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현대사, 절망의 시대에 보내는 청년의 고독과 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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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림(1943~2015) 시인의 시 ‘빙하기(氷河期)’를 만난 것은, 고등학교에 입학한 해였는지, 문과를 선택한 이듬해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시에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지만, 소설에 대한 관심으로 문예 동아리에 들어가 활동하였는데, 같은 학급의 시를 쓰는 동아리 친구가 소개해 준 시가 ‘빙하기’였다.
고교 시절에 만나서 달달 외웠던 시, 이가림의 ‘빙하기(氷河期)’
나는 그걸 비망록으로 쓰는 대학노트에 2쪽에 걸쳐 필사하였는데, 단박에 그 시에 빠졌다. 물론, 시를 제대로 이해해서가 아니라, 거기 현란하게 구사되는 멋진 시어들을 짜맞추는 이국적 정서와 추상적 개념들에 매료되어서였다. 중3 때, <한국의 명시>라는 사화집 속의 ‘목마와 숙녀’를 베끼고, 그걸 달달 외었던 거와도 다르지 않은 정서였을 것이다.
학과 공부는 뒷전으로 동아리 친구들과 노는 데 정신을 팔고 있었지만, 나는 ‘목마와 숙녀’를 암송했던 거와 마찬가지로 단기간에 이 시를 달달 외워버렸다. 시에서 노래한 내용과 그 의미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장 바티스트 클라망스’라는 이름의 청년에 대한 상상력 따위에도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뒷날, 교단에서 아이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면서 나는 이가림 시인을 다시 만났다. 그의 시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같은 시가 문학 교과서는 물론이고, 모의고사나 문제집에도 심심찮게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가림이라는 이름을 보는 순간, 나는 고교 시절에 암송하던 빙하기를 떠올리고, 그 시를 마음속으로 뇌어보았었다.
그러나 세월 탓이었는지, 다음 구절이 자꾸 막히는 것이었다. 그게 중3 때 외운 ‘목마와 숙녀’와 다른 점이었다. 불과 한두 해 차이지만, 나이가 어릴 때일수록 기억력은 훨씬 힘이 셌던 것이다. 인터넷 이용이 일반화되면서 나는 검색으로 ‘장 바티스트 클라망스(Jean-Baptiste Clamence)’가 카뮈의 장편소설 <전락(轉落)>의 주인공 이름이라는 것까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30년쯤 뒤에 다시 만난 ‘빙하기(氷河期)’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나는 한동안 ‘빙하기’를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러다 인공지능(AI) 서비스가 시작되자, 나는 구글에다 ‘이가림 시 빙하기’를 입력했는데, 구글은 바로 검색어 ‘빙하기 해석’을 띄워주었다. 그다음은 쉬워서 나는 AI에게 시 ‘빙하기’를 구체적으로 알려달라고 요청했고, ‘제미나이’는 상상한 것보다 더 구체적으로 ‘빙하기’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빙하기’는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부제는 ‘장 바티스트 클라망스에게’다. 이 시는 알베르 카뮈의 <전락>의 주인공 장 바티스트 클라망스를 청자로 상정해서 “시대적 부조리, 청년기의 고독, 허무주의적 정서를 차갑고 감각적인 이미지로 형상화”(제미나이 정보, 이하 인용은 같음)한 작품이다.

장 바티스트 클라망스는 카뮈의 소설 <전락(La Chute)>에 나오는 유일한 화자이자 주인공으로, 한때 파리의 유명한 인권 변호사였으나 인간의 위선을 깨닫고 자신을 ‘재판관-참회자’라 칭하는 인물이다. 그는 소설 속에서 암스테르담의 음습한 선술집 ‘멕시코시티’에서 낯선 이방인(프랑스인 여행객)에게 며칠 동안 자신의 과거와 내면을 털어놓으며 이야기를 이끌어가는데, 제미나이는 ‘클라망스’라는 인물과 작중 역할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1. 인물의 과거와 위선 :
· 파리의 성공한 변호사 : 과거 그는 파리 사교계에서 명망 높은 변호사로, 약자와 소외된 이들을 자처해 돕는 도덕적이고 너그러운 인물이었다.
