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공부 ‘오늘’] 1987년 6월 29일-신군부, 국민의 민주화 요구에 항복하다
1987년 6월 29일, 민주정의당 대표위원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이고 야당 지도자 김대중의 사면복권을 건의하는 등 획기적인 시국수습 8개 항을 발표했다. 그는 이날 열린 민정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 발표한 ‘국민 대화합과 위대한 국가로의 전진을 위한 특별선언’을 통해서 여야 합의로 대통령 직선제로 헌법을 개정하여 새 헌법으로 선거를 치러 88년 2월에 평화적 정부 이양을 실현하도록 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것은 불과 두 달 전에 나온, 대통령 전두환의 ‘4·13 호헌선언’을 완전히 뒤집고 1980년 쿠데타로 집권한 신군부에 맞서 온 야당과 재야 시민사회의 요구를 전폭적으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선언은 독재로 지탄받던 집권 정당이 공개한 민주화 선언으로는 역사상 ‘최초’의 것이었다.
신군부, 국민의 민주화 요구에 밀려 손 들다
‘직선제 개헌’은 1979년 유신독재 붕괴 후 찾아온 ‘서울의 봄’이 신군부의 폭압으로 무산되고 난 뒤, 이어진 체육관 선거(간접선거)로 선출한 대통령에 대한 국민과 시민사회의 ‘저항’과 ‘개혁 열망’이 반영된 초미의 의제였다. 박정희의 피살 뒤 국민은 10대(1979.12.6. 최규하), 11대(1980.8.27. 전두환, 이상 통일주체국민회의), 12대(1981.2.25. 전두환, 대통령 선거인단) 등 세 차례의 대통령 선거가 장충체육관에서 치러지는 것을 구경만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1985년 2·12총선 이후 야당과 재야 민주 세력은 체육관 선거로 뽑힌 제5공화국 대통령 전두환과 집권 민주정의당에 대해 도덕성과 정통성의 결여, 비민주성을 비판하면서 민의를 직접 반영하는 직선제 개헌을 줄곧 요구해 왔다. 그러나 전두환은 1987년 4월 13일, ‘호헌(護憲)’을 밝히는 특별담화를 발표하여 개헌논의를 일절 금지한다고 선언해 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 박종철 고문치사(1987.1.14.) 사건이 은폐조작된 사실이 폭로되면서(5.18.) 정국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6월 10일, 노태우가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로 공식 지명되는 가운데 전국 18개 도시에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주최하는 대규모 집회 ‘박종철 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열리고, 관련 시위가 날마다 이어졌다.
26일에는 전국 37개 도시에서 사상 최대 인원인 100만여 명이 밤늦게까지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집회와 시위는 참가자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의 지지와 응원 속에 전개되면서 경찰력은 사실상 마비 상태에 이르렀다. 광범위한 중산층마저 가담한 ‘민심 이반’ 앞에 정권의 폭압 기구조차 힘을 잃은 것이었다.
이에 정권은 한때 위수령(衛戍令: 육군 부대가 일정한 지역에 주둔하여, 경비와 질서유지 및 군기의 감시와 군에 딸린 건축물·시설물 등을 보호할 것을 규정한 대통령령) 발동과 군 투입을 검토하였다. 전국에서 동시다발로 진행되는 시민들의 행진을 막을 수 있는 물리력은 계엄군밖에 없었지만, 일선을 비워둔 채 전군을 시위 진압에 투입하지 않는 이상 시민의 저항을 제압할 방안은 달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위수령 발동으로 되레 상황이 악화할까 염려한 당정 수뇌부에선 온건론이 우세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조작 은폐가 드러나 정권의 도덕성이 땅에 떨어진 데다가 당장 이듬해에 개최될 올림픽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군 투입 조짐을 눈치챈 미국이 한국 정부를 강하게 압박하고 있었다.
미 국무장관 슐츠와 주한 미 대사 릴리가 “극렬 시위의 전국적 확산으로 군이 출동하는 비상사태가 오지 않기를 바란다”는 뜻을 밝히고, 미 상원의 한국 민주화 결의안 통과 뒤, 슐츠가 “한국 정부는 정치적 고립을 벗어나기 위해 미국의 제안을 수용할 것”이라 발언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신군부는 마침내 손을 든 것이다.
