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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기관 이정현의 ‘의리’와 배신

by 낮달2018 2021.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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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이정현의 ‘의리’ 혹은 견마지로

▲ 국회의원 이정현은 자신을 알아준 박근혜에 대한 의리를 지킴으로써 주권자들에 대한 의리를 저버렸다.

한국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유난히 ‘의리(義理)’를 밝힌다. 사전적 의미로야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 도리’(다음 한국어사전)이니 그걸 밝히는 게 문제가 될 일은 아니다. 그러나 실제 삶에서 의리란 그리 만만치 않다.

 

의리는 우리나라의 윤리 문화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 그것은 알게 모르게 우리 삶을 규정하는 규범으로 기능하고 있다. ‘의리를 잘 지키는가’의 여부가 사람을 평가하는데 중요한 지표로 쓰이는 건 그래서이다.

 

북한에서도 “의리는 산 같고 죽음은 홍모(鴻毛) 같다.”라는 속담이 쓰인다고 한다. 이는 의리는 산같이 무겁고 죽음은 기러기의 털과 같이 가볍다는 뜻이니 의리를 위해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경우를 이르는 말이다.

 

유교 사상에서 말하는 의리는 <논어>에 나오는 ‘견리사의(見利思義)’, 또는 견득사의(見得思義)의 ‘의(義)’다. ‘이익을 보면 의리를 생각한다’라는 뜻으로 같은 책에 나오는 “군자는 의리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도 의미는 비슷하다.

 

의리와 ‘이익’ 사이

우리는 보통 의리를 우정(인정)과 묶어서 인식하곤 한다. 그것은 인간관계에서 돈이나 이익보다 우정과 인정을 우선시하는 형태로 드러난다. 현실적 이득과 인정이 갈릴 때 이익 대신 손해를 선택하면 대체로 그는 ‘의리 있는 사람’으로 평가받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의리’가 규범으로 기능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인정(우정)의 성격이다. 인정이란 기본적으로 선의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긴 하다. 그러나 그것은 법과 윤리, 도덕에 어긋나지 않는 방식으로 작동될 때만이 ‘의리’로 여겨질 수 있다.

 

흔히들 ‘조폭의 의리’로 불리는 인정이 반사회적인 범죄로 인식되는 까닭이 거기 있다. 조폭과 같은 범죄 집단들은 자기 조직의 이익을 위해 ‘의리’를 강조하며 비밀 지키기를 강요한다. 그리고 그것이 지켜지지 않게 된 경우, 무자비한 보복을 가하는 것도 같은 논리에서다.

 

생뚱맞게 세상의 ‘의리’를 떠올린 것은 최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국면에서 새누리당 대표인 이정현 의원의 언행을 지켜보면서다. 그는 ‘모두가 근본 없는 놈이라고 비웃을 때’ 자신을 발탁해 주어서 ‘박근혜의 사람’이 되었다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알아준’ 대통령에 대해서 말 그대로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해왔다. 그는 기꺼이 대통령의 충직한 호위 무사가 되었다. 지난 8월 그가 당 대표가 되자, 대통령은 당 신임 지도부를 초청하여 송로버섯과 캐비어 등을 내놓은 호화 오찬으로 그에 화답했다. 아름다운 군신의 교유도 이보다 나을 수 없으리라.

▲ 자기 사람 이정현과 함께 한 자리에서 그를 바라보는 대통령의 시선은 언제나 자애롭기 그지없다.

배신과 ‘의리’ 사이

 

주군인 박근혜는 ‘배신’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 ‘배신의 정치’에 대해서는 반드시 보복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지킨 사람이다. ‘배신’과 상반된 인간관계의 정리가 곧 ‘의리’라면 이정현은 자신을 알아준 주군 박근혜에 대한 의리를 모든 정치 행위의 준거로 삼은 정치인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자신에 대한 일방적 찬양이나 맹목적 추종을 잣대로 자기 사람을 기용하는 자신의 용인관(用人觀)에 따르면 이정현을 ‘알아준 것’은 박근혜로서는 최상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정현과 함께 한 자리에서 그를 바라보는 주군의 시선은 자애롭기 그지없다. 다선 국회의원조차 식은땀을 흘리게 한다는 비장(?)의 ‘레이저’를 가진 이가 말이다.