· 철저한 우월감 : 그러나 그의 도덕성과 선행은 진심 어린 자비가 아닌, 타인보다 높은 위치에서 군림하며 만족감을 얻으려는 ‘위선’과 ‘우월감’의 산물이었다.
2. 결정적 사건과 ‘전락’
· 다리 위 여인의 투신 외면 : 어느 날 밤, 센강의 다리 위를 지나던 중 한 여인이 강물로 뛰어내리는 것을 목격합니다. 그는 이를 구하지 않고 모른 척 지나쳐 버린다.
· 조소와 환멸 : 이 사건 이후, 자신의 도덕적 무결함이 착각이었음을 깨달으며 가상의 조소(웃음소리)를 듣기 시작하고 파멸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이를 카뮈는 사회적 몰락이 아닌 도덕적 ‘전락(추락)’으로 묘사한다.
한때는 잘 나갔던 인권 변호사였지만, 장은 여인의 투신을 외면한 뒤, 자신의 위선을 깨닫고, 자신을 재판관이자, 참회자라 자처하기 시작한다. 양심의 가책과 현실 사이에서 번민하는 장은 결국 냉혹한 현실 앞에서 내면의 분열을 겪는 인간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빙하기, 당대의 시대적 현실과 지식인의 자아 분열 등 상징
빙하기는 ‘지구의 기온이 오랜 시간 동안 하강하여 남북 양극과 대륙, 산 위의 얼음층이 확장되는 시기’지만, 이 작품에서는 장 바티스트 클라망스가 처한 자아의 분열과 함께 현실과 단절, 고독과 허무를 상징한다. 그리고 그것은 ‘다락방, 빙벽, 침몰하는 선박’ 등의 이미지로 형상화된다.
한편, 1966년도 신춘문예 당선작인 이 작품은 당시 한국 사회가 처한 시대적 현실을 일정하게 반영하고 있다. “4·19혁명의 좌절과 뒤이은 5·16 군사쿠데타 등 현대사의 격동기” 속에서 청년 지식인이 겪을 수밖에 없는 정신적 공황과 암울한 시대의 공기를 드러내는 것이다.
한편, 시인은 클라망스의 목소리를 빌려, “부조리한 세상에서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자신과 당대 지식인들의 양심적 가책과 부끄러움을 고백”한다. 이 시편에 등장하는 ‘빙하기’라는 극단의 배경은 “부조리한 현실을 회피하지 않고 온몸으로 얼어붙으며 견뎌내겠다는 실존적 결단의 표현”으로 볼 수도 있으며, 이는 이 작품이 카뮈의 실존주의와 이어지는 대목으로도 이해된다는 것이다.
불문학자로 이미지의 생성에 관심을 기울인 시인 이가림
이가림 시인은 전북 정읍 출신으로 성균관대 불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루앙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문단에 등단하였고,‘신춘시’ 동인으로 활동했다. 시 ‘겨울 판화집’(1966), ‘프루스트의 편지’(1966), ‘다색(茶色)의 눈동자’(1969), ‘다섯 시에서 일곱 시 사이’(1970), ‘야경꾼’(1970), ‘오랑캐꽃’(1973), ‘풀’(1979), ‘팽이’(1985) 등의 시편을 남겼다. 이 작품들은 대부분 언어의 정묘한 사용과 언어의 시적 활용에 의한 이미지의 생성 과정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결과물들이다.
조화로운 삶에 대한 그리움을 그리면서도 이미지의 강렬한 대비를 통해 언어의 가능성을 넓게 열어두는 것은 이 시인의 특이한 시법에 해당한다. 시집으로는 <빙하기>(1973),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1981), <슬픈 반도>(1989)가 있다. 바슐라르(G. Bachelard)의 저서 <촛불의 미학>, <물과 꿈> 등을 번역하기도 했다. 1993년 제5회 정지용문학상을 수상했다. (이상 ‘한국시집박물관’ 시인 소개 자료 인용)


시인은 인하대학교에서 불문학을 가르쳤고, 2016년 루게릭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2. 나보다 13년 전에 태어난 시인은 지금 내 나이 어름에 세상을 버렸다. 그의 또 다른 시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의 한 구절,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 물방울 같은 이름 하나 불러본다”을 나직하게 읊조리며 11년 전에 떠난 시인을 뒤늦게 전송한다.
2026. 7. 24.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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