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19년 5월에 출판된 단행본『부역자들-친일 문인의 민낯』(인문서원)의 초고임.
[관련 기사 : 30년 문학교사가 추적한 친일문인의 민낯]
춘원(1892~1950)을 처음 만난 건 언제쯤이었을까. 기억은 확실치 않지만 초등학교 시절에 그의 존재를 알았던 것 같지는 않다. 책읽기를 즐기던 형과 누나들 덕분에 나는 고미가와 준페이(五味川純平)의 ‘인간의 조건’, 미우라 아야꼬(三浦陵子)의 ‘빙점’ 따위의 일본소설에는 진작 입문했지만, 집에서 춘원의 소설 작품을 읽었던 기억은 없기 때문이다.
도회로 진학한 중학교 1학년 국어 시간에 그를 만난 것은 확실하다. 교과서에 ‘현대문학사’를 다룬 소단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서 그가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소설 ‘무정’을 썼다는 것과 ‘흙’의 주인공이 ‘허숭’이라는 것 등을 배운 기억이 생생하기 때문이다. 늙수그레한 국어 교사는 시골 청년들이 자전거를 빌려 타고 읍내에 와서 그 날치 <매일신보>를 읽고 돌아갔다는 일화를 들려주기도 했다.
그러나 꽤 열심히 독서를 한 편이었지만 나는 중고등학교 때에 그의 소설을 읽지는 않았다. 의도적으로 회피한 것인지 자연스레 그리 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장편소설 ‘무정’을 처음 읽은 것은 대학에서 ‘한국현대소설론’을 들으면서였다.
과제가 되어버린 ‘독서’란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이걸 읽기 위해서 시골 청년들이 수십 리 길을 오갔다고? 나는 거의 짜내듯 그 ‘재미없는’ 소설을 읽어야 했다. 소설의 줄거리는 이미 꿰고 있는데다 ‘최초’의 현대 소설이다. 이미 반세기가 훌쩍 지났고 그간 끊임없이 발전해 온 소설 미학의 세례를 받을 만큼 받은 문학도의 눈에 ‘무정’이 찰 리 만무했던 것이다.
고교 시절로 기억하는데 ‘KBS 무대’에서 방영한 그의 중편 ‘무명(無名)’을 시청한 적이 있다. 식민지 치하 어느 감방 안의 인간 군상을 그린 작품인데 주인공으로 출연한 신구의 소름 끼치는 연기에 나는 넋을 잃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아, 춘원에게도 저런 울림이 있는 작품이 있었구나 하고 생각했지만 나는 굳이 원작을 찾아 읽지는 않았다.
‘이광수'에서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로
춘원의 문학적 업적이야 알려진 대로다. 그는 적어도 육당 최남선과 함께 이른바 ‘2인 문단시대’를 꾸린 1910년대의 주인공이었다. 이런저런 이력 가운데 그의 천재성을 입증할 만한 기록들은 넘친다. ‘최초의 현대소설’로 평가 받는 ‘무정’은 단편이 아니라, 장편이다. 우리 문학이 여전히 '신소설'류의 서사에 머물러 있을 때 그는 장편소설 한 편으로 단박에 이 땅의 '현대'를 그려내 보인 것이다.
나는 춘원에 대해서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지만, 그는 굳이 ‘작가’가 아니어도 ‘충분’했던 사람이 아닐까 생각하곤 한다. 굳이 그의 문학에 두드러졌던 ‘계몽주의적 성격’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그는 세상을 향해 하고 싶었던 말이 많았던 사람 같다. 그는 어쩌면 작가가 아니라 사상가가 되고 싶어 한 이였을지도 모르겠다고 여기는 까닭이 거기 있다.
<친일문학론>은 무려 25쪽에 걸쳐서 ‘이광수론’을 전개한다. 임종국은 춘원의 창씨성명으로 허두를 뗐다. 그는 춘원의 창씨성명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에 대해 ‘향산’은 그가 평북 출신이니 ‘묘향산’에서 따 온 거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본인의 ‘선씨(選氏) 고심담’ 앞에서 '항복'을 선언하고 만다.
