정려각이다.
▲ 최씨 부인의 정려각 앞 자주달개비꽃 너머 투박한 돌비는 최씨를 뒤따른 여종 석이의 빗돌이다.

정자보다 연못에 서린 전근대의 서사가 흥미롭다

 

뒷날 방초정 앞에 연못을 조성하면서 최씨의 열행을 기려 최씨담(潭)이란 이름이 붙었다. 정자 오른쪽의 정려각 안에 최씨의 정려문과 정려비가 함께 세워졌다. 정려각 앞에 투박한 돌비 하나가 섰는데, 그는 최씨의 여종 석이(石伊)를 기리는 빗돌이다. 최씨 부인이 못에 몸을 던지자, 함께 뛰어든 노비 석이도 상전을 뒤따랐다고. ‘忠奴石伊之碑(충노석이지비)’ 여섯 자가 서툴게 새겨진 이 비석은 연안 이씨 후손들이 여종 석이의 영혼을 위로하려고 지은 것이다.

 

최씨담 못 가운데 원형의 섬 두 개를 조성하여 나무를 심었다. 연못가에는 아름드리 왕버들이 수면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고, 섬에 심어진 배롱나무에도 잎이 무성했다. 수백 년 묵은 지역 명문가의 호사스러운 정자보다 그 앞 연못에 드리워진 저 슬픈 중세의 서사, 열과 충이 6월의 햇살 아래서 무심하게 서려 있었다.

 

마을로 드는 고샅길 저편 밭에는 남녀 일꾼 여럿이 양파를 수확하고 있었고, 도로 너머에는 복숭아가 노랗게 익어가고 있었다. 언제 날씨가 선선해지면 정자에 한번 올라 보아야지 하고 생각하다가 사진 몇 장을 서둘러 찍고 우리는 원터마을을 떠났다.

 

 

 

2026. 6. 19. 낮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