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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식민지 시대 - 항일과 친일

103돌 삼일절…219명 서훈, 백범 며느리 안미생도

by 낮달2018 2023. 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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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 103주년(2022) 삼일절에 219명 독립유공자 포상

▲ 올 103돌 삼일절 계기로 본 포상인원 현황, 성별 포상 현황(오른쪽)

국가보훈처는 103주년 3·1절 계기로 김구 선생의 맏며느리 안미생 선생 등 219명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했다. 이번 포상자는 건국훈장 84명, 건국포장 30명, 대통령 표창 105명이다. 건국훈장은 애국장 20, 애족장 64명이며, 이 가운데 여성은 23명이다.

 

이번 포상으로써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독립유공자로 포상된 분은 1949년 최초 포상 이래 건국훈장 11,590명, 건국포장 1,471명, 대통령 표창 4,224명 등 총 17,285(여성 567명)에 이른다. 해방 당시의 우리나라 인구는 2천5백만 정도였으니, 성인을 1천만으로 잡아도 해방된 지 70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포상받은 독립유공자가 2만이 되지 않는 상황은 참으로 아쉽다.

 

어느 날 백범 곁을 떠난 며느리 고 안미생 선생 서훈

 

이번에 서훈자 가운데 건국포장을 받게 된 고 안미생(1919~2008) 선생의 이름 앞에서 우리는 숙연해진다. 그는 안중근 의사(1962 대한민국장)의 동생인 안정근(1987 독립장)의 딸이자, 임시정부 주석인 김구 선생(1962 대한민국장)의 맏며느리다. 해방을 앞두고 중국에서 그는 남편인, 백범의 장남 김인(1917~1945, 1990 애족장)을 잃었다.

 

베이징에서 나서 상하이에서 자랐고 홍콩에서 중등학교를 나온 뒤 쿤밍(昆明)의 서남연합대학(칭화대·베이징대·난카이대의 전시 연합 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재원 안미생은 영어, 러시아어 등 외국어에 능통해 충칭의 영국대사관에서 근무하다가 김인을 만나 연애 끝에 결혼했다. 둘 사이에서는 딸 효자(1941~ )도 태어났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의 상해 도착 사진 (1945. 11. 5.) 원 안이 안미생 선생이다. 왼쪽에 백범 김구 선생.

1940년 9월에 임정은 치장(綦江)에서 충칭(重慶)으로 옮겼다. 무덥기로 유명한 충칭은 1937년 중일전쟁으로 일본에 밀린 중국이 수도를 충칭으로 옮기자 갑자기 도시 규모가 열 배 이상 커졌다. 충칭의 공기는 더 나빠졌고 고령의 독립운동가들이 폐병을 앓다가 세상을 뜨는 일도 잦았다.

 

김인도 폐병을 앓기 시작했다. 안미생은 시아버지 백범을 찾아가 당시 만병통치약으로 알려진 페니실린을 맞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백범은 폐병으로 죽어가는 동지들도 그렇게 해 주지 못하는데 아들이라고 특별히 손을 쓸 수 없다며 이를 거절했다. 이 백범의 선공후사는 그러나 결국 남편을 잃은 안미생에게는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을 것이다.

 

시부와 함께 환국한 안미생은 경교장에서 살림을 도맡으면서 비서관으로 김구를 수행했다. ‘안 스산나’라고도 불린 그녀는 외부 강연과 함께 반탁운동에도 행동으로 참여하는 등 여성 지식인으로서 꽤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 안미생(1919~2008)과 김인(1917~1945) 부부

1948년께 안미생은 딸 효자도 떼어놓은 채 돌연히 미국으로 떠났다. ‘남편 없는 이 나라에 살기 싫다’는 말만 풍문처럼 남긴 채. 1949년 6월, 시아버지 김구가 경교장에서 급서했을 때도 그는 뉴욕에서 조전(弔電)만 보냈을 뿐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미국에서 안미생은 대학에 진학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1950년 이후 그는 소식이 끊어졌다. 딸 효자도 1960년대 중반 어머니의 제안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뒤 소식이 끊겼다. 김인은 1977년 건국포장을, 1990년에는 애국장을 추서 받았으나 그의 직계가족 가운데 보훈연금을 받는 이가 없었던 것은 그래서다. [관련 글 : 갑자기 김구 곁을 떠난 며느리, 지금껏 수수께끼]

 

안미생은 미국에서도 동포사회와 절연한 채 화가 ‘수지 안’이라는 이름으로 살았다는 사실이 최근에야 확인되었다. 어머니를 향해 떠났던 김효자 역시 한국에서와 전혀 다른 이름으로 살아왔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올해 80세인 그녀가 언제쯤 절연의 삶을 우리에게 들려주게 될까.[관련 기사 : 안중근 조카·독립운동가, 안미생 흔적 75년 만에 찾았다]

 

부친과 백부, 남편과 시아버지, 오빠 안원생(1990 애족장)에 이어 안미생 선생이 이번에 독립유공자로 추서됨으로써 그의 집안이 독립운동의 명문가임을 다시 한번 확인해 주었다.