지금으로부터 2600년 진무 천황께옵서 어즉위를 하신 곳이 가시하라(橿原)인데 이곳에 있는 산이 가구야마(香久山)입니다. 뜻 깊은 이 산 이름을 씨로 삼아 ‘향산’이라고 한 것인데 그 밑에다 ‘광수’의 ‘광’자를 붙이고 ‘수’자는 내지식의 ‘랑’으로 고치어 ‘향산광랑’이라고 한 것입니다.
- 지도적 제씨(弟氏)의 선씨 고심담(<매일신보> 1940.1.5.) 중에서
그는 다른 글(‘창씨와 나’, <매일신보> 1940.2.20)에서 창씨와 관련해 자신의 심경을 부연한다. 흔히 친일 인사들이나 그들을 비호하는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일제의 강제나 겁박’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자발적 순종이되, ‘천황의 신민’으로서의 '황공함'이 묻어나는 술회다.
창씨의 동기 : 내가 향산이라고 씨를 창설하고 광랑이라고 일본적인 명으로 개(改)한 동기는 황송한 말씀이나 천황어명과 독법을 같이하는 씨명을 가지자는 것이다. 나는 깊이깊이 내 자손과 조선 민족의 장래를 고려한 끝에 이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굳은 신념에 도달한 까닭이다. 나는 천황의 신민이다. 내 자손도 천황의 신민으로 살 것이다. 이광수라는 씨명으로도 천황의 신민이 못될 것이 아니다. 그러나 향산광랑이 좀더 천황의 신민다웁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안창호 등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난 춘원은 이듬해 정신적 스승인 안창호가 사망하자 충격을 받고 실의에 빠졌다. 결국 병보석 상태에서 수양동우회사건의 예심을 받던 중 그는 전향을 선언하고 조선신궁을 참배하는 등 본격적으로 일제에 협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춘원의 친일행적은 눈부시다 할 만하다. 그는 창씨개명 후 ‘내지인과 차별 없이 되기 위한 노력’에 전력을 다했다. 그는 ‘황실 중심사상과 그에 관련된 생활방식’을 섭취하고 “우리들의 천황이 사용하시는 말을 우리 국어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고 ‘혼상례의 일본식화’, ‘의례준칙의 일본화’, ‘일본적 실내장식의 도화 섭취’, ‘식생활의 일본적 개량’ 등을 권장했다.
모국어로 글을 쓰던 작가 이광수는 그예 조선어를 버리고 일본어를 ‘국어’로 맞아들임으로써 마침내 황국신민 가야마 미쓰로로 변신했다. 모국어를 통해 그 나라의 문학을 일구어 나가는 작가로서 그는 자신의 고유한 문학적 정체성을 포기한 것이다. 강제병합 27년, 결국 당대 최고의 작가는 이후, 민족을 등지는 길로 나아갔다.
춘원은 조선문학은 “일본 국민 전체를 독자로 할 것이요, 나아가서는 대동아 전역의 문학이 되기를 기할 것”이라면서 “국문학의 용어가 국어일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당분간 조선문의 문학이 존속하겠지만 그것은 필경은 국어로 번역되어서 국문학에 채택 흡수될 것”이니 문학에 뜻하는 자 국어 공부를 게을리 말아야 할 것이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그의 ‘국어’는 물론 일본어다. 작가로서 모국어에 대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는지를 의심할 만한 발언이다. 그는 조선어(한글)가 당분간은 쓰이겠지만 필경은 일본문학에 흡수될 것이라고 내다보면서 일본어 습득에 힘을 쏟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언어를 매개로 세계를 창조하는 작가로서 있을 수 없는 '자기 부정'이다.
