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공부 ‘오늘’] 1946년 9월 30일, 나치 전범 단죄 뉘른베르크 재판
1946년 9월 30일, 제2차 세계대전 전범 처벌을 위한 뉘른베르크(Nuremberg) 전범 재판에서 12명의 나치 지도자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공군총사령관 헤르만 괴링,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를 비롯하여 독일군 수뇌, 나치당 고위 간부, 점령지 총독 등을 포함한, 일급 전범으로 기소된 나치 지도자들이었다.
뉘른베르크 법(1935년 히틀러에 의해 제정된, 독일의 모든 유대인에게 시민권을 박탈하고 활동을 엄격히 제한하는 반유대주의 법) 작성에 참여한 전 내무부 장관 빌헬름 프리크는 물론이고 실종 상태였던 나치당의 비서실장 마르틴 보어만도 궐석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전범 12명에게 사형선고, 집행은 10명
기소된 24명의 전범 가운데 부총통 루돌프 헤스 등 3명에게 종신금고형이, 알베르트 슈페어(군수·탄약부 장관), 칼 되니츠(해군 총사령관) 등 4명에게는 20년에서 10년까지의 금고형이 선고되었고 세 명은 무죄로 풀려났다.
로베르트 라이(나치당 조직부장)는 공판 전에 자살했고, 질병으로 출석이 연기되었던 구스타프 크루프 폰 볼렌(철강·병기회사 ‘크루프’의 최고경영자, 크루프는 1999년 ‘티센’ 그룹과 합병하여 세계적 다국적 기업집단인 ‘티센크루프’가 되었다.)은 얼마 후 병사했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법원은 1945년 8월에 체결된 미국·영국·프랑스·소련 사이에 유럽의 추축국(독일·이탈리아) 수뇌의 소추 및 처벌을 위한 협정(런던 협정)에 따라 전범을 처벌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재판이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것은 이곳이 히틀러의 제삼제국이 대규모의 군중 집회를 열어 왔던 도시였기 때문이었다. 뉘른베르크 군사법원은 미국과 영국, 소련과 프랑스에서 각각 수석판사 1명과 대리 1명, 검사 1명씩을 뽑아 법정을 구성했고 재판장은 영국의 제프리 로런스(Geffrey Lawrence) 경이 맡았다.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은 1차로 1945년 10월부터 이듬해까지 1년 동안 1급 전범 24명을 기소했다. 이날 형을 선고받은 피고들은 모두 침략 전쟁 등의 공모와 참가, 계획, 실행과 전쟁 범죄, 비인도적 범죄(유대인 학살) 등의 이유로 기소되어 있었다.
당시 전범 재판에서는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는 사병들의 범죄를 어떻게 처벌해야 할 것인가와 ‘죄형법정주의’가 논란거리였다. 전쟁 범죄에 대한 처벌 법규가 제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쟁 범죄를 규정하고 이를 소급 적용하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승자의 재판’ 문제
그러나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의 본질적인 문제는 독일 변호인 측이 연합국 재판부에 제기하는 ‘승자의 재판’이라는 비판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왜 승자가 저지른 범죄는 처벌하지 않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세계의 여론은……정의로운 전쟁과 부당한 전쟁을 구별하고, 부당한 전쟁을 수행한 국가에 대해서는 모든 국가가 책임을 묻고자 하며, 설사 그 국가가 전쟁에서 이겼다고 하더라도, 그 무력의 결과를 포기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 독일 측 변호인의 주장
영국도 드레스덴을 무차별 폭격하여 무고한 민간인을 살상했고 미국은 일본에 원자폭탄 투하했다. 소련은 발트해 연안 국가들과 폴란드 일부를 점령했다. 이는 모두 ‘전쟁 범죄’나 ‘침략행위’로 볼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연합군은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피고가 아니라 심판자로서 등장했다는 것이 독일 측 변호인의 논리였다. (이상, 송충기의 논문, ‘뉘른베르크 재판과 나치 청산’ 참조)
그러나 뉘른베르크의 법정은 런던 헌장에 명시된 대로, ‘유럽 추축국의 주요 전범을 공정하고 신속하게 재판하고 처벌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었다. 연합국이 저지른 전쟁 범죄를 단죄하는 자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1차 재판에서 당시 실종 상태라 궐석 선고를 받은 마르틴 보어만을 제외한 사형수 11명은 1946년 10월 16일 새벽에 뉘른베르크 교도소의 체육관에 급조한 교수대 두 군데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군인 신분이었던 괴링과 카이텔은 총살형으로 집행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재판부는 이 요청을 기각했다.
