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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Q씨에게

Q씨에게 - 경어체 입문

by 낮달2018 2021.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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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박경리 선생의 ‘Q씨’를 빌려

▲ 이웃 여학교의 낙엽과 벤치

 

Q의 유래

 

영자 Q는 매우 매력적인 글자 같다. Q는 일찍이 루쉰이 <아Q정전>에서 주인공의 이름으로 쓴 글자고 박경리 선생도 수상집 <Q씨에게>를 통해 창조한 인물에 같은 글자를 썼다. 익명으로 쓰는 Q는 적어도 유래 있는 글자임에는 틀림이 없다.

 

감히 거기 견주는 것은 외람된 일이지만 내가 웹에서 주로 쓰는 아이디(q9447)에 Q를 썼다. 물론 나는 두 작가가 작품에 쓴 Q를 무단(?)으로 따 왔다. 나는 루쉰의 그것보다는 박경리 선생의 ‘Q씨’에 이끌렸다. 선생은 왜 ‘Q’를 썼을까. 나는 Q가 흔히 쓰는 ‘질문’(question)에서 온 게 아닐까 짐작하지만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선생은 에서 Q씨를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인물로 설정한다. 동시에 Q씨 역시 자신을 알지 못할 거라면서 Q씨에게 당신은 ‘내 그림자’요 ‘허공’이냐고 되묻고 있다. 그러나 선생이 Q씨를 창조한 까닭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같은 글에서 선생은 ‘영원한 암흑 속에서 한 줄기 빛을 소망하는 노래’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노래는 ‘그치지 않는 인간의 울음’이라며 당신은 그것을 알지 못할 것이라 말한다. 선생이, 자신의 노래는 물론이거니와 자기 존재조차 알지 못하는 미지의 인물을 향해 편지를 쓴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선생이 Q라는 익명의, 그것도 미지의 인물을 불러낸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Q씨는 존재하지도 않는 부정형의 존재다. 이쪽에서 건네는 얘기에 답을 할 일도 미소 짓거나 얼굴을 찌푸릴 필요도 없다. 그는 단지 상대의 얘기를 말없이 들어주면 된다. 그런 Q씨에게라면 누구든 편안하게 내 마음의 풍경과 행로를 조곤조곤 전할 수 있으리라.

 

Q씨가 어찌 선생에게만 필요할까. 누구에게나 그런 Q씨가 필요할 수 있다. 존재하지 않으므로 답신을 보내지도 미간을 찌푸리거나 짜증을 내지 않고 투명인간인 듯 내 푸념을 들어줄 사람은 얼마나 생광스런 존재인가 말이다.

 

새삼 뜬금없이 ‘Q씨’를 불러내려 하는 데에 다른 뜻은 없다. 나는 누구에겐가 경어체로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다. 따라서 내 Q씨의 성별을 궁금해 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그는 단지 나와 마주앉는 인물일 뿐, 구체적인 삶의 결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블로그를 열면서부터 나는 평어체를 써 왔다. 불특정 다수의 이웃들을 독자로 상정한다면 블로그의 서술에 경어체를 쓰는 게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블로그에 쓰는 글이 굳이 이웃을 겨냥하고 쓴 글이 아닌 자기 독백이라면 평어체를 쓰는 걸 나무랄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경어체냐 아니냐가 독자에 대한 예의를 가르는 기준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경어체의 서술은 일상을 넘는 울림이 있다. 신영복 선생의 산문이나 도종환의 시를 떠올려 보라. 선생의 산문은 담담하면서도 웅숭깊은 성찰의 기록이다. 장중한 경어체의 서술을 통해서 선생의 문장은 진실 너머까지를 깊숙이 응시한다.

 

도종환의 시도 마찬가지다. 경어체의 어미는 독자들에게 시인의 겸허한 눈길과 낮은 자세를 환기해 주면서 그가 노래하는 진실의 소박성을 은은하게 풍겨낸다. 그것은 시인의 사유를 재기보다 그 진실의 깊이를 신뢰할 수 있게 해 주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경어체의 서술은 그 울림 속에 책임 소재를 회피하거나 최소한 면탈코자 하는 미필적 고의가 숨어 있을 수 있다. 짙은 서정적 울림이 지적 판단과 냉철한 평가를 두루뭉술하게 만들어 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가끔씩 경어체의 서술로 좀 나긋나긋해지고 싶다. 담담한 경어체를 쓰면서 내 일상을 힘을 빼고 무심한 눈길로 돌아보고 싶다. 새삼 박경리 선생의 ‘큐씨’를 불러낸 이유다. 굳이 그를 일일이 호명할 일은 없을 듯하니, ‘Q씨에게’는 그냥 경어체 글을 쓰는 꼭지쯤으로 보아도 좋겠다.

 

공연히 감성적인 문체를 선택하면서 좀 주책을 떨 수도 있겠다. 아닌 초로에 뜬금없는 감상에 빠질 수도 있을 터이다. 설사 그런 같잖은 망령을 부리는 일이 있더라도 그러려니 하고 보아주시면 고맙겠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그것도 내 모습의 일부일 테니까 말이다.

 

 

2011. 10. 3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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