작가로서의 ‘자기 부정’
“나는 지금에 와서는 이러한 신념을 가진다. 즉 조선인은 전연 조선인인 것을 잊어야 한다고. 아주 피와 살과 뼈가 일본인이 되어버려야 한다고.”
-‘심적 신체제와 조선문화의 진로’(<매일신보> 1940.9.4.~12)
그는 살과 뼈가 일본인이 되느라 그의 문학을 그 친일의 제단에 바친다. 임종국은 그의 소설 가운데 ‘그들의 사랑’(<신시대>, 1941.1~3)을 가장 문제가 많은 작품으로 꼽는다. 연재가 중단된 미완성의 이 장편은 한 조선 청년이 어떻게 친일파를 변모해 가는가를 굴욕적으로 보여준다.
조선 청년 이원구는 일본인 학자의 집에 기숙하면서 '조선사람의 가정생활이 방만하고 무질서한 것'과 '일본이 내 조국인 것'을 깨닫는다. 그는 '광주학생사건이 조선 청년 전체에게 불행을 준' 것이라 주장하면서 '그런 잘못된 감정을 청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임종국은 이 작품에 드러난 이원구의 사상은 ‘사대주의’와 ‘자기모멸’에서 유래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문학으로 이어지는 그의 친일행각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부분은 징병제에 대한 찬양이다. '병역'을 치러야 '옹근 국민'이 된다며 '징병'이 고맙다고 말하는 그에게는 이제 '충용한 황국신민'의 결기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 동안 조선사람 남자들은 병정이 못 되었으니 반편 국민 노릇을 한 셈이었습니다. 내후년부터야 옹근 국민이 되는 것입니다.”
-‘징병과 여성’(<신시대>, 1942. 6)
“한번 병역의 의무를 치르고 남으로 완전한 국민이 된다. 병역을 안 치른 국민은 반편이다. 그러므로 징병이 고맙다는 것이다.”
- ‘앞으로 2년’(<신시대>, 1942. 9)
“황국신민적 충의의 정신, 청황의 신민이며 일본은 우리의 조국이다. 우리는 생명으로써 이 조국을 지킬 것이라는 신념”
- ‘병역과 국어와 조선인’(<신시대> 1945. 5)
1943년 11월에 최남선·김연수 등과 함께 일본에서 학생들에게 지원병을 권유하는 ‘선배격려대원’으로 연설했다. 이 행사에 관련한 최남선과의 대담에서 춘원은 메이지대학 강당에서 열린 특별지원병 궐기대회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런 장면은, 일찍이 없었던 것으로 생각하오. 우리들의 지금까지의 경험으로는 참으로 내선일체가 실현된 것 같은 장면이었지요. 조선 학생들이 의견을 말하면 내지 학생들이 그것을 뒷받침하는 말을 하며, ‘하나가 되자’라는 그런 생각으로 가득했지요. 일종의 극적 광경이라고나 할까. 모두가 울고 있더군요. 황국을 위해 전장에 나가 죽자는 생각이 모두의 얼굴에 드러났더군요.”
- <조선화보> (1944. 1)
신념화한 ‘대동아공영권론’
“자, 조선의 동포들아 / 우리들이 있음으로써 / 이 큰 싸움을 이기게 하자
우리들이 있음으로써 / 대아세아 건설을 완수시키자
이럼으로써 비로소 / 큰 은혜에 보답하여 받듦이 되리라 //
아아 조선의 동포들아, / 우리 모든 물건을 바치자
우리 모든 땀을 바치자 / 우리 모든 피를 바치자
동포야 우리들, 무엇을 아끼랴 / 내 생명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하지 말지어다
내 생명 그것조차 바쳐 올리자 / 우리 임금님께, 우리 임금님께
- 시 ‘모든 것을 바치리’(<매일신보> 1945. 1. 18)
“끌려가는 일본 국민이어서는 아니 된다. 구경하는 국민이어서는 아니 된다. 자발적, 적극적으로 내지 창조적으로 저마다 신체의 어느 부분을 바늘 끝으로 찔러도 일본의 피가 흐르는 일본인이 되지 아니하여서는 아니 된다.”