그러자 헤르만 괴링은 사형집행 직전에 밀반입한 시안화칼륨(청산가리) 캡슐을 깨물고 자살했기 때문에 실제 사형집행은 10명에게만 이루어졌다. 궐석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마르틴 보어만은 독일을 탈출하다 사망한 것으로 뒷날 확인되었다.
2차 재판은 나치 독일의 전쟁 범죄인 유대인 학살에 대한 재판이었다. 1946년 12월부터 1949년 3월까지 계속된 재판에서 유대인 학살 만행에 관여한 의사, 관료, 법률가 185명이 기소되었다. 피고 중 25명에게 사형이, 20명에게 무기징역이 선고되었다.
영화 <뉘른베르크 재판>의 문제 제기
스탠리 크래머 감독의 영화 <뉘른베르크 재판(Judgment at Nuremberg)>(1961)은 이 전범 재판 문제를 다룬 영화다. 스펜서 트레이시, 리처드 위드마크, 버트 랭커스터, 마를레네 디트리히, 맥스밀리언 셀, 몽고메리 클리프트 등이 출연하는 이 영화는 아카데미상 11개 부문에서 후보로 지명되었으나 대작 <벤허>에 밀려 젊은 변호인 역의 맥스밀리언 셀이 남우주연상을 받는 데 그쳤다.
나는 70년대의 텔레비전 주말 영화 시간에 이 영화를 보았다.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 대신 법정에서 나치 법무 장관을 지낸 버트 랭커스터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변호인의 변론에 맞서 양심 고백을 하는 장면을 감동적으로 기억하고 있다.
인터넷 검색으로 <뉘른베르크 재판>을 다시 감상하면서 확인한 예의 대사다.
“우린 어디 있었죠? 히틀러가 라이스닥(제국의회)에서 증오에 차서 부르짖을 때 어디 있었죠? 우린 어디 있었습니까? 이웃들이 한밤중에 다카우로 끌려갈 때요?
어디 있었습니까? 독일의 마을, 철도 터미널마다 가축 운반차에 어린이들을 가득 싣고 처형장으로 실어 나르던 때는요?
그들이 한밤중에 우릴 향해 울부짖을 때 우린 어디 있었습니까? 모두 귀머거리였나요? 멍청이? 장님이었습니까?
내 변호인은 우리가 수백만 명이 처형된 것을 몰랐다고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께 사과할 것입니다. 우린 그저 수백 명이 처형당한 줄 알았었노라고. 그렇다고 죄가 덜해집니까?
구체적인 실상은 몰랐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몰랐다면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1, 2차에 걸친 뉘른베르크 재판을 종합하여 하나의 사건으로 재구성해냈다.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시대적 상황과 관련한 독일 지식인의 행적이고 유명 법학자로 판사와 법무 장관을 거친 어니스트 야니히(버트 랭커스터 분)의 고백을 통해 그것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법원은 2대 1의 결정으로 피고인 전원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한다. 재판의 정치적 성격을 강조하고 진정한 피고는 패전국 독일 국민이라고 주장하는 발군의 변론을 펼친 변호인은 재판장에게 ‘5년 후면 종신형을 선고한 사람들 모두 방면될 것’이라며 내기를 제안한다.
재판장은 ‘우리가 사는 시대의 관점으로는 그게 논리적이겠지만 논리적인 게 다 옳은 것은 아니’라고 답한다. 그러나 영화는 변호사의 논리가 증명되었음을 알리는 자막과 함께 막을 내린다.
“미국 진주 지역 내에서 있었던 뉘른베르크 재판은 1949년 7월 14일 끝났다.
99명이 형을 선고받았으나 현재(1961년 당시) 복역 중인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인류와 문명이 되풀이하는 전쟁과 그 심판이란 애당초 인간이 창조한 또 하나의 이율배반,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2016. 9. 28.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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