 

부산의 삼일운동 효시 연 일신여학교 호주 여성 세 분도 서훈

▲ 이번에 서훈을 받은 부산 일신여학교 관계자. 왼쪽부터 마거릿 데이비스, 이사벨라 멘지스, 데이지 호킹 선생.
▲ 호주장로교 선교회에 의해 건립된 일신여학교. 지금은 기념관이다. ⓒ부산일보

서훈자 가운데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여성 고 마거릿 데이비스(Margaret Sandeman Davies)‧이사벨라 멘지스(Isabella Belle Menzies)‧데이지 호킹 (Daisy Hoking) 선생도 있다. 데이비스가 애족장, 멘지스와 호킹은 건국포장을 받는다.

 

마거릿 데이비스는 호주인으로 부산의 일신여학교 교장이었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 같은 학교 학생들의 시위를 이끌고 이후 시위 참가 학생 등을 보호하다 체포되어 보안법 위반으로 불기소되었다. 1940년 3월 호주 장로회의 신사참배 반대 결정을 따르고, 이로 인해 일신여학교가 폐교되자 호주로 귀국했다.

 

이사벨라 멘지스는 일신여학교 학생 감독(기숙사 사감)으로, 시위에 사용할 태극기의 깃대를 제공하고 시위 이후 태극기를 소각하였으며, 시위 참가 학생 등을 보호하다 체포되어 증거인멸 혐의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데이지 호킹도 선교사로, 일신여학교 학생들의 시위를 이끌고 독립 만세를 외치다 체포되어 보안법 위반으로 불기소되었다.

 

호주 여성 3인의 활약으로 이루어진 일신여학교의 3월 11일 만세 시위는 부산·경남의 3·1운동의 효시로 일컬어진다. 이들 외에도 일신여학교 교사·학생 12명이 3·11 만세 시위에 참여한 공적으로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게 되었다.

 

전북 남원 시위의 천연도 선생

▲ 천연도 선생의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선생은 남원에서의 시위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또 1919년 4월 4일 전북 남원군 남원시장에서 군중에게 시위 동참을 호소하다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 받은 천연도(1890~1923) 선생도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남원 시위는 일본 군경의 잔인한 유혈 진압으로 사망자가 7명, 중상자가 10여 명 발생할 만큼 규모가 컸다고 한다.

 

이 밖에도 1920년 12월부터 1921년 3월까지 황해도 해주·연백군 일대에서 대한독립 군사주비단 단원으로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징역 5년 받았던 오수남(1900~?) 선생도 애국장을 받았다. 같은 활동으로 징역 2년을 받은 신용섭 선생도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대한독립 군사주비단의 오수남 선생

▲ 대한독립 군사주비단 단원인 오수남 관련 기사 (매일신보 1921.10.14.)

또 1930년 1월 서울에서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3학년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을 지지하는 만세 시위에 참여하다 체포되어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안임순(1912~1994) 선생이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선생은 광주학생운동의 전국적·조직적 확산에 이바지했고, 1982년 미국에서 로스앤젤레스 3·1여성동지회를 창립하는 등 교포사회에서도 3·1정신의 확산에 앞장섰다.

 

광주학생운동 지지 시위의 안임순 선생

▲ 1930년 광주학운동 지지 만세 시위에 참여한 안임순 선생의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이번에 건국포장을 받은 김공도(1897~1965 이후) 선생은 14세의 나이에 이른바 ‘사진 신부(picture bride : 1900년대 이후 하와이 이민 1세대들이 실물 확인 없이 사진만으로 혼인이 결정된 모국의 신부들)로 혈혈단신 미국 하와이로 건너가 온갖 고단과 역경을 이겨내고 하와이 한인 여성사회의 지도자로 성장, 재미 한인사회의 분열상을 지적하며 한인의 단결과 독립운동 연대를 호소한 분이다.

 

사진 신부로 미국 건너간 김공도 선생

▲ '사진신부'로 미국으로 건너간 김공도 선생 관련 매일신보(1910.10.5.)

이번에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는 219명 가운데 생존 애국지사는 없다. 해방 77년, 어느새 적지 않은 세월이 흐른 것이다. 일제의 압제에 허덕이면서도 항일투쟁을 쉬지 않았던 이들 선열의 희생과 헌신에 힘입어 우리는 광복을 되찾았다. 그리고 고단한 현대사의 격랑을 헤쳐오면서 지난 30년간 국가경쟁력과 국가신용등급 등 주요 경제지표에서 식민지 종주국 일본을 추월하면서 선진국에 진입했다.

 

이 감격스러운 반전 앞에서 우리는 1만7천 수훈자만이 아니라, 무명의 전사로 국내에서 망명지에서 숨져 간 선열들을 호명하고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헌신이 오늘의 조국을 만들어낸 기반이었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2022. 3. 1. 삼일절 103돌에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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