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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된 광주학생운동의 주역, 독립 유공자 ‘서훈’ 이루어져야 한다

by 낮달2018 2025. 11. 4.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사업회, 보훈부에 장재성 등 미서훈 유공자 270명 서훈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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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주역 장재성 선생(1908~1950). 6.25전쟁 때 학살되었다.

지난 3일, 학생 독립운동 기념식 참석하고자 광주를 찾은 권오을 국가보훈부 장관은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사업회의 미서훈 유공자 270명 서훈 요청서를 전달받고 장재성 등 독립 유공 미서훈자의 서훈에 대해 노력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관련 기사 : 권오을 보훈부 장관 장재성 등 광주학생독립운동 유공자 서훈 노력]

 

광주학생항일운동은 이 운동을 지도, 주도한 장재성(張載性, 1908~1950) 선생을 빼고는 말할 수 없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을 주도하여 4년간 복역한 장재성은 해방 이후, 건국준비위원회 광주지부 위원, 광주청년동맹 의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다.

 

일찍이 광주에서 비밀결사인 독서회, 성진회(醒進會) 등을 꾸려서 학생운동을 지도했던 그는 광주고등보통학교를 나와 일본 주오(中央)대학에 다녔다. 1929년 유학을 포기하고 귀국하여 학생운동 조직화에 참여한 그는 ‘독서회 중앙부’를 결성하고 책임 비서로 광주고보, 광주농고, 광주사범 등에 독서회 결성을 지도하고 독서회 회원 중심의 소비조합 결성했다.

▲ 성진회를 결성하고 찍은 기념사진. 뒤에서 가운데 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장재성 선생이다.

1929년 10월 30일 광주-나주 간 통학 열차에서 일어난 한일 학생들의 시비가 나주역에서 난투극으로 발전하면서 불길처럼 일어난 광주학생항일운동을 그는 신간회 광주지회·광주청년동맹 등과 함께 지속적으로 지도했다. [관련 글 : 광주에서 학생들의 항일 투쟁 불타오르다]

 

광주학생항일운동으로 인한 260여 명의 구속자 가운데 그가 가장 중형인 징역 4년을 선고받은 것은 광주학생항일운동에서 그의 비중과 역할을 웅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복역을 마친 그는 다시 일본 유학길에 올라 주오대학을 졸업하고 거기서 신흥과학연구회 중심으로 활동했다.

 

이 활동으로 1937년 다시 구속되어 미결인 상태로 3년간 복역한 그는 1940년에 출소했다. 이후 해방 때까지 장성군 진원면에서 양조장을 경영하던 그는 해방 뒤 광주청년동맹을 조직하고 의장으로 활동했다.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에 전남 대표로 참석했으며, 1946년 3월 민주주의민족전선 전남지부 결성 준비회의 총무부에서 활동했다.

 

1947년 우익 청년들의 테러 피습을 당하기도 했던 그는 1948년 ‘해주인민대표회의’에 참석했다. 해주대회 대의원 명단에는 그의 이름이 없어서 참석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해주대회 참가하려고 월북했다가 이듬해 일본을 거쳐 돌아온 그는 체포되어 7년 형을 선고받고 광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고 가족들은 증언하고 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후퇴하던 경찰은 수감 사상범들을 광주시 광산구 지산동 뒷산에서 집단 학살했다. 장재성도 이때 처형된 거로, 당시 광주형무소에서 근무하던 사촌 형이 확인해 주었었다. 향년 42.[이하 ‘장재성 연보’ 참조]

▲ 광주광역시 동구에 있는 장재성, 장매성 남매의 집터에 붙은 표지판. 장재성은 미서훈이지만, 장매성은 1990년 애족장을 받았다.
▲ 장재성 가족. 부인과 아들이다.
▲ 장재성의 누이인 장매성. 광주여고보에 독서회를 주도한 독립운동가다.

장재성은 1962년에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받아 백범 김구와 함께 최초 표창 대상이었으나, 사회주의 전력 때문에 대상자에서 제외됐다. 그 후 아직도 미서훈 상태로 남아 있으며, 2020년에는 그의 삶과 투쟁을 기리는 ‘장재성선생기념사업회’가 창립되었다. 장재성기념사업회는 2020년 10월 30일 장재성 선생 서거 70돌을 맞아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 역사관에 그의 흉상을 세웠다.

 

광주에는 악명 높은 간도특설대 출신 친일 군인 김백일(1917~1951)의 이름을 따 1992년 개교한 백일초등학교가 있었다. 이 학교는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의 끈질긴 노력 끝에 2016년 장재성이 결성한 비밀결사 ‘성진회’를 기념하는 성진초등학교로 바뀌었다.

▲ 광주학생운동기념관에 세운 장재성의 흉상.

광주에서는 ‘광주학생독립운동 유공자 서훈추진위원회’(이하 추진위)를 결성하고, 대표에 김이수 전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조선대 이사장)을 선임했다. 추진위는 광주 3·1운동 김범수 선생, 광주학생독립운동 투옥자 미서훈자 장재성 선생 등 22명, 광주고보 퇴학자 미서훈자 208명, 전남사회운동협의회 투옥자 미서훈자 이기홍 선생 등 22명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위해 활동에 들어갔다. 민주당 정부 집권기에 이들 미서훈자의 서훈이 이루어지길 기대해 마지않는다.

 


2025. 11. 4. 낮달

 

 

참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박광종, 역사의 제단에 희생된 광주학생운동의 주역 장재성, 민족문제연구소, 2016

·  [더팩트] 잊혀진 독립운동가 장재성·장매성을 기억하다

·  김문희·장우권, 광주 학생 독립운동가 장재성 디지털아카이브 구축에 관한 연구. 한국기록관리학회지, 19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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