백기 항복인가, 권력 연장하려는 정치공작인가
‘6·29선언’의 내용은 8개 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일단 신군부 통치 시기에 야당과 재야 세력이 줄곧 요구해 온 정치·사회적 의제들, 직선제 개헌, 사면복권과 시국사범 석방, 언론자유, 지방자치, 정당 활동 보장 등 대부분이 포함되어 있었다.
① 여야 합의하여 조속히 대통령 직선제 개헌, 새 헌법에 따른 대통령 선거로 1988년 2월 평화적 정권 이양
② 자유로운 출마와 공정한 경쟁이 보장되는 대통령 선거법의 개정
③ 국민적 화해와 대단결을 도모하기 위해 김대중 씨 등의 사면복권과 극소수를 제외한 시국사범 석방
④ 인간 존엄성을 존중하기 위해 개헌안에 기본권 강화조항 보완
⑤ 언론자유의 창달을 위해 관련 제도와 관행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며 언론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
⑥ 사회 각부문의 자치와 자율을 최대한 보장, 지방자치 및 교육자치 실시, 대학의 자율화
⑦ 정당 활동 보장, 대화와 타협의 정치풍토 조성
⑧ 밝고 맑은 사회건설을 위해 사회정화 조치의 강구
노태우는 자신의 민주화 제안이 관철되지 않으면 대통령 후보와 당 대표위원 직을 포함한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겠다는 단서를 달았다. 그러자 민주정의당은 물론, 대통령 전두환도 특별담화로 이를 모두 수용하겠다고 밝힘으로써 6·29선언은 정부와 집권당의 공식 입장이 되었다. 결국, 4·13 호헌조치는 백지화된 셈이었다.
그해 6월은 학생 시민들의 거리 시위와 이를 막던 경찰의 최루탄 난사로 점철되었는데, 6·29선언이 발표되자, 시민들은 일단 이를 승리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국민운동본부에서는 선언이 ‘백기 항복’인지 정치적 술수를 숨긴 ‘함정’인지를 두고 고심하다가 김대중·김영삼 두 지도자에게 대통합을 이루겠다는 약속을 확인한 후에야 이를 받아들였다.
이른바 ‘땡전 뉴스’ 시대, <문화방송(MBC)> 텔레비전의 ‘뉴스데스크’의 앵커는 다음과 같이 이 소식을 전했다. 뉴스에는 “우울한 마음으로 시국을 걱정해온 국민들의 가슴은 일시에 후련해졌”다거나 “대영단(大英斷)”, “국민 대화합을 이루는 큰 획”, “정치사적 쾌거” 같은 짐짓 과장된 표현이 여럿 등장했다.
“직선제 개헌을 하겠다는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의 시국수습선언이 오늘 월요일 아침 텔레비전과 라디오 긴급뉴스 그리고 신문 호외 등을 통해서 세상에 발표되자 그동안 우울한 마음으로 시국을 걱정해온 국민들의 가슴은 일시에 후련해졌습니다.
오늘의 대영단은 분명 갈등의 시대를 종식시키고 국민 대화합을 이룩하는 큰 획을 그은 것이며 우리 국민의 저력을 다시 한번 과시한 정치사적 쾌거로 치부해도 지나친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시나브로 잦아들던 시위는 선언 엿새 뒤인 7월 5일, 최루탄을 맞아 27일째 투병하던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사망하면서 다시 달아올랐다. 7월 9일에 치러진 이한열 장례 집회에는 백만 명이 모여 서울 거리를 행진했고 이후 6월항쟁은 서서히 막을 내렸다.
6·29선언의 후속 조치는 그해 연말의 대통령 선거까지 순차적으로 이루어졌다. 9월 21일 헌법 개정안이 공고된 뒤, 국민투표(10.27.)를 거쳐 개헌헌법이 공포(10.29.)되었다. 12월 16일, 대통령 선거는 야권의 김대중·김영삼이 끝내 단일화를 이루지 못한 채 4파전으로 치러졌고, 민정당 후보 노태우가 36.6%의 지지를 얻어 당선하였다.
직선제 대선은 야권 분열로 패배, 시민은 빈손
6·29선언을,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신군부의 ‘고육지책’이라고 본 것은 지나치게 순진한 판단이었을까. 그러나 6·29선언 속에 숨어 있는 ‘정치공작으로 권력을 연장하려는 정치적 도박’이라는 사실을 꿰뚫어 본 시민들은 이를 ‘속이구’라고 부르고 있었다.