 

주군조차 화답한 그의 ‘의리가 선 지점’은 어디쯤일까. 그의 의리도 형식적으론 이익을 취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기는 하다. 정치적으로, 또는 당내 역학으로 미루어 볼 때 그의 ‘의리’는 때로 이익보다 손해로 돌아올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는 당내의 반대파들에겐 표를 잃었을지라도 절대 권력을 지닌 주군의 사랑을 든든한 버팀목으로 삼았다. 잃은 것과 얻은 것의 크기를 굳이 견주지 않더라도 그의 의리가 통상의 인간관계를 믿음으로 유지하게 하는 정리와는 얼마간 떨어져 있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리고 예의 국정농단 사태가 벌어져서 마침내 대통령 탄핵까지 이루어진 지금까지 그가 주군을 보위하기 위해 보여준 언행은 따로 언급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저런 돌쇠’, ‘참 대단한 마당쇠’ 정도로 흘겨보던 주권자들의 분노도 마침내 폭발했다.

 

그의 의리는 대통령 1인에 대한 ‘맹목적 보위’라는 일방적인 것이었다. 그는 모두가 헌법기관이라는 국회의원이다. 이는 그의 의리가 자신을 알아준 대통령에게가 아니라, 자신을 국회로 보내준 지역구 순천시민들에게 행사되어야 하는 마땅한 이유다.

 

굳이 여론조사의 지지율 따위를 이르지 않더라도 이번 사태가 명백한 범죄며, 심각한 직무 유기의 결과라는 것은 상식이다. 그럴 때 헌법기관인 전남 순천시 지역구 국회의원인 이정현의 선택은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가 사적 인간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다면 뒷날 주군이 탄핵으로 파면되어 권좌에서 내려온 뒤라도 그 곁을 떠나지 않는 것으로 족하다.

 

헌법기관 이정현의 선택

 

그는 5·18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정당의 국회의원 후보로 수십 년 만에 호남지역에서 당선되었다. 그를 뽑아준 지역의 주민들은 ‘호남 정치의 세속화’라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그를 국회로 보내주었다. 그리고 당 대표의 자리에 올랐지만, 그의 입신은 거기까지였던 듯하다.

 

그는 아직도 ‘의리’를 지키고 있다. 국회 탄핵안에 부표를 던진 다른 55명의 새누리당 의원들과 함께. 지역주민은 물론 온 국민의 여망을 안고 의정활동을 펼쳐도 시원찮을 헌법기관 이정현은 고작 나라를 이 지경까지 끌고 온 무능하고 무책임한 대통령의 호위 무사에 머물고 있다.

 

그에게 이제 ‘순천을 떠나라’는 지역구민들의 추방령이 내려지고 연일 시위가 벌어지는 이유다. 지역구민들이 어떤 이유로 그에게 표를 던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주군의 방패막이를 자처함으로써 그는 순천시민들이 만들어준 정치적 가능성을 저버렸다.

 

그는 지역구민들의 민주적 요구를 받아 안는 대신 대통령 1인에 대한 의리를 택했다. 그는 대통령을 배신하지 않은 대신 자신에게 표를 던진 66,981명의 지역주민에 대한 ‘의리’를 포기했다. 이제 남은 것은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그가 어떤 식으로 질 것인가이다.

 

대통령 박근혜를 위해 지킨 국회의원 이정현의 ‘의리’는 앞서 말한 조폭의 그것과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를까. 탄핵으로 직무가 정지된 박근혜는 ‘피눈물’을 이야기했다고 한다. 수백만 촛불의 함성과 절규 대신 여전히 이정현은 그의 피눈물을 닦으려 할까.

 

 

2016. 12. 12.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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