- ‘황민화와 조선문학’(<매일신보>1940.7.6)
일제의 강제나 겁박에 따른 소극적 행위가 아니다. 이미 그는 1940년 전후의 일본의 동양체제론, 내선일체론, 대동아공영권론 등을 받아들인 이후 마침내 일본 천황 중심의 대동아공영권론을 신념화하기에 이른 것이다.
“씩씩한 우리 아들들은 총을 메고 전장으로 나가고
어여쁜 우리 딸들은 몸뻬를 입고 공장으로 농장으로 나서네.
말 모르는 마소까지도 나라 일 위해 나서는 오늘이 아닌가.
천년화평 도의세계를 세우랍신 / 우리 임금님의 명을 받자와
‘예’ ‘예’ 하고 집에서 뛰어나오는 무리
이날 설날에 반도 삼천리도 기쁨의 일장기 바다.
무한한 영광과 희망의 위대한 새해여.”
- ‘새해’(<매일신보> 1944.1.1)
곳곳에 등장하는 ‘우리 임금님’이 누군가. 그는 마음으로 천황폐하를 위해 이 한 몸을 초개같이 바치자고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춘원은 전시 동원체제에 부응하여 1943년부터 실시한 학병제에 적극 동조,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일왕의 총알받이로 지원할 것을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이 성전의 용사로 / 부름 받은 그대 ― 조선의 학도여
지원하였는가, 하였는가 / ― 특별지원병을 ―
그래, 무엇으로 주저하는가 / 부모 때문인가
충 없는 효 어디 서리, / 나라 없이 부모 어디 있으리
[…중략… ]
가라 조선의 6천 학도여, / 삼천만 동향인의 앞잡이 되라
총후의 국민의 큰 기탁(寄託)과 / 누이들의 만인침(萬人針)을 받아 띠고 가라”
- ‘조선의 학도여’(<매일신보> 1943.11.5.) 중에서
이미 반세기도 전의 과거사라고 하더라도 이게 조선의 으뜸 작가, 만인의 연인으로 불리었던 춘원 이광수의 행적이라는 걸 확인하는 건 여간 끔찍한 일이 아니다. 그는 온몸으로 황민화와 내선일체, 국어와 국민문학을 주장하고 그 선두에서 부역을 이어갔지만 역사의 진전, 일본의 패망 앞에선 무력했다.
변명으로 일관한 <나의 고백>
그는 ‘아주 피와 살과 뼈가 일본인이 되어버려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지만 그는 결코 일본인이 될 수는 없었다. 1945년 그의 '천황폐하'가 무조건 항복했을 때 그는 해방 조국의 민족반역자로 역사 앞에 서야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친일행위에 대해서 끝까지 변명으로 일관했다.
1948년 12월 자신의 친일행적에 대한 경위와 그 역사철학적 맥락을 밝힌 <나의 고백>에서 그는 민족의식이 싹트던 때부터 일제 말기까지 자기의 행위를 민족을 위한 선택이었다고 서술한다. 그리고 일제 말기의 친일행위 역시 ‘애국자로서의 명예를 희생하더라도 민족보존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이었다고 강변했다.
1949년 2월 7일 그는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차 심문 후 그는 친일에 대한 고백서를 썼지만, 여전히 <나의 고백>에서와 같은 변명으로 일관했다. 병보석으로 석방된 뒤 특검에 송치되었으나 그해 8월 불기소 처분되었다.
춘원은 1950년 7월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에게 납북되어 그해 10월 25일 폐결핵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향년 58세. 60년도 살지 못하면서도 그가 민족을 등지고 친일 부역의 길을 걸은 것은 무엇을 위해서였을까. 그의 말대로 그게 ‘민족’을 위해서였을까. 민족과 민족어를 부정했던 작가의 선택에 대해서 이미 역사는 무언으로 응답한 듯하다.
2014. 1. 2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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