신군부의 정치적 음모는 김대중·김영삼이 대표하는 야당과 저항 세력의 분열 덕에 기막히게 맞아떨어졌다. 한 사람으로도 충분했을 지도자가 둘이라는 건 시민들에겐 치명적인 불운이었다. 대선 패배로 인한 절망과 후유증은 정치권에 대한 불신과 무력감으로 시민들의 가슴에 오래 상처로 남았다.
그러나 백기 항복이든 음모든 6·29선언은 신군부의 독재에 맞서 일어난 전 국민적 저항인 6월항쟁의 결과였다. 또한, 이는 “민중항쟁에 의한 급격한 변혁 논리와 지배층에 의한 점진적인 개혁 논리 양자의 타협”(<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하 인용도 같음)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이후 민주화가 진전하면서 이 선언의 주체와 실천 여부 그리고 그 평가를 둘러싼 논란이 이어졌다. 6·29선언은 초기에만 해도 노태우가 독자적으로 제안하여 전두환을 설득했다고 보았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전두환이 노태우에게 직선제를 수용하라고 지시하였다는 설이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집권 위기에 이른 전두환은 정치규제에서 풀려난 김대중이 출마하면 1여 2야, 또는 1여 3야의 3, 4파전이 벌어져 승산이 있다면서 주저하는 노태우를 설득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예측은 실제 현실로 이루어졌다.
6·29선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노태우 정부와 시민사회에서 분명하게 엇갈린다. 직선제 개헌으로 출범한 노태우 정부가 “민주화를 실현하기 위한 획기적인 조치로서 이를 시발점으로 하여 한국 사회가 권위주의를 청산하고 민주주의를 실천해 나아갔다”라고 긍정 평가한 것은 당연했다.
반면에 당시 야당과 재야 세력은 “전국민적 저항으로 위기에 몰린 제5공화국의 집권 세력이 내놓은 일시적인 양보 조치에 불과하다”라고 평가하였다. 비록 비상한 선택이기는 했으나, “정권의 재창출을 위한 마지막 선택이며 불가피한 정치전략”으로 본 것이다. 실제로 당시 노태우는 6·29선언을 “국민의 민주화 요구에 대한 ‘6·29 항복 선언’이라고 규정한 바 있었다.
선언 강제한 6월항쟁, 유신체제를 뒤엎고 ‘민주주의’의 새로운 출발점
6·29선언은 그 형식적, 내용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독재 청산의 한 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만만치 않다. 대중들의 요구로 집권 세력의 ‘강경 억압전략’이 ‘민주화 타협전략’으로 바뀐 것은 민주화 투쟁의 과실임이 명백했기 때문이다.
6·29선언을 강제해 낸 전 국민적 저항인 ‘6월항쟁’은 기존 박정희의 ‘유신체제’(이른바 73체제)를 뒤집는 대변혁 운동으로, 이후 획득된 제도가 ‘87체제’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이후 한국 사회와 민주주의의 새로운 출발점이 되었다.
1987년의 대중투쟁이 낳은 87체제는 20년쯤 뒤, 정치·경제·사회적 발전의 정체와 후진성, 신자유주의의 발호로 대두된 ‘민주주의의 위기’ 앞에서 한계점에 이른다. 87체제가 ‘이전보다 개선된 질서이긴 하지만 수많은 일시적 타협을 담은 불안정한 체제’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다시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논의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87체제는 6월항쟁으로 절차적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제도적 민주화를 이루긴 했지만, 권위주의 정권의 연장을 막지는 못했다. 2017년, 민주주의의 사유화, 국정농단에 봉기한 깨어 있는 시민들이 밝힌 천만 촛불은 '대의 민주주의'라는, 87체제 극복의 실마리를 보여주었다.
촛불 혁명은 제도정치권의 문제를 풀면서 철옹성 같던 권력을 탄핵했고 정권교체를 이루어 냈다. 항쟁의 연장선에 보자면 시민들의 힘으로 수행한 이 혁명은 그 내용에서 1987년 6월항쟁을 보완하면서 완성한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20년, 코로나19와 싸우면서 깨어 있는 시민들은 오늘도 33년 장년에 이른 87체제를 극복할, ‘대의 민주주의를 담아내는 새로운 체제의 모색’이라는 해묵은 과제를 묵묵히 성찰하고 있다.
2020.6.29.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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