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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가겨 찻집

‘길들여지다’는 ‘길들다’로, ‘잊혀진’도 이제 그만

by 낮달2018 2021. 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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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겨 찻집] 불필요한 피동과 ‘이중 피동’ 표현들

▲ 〈잊혀진 계절〉은 '잊힌 계절'이 맞고, '길들여지다'도 '길들다'로 쓰는 것으로 충분하다.

10여 년 전, 여학교에 근무할 때, 아이들과의 관계를 다룬, “우린 서로에게 잘 길들여지고 있다”란 제목의 글을 쓴 적이 있었다. 신학년도에 담임으로 아이들을 만난 지 한 달, 아이들과의 편안해진 관계를 기꺼워하며 쓴 글이었다.

 

“한 달이 덜 되었지만, 아이들은 내게 잘 ‘길들여지고’ 있다. 어린 왕자가 말했던 것처럼 ‘길들여진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동시에 나도 아이들에게 잘 길들여지는 중이다. 우리는 서로를 길들이면서 ‘서로가 필요한 관계’,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게 되는’ 사이가 되고 있는 것일까.”

 

얼마 전, 새 블로그에 올리려고 글을 정리하는데 내 문서편집기 ‘아래아 한글 2018’은 그 제목을 비롯하여 본문 곳곳에 어법에 어긋난다는 경고인 붉은 금을 긋는 것이었다. 한글 2018의 맞춤법 길잡이는 “‘길들이다’는 타동사이며, ‘길들다’는 자동사입니다. 따라서 ‘길들이다’의 피동형을 구태여 쓸 필요 없이 ‘길들다’를 쓰면 됩니다.”라고 안내해 주었다. 맞다, 그걸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길들여지다’는 ‘길들다’로 써도 충분

▲ "잊다"와 "보다"의 피동형은 "잊히다", "보이다"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보듯 ‘길들다’는 “어떤 일에 익숙하게 되다.”의 뜻이다. 그리고 ‘길들여지다’는 ‘길들다’의 사동형 ‘길들이다’의 피동형이다. 그러나 ‘길들다’에는 이미 피동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굳이 ‘길들여지다’로 쓸 이유는 없다. 윗글의 ‘길들여지다’를 ‘길들다’로 바꾸어도 자연스럽게 읽히는 이유다.

 

사람들이 ‘길들다’로 써도 되는 자리에 ‘길들여지다’를 무심히 쓰게 되는 것은 그렇게 쓴 글이 아주 흔한 까닭이다. 생텍쥐페리의 동화 <어린 왕자>에 나오는 그 유명한 구절이 대표적인 예다. 최근 <대구문화방송(MBC)>에서 펴는 캠페인에도 ‘길들여지다’가 쓰였다.

 

“길들여진다는 게 무슨 말이지?”

“그건 너무나 쉽게 잊혀지는 말이에요. 그것은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에요

-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중에서

 

“예의를 중시한다고 잘못된 언어 습관에 길들여져 있지 않습니까?”

- <대구MBC> 우리말 사랑 캠페인 중에서

▲ 공영방송의 캠페인에도 '길들여지다'로 쓰고 있다.

어린 왕자가 사막에서 만난 여우와 나누는 대화에 등장하는 ‘길들여지다’는 낱말 자체로는 문제가 없다. ‘길들다’의 사동사 ‘길들이다’에 피동의 뜻이 있는 보조 동사 ‘(어)지다’가 붙은 형태기 때문이다. 비슷한 형식의 피동사로 형용사 ‘밝다’의 사동사 ‘밝히다’에 ‘(어)지다’를 붙여서 만든 ‘밝혀지다’가 있다.

 

“어떤 일에 익숙하게 하다”는 뜻의 ‘길들여지다’는 그것이 ‘길들이다’의 결과로 나타날 때 쓰일 수 있지 않나 싶다. 이를테면, 주인이 사냥개를 ‘길들이’고, 사냥개는 주인에게 ‘길들여지’는 것처럼. 여기서 ‘길들이다’는 인간이 동물에게 행하는 ‘의도적 훈련’이다.

 

그러나 <어린 왕자>에서 ‘관계를 맺다’의 뜻으로 ‘길들이다’의 결과로 볼 수 있는 ‘길들여지다’를 쓴 것은 그리 적절한 표현은 아니다. 내 글의 제목도 마찬가지다. 나와 아이들의 ‘편안해진 관계’도 의도적 행위의 결과라기보다는 이심전심과 배려로 서로가 선 자리를 받아들이고 거기 따른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대구 MBC>의 캠페인 문구 “예의를 중시한다고 잘못된 언어 습관에 길들여져 있지 않습니까?”도 “(…) 길들어 있지 않습니까”로 바꾸는 게 맞다. 언어 습관도 누군가가 그렇게 시킨(길들인) 결과가 아니라, 저절로 익숙해진 행동 방식일 것이기 때문이다.

 

‘피동’에 ‘(어)지다’ 붙이는 ‘이중 피동’은 이제 그만

 

잊히인 의자 아래 이랑 져 오는 음악의 꽃빛 눈부시는 / 바람결 소리여

- 이가림, ‘빙하기 -쟝 바티스트 클라망스에게’(1973) 중에서

 

이가림 시인은 그의 유명한 시 ‘빙하기’에서 ‘잊힌’을 ‘잊히인’이라는 시적 허용으로 썼다. 그러나 <어린 왕자>의 예문에 든 표현 가운데 ‘잊혀진’은 피동사(잊히다)에다 다시 피동 의미의 보조 동사(어지다)를 붙인 ‘이중 피동’이다. 가수 이용이 부른 대중가요 ‘잊혀진 계절’(1982)이 크게 히트한 이래 ‘잊혀진’은 ‘잊힌’의 자리를 대체해 버렸다.

 

프랑스의 화가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이 쓴 ‘잊혀진 여자’도 이의 확산에 일조했다. “권태로운 여자보다 / 더 불쌍한 여자는 / 슬픈 여자”로 시작하여 “죽은 여자보다 / 더 불쌍한 여자는 / 잊혀진 여자”로 마무리되며 ‘망각’의 두려움을 노래한 이 시도 적잖은 인기를 누렸기 때문이다.

▲ 어간이 'ㄹ'로 끝나는 용언의 과거형 활용이 잘못된 예(녹슬은)와 이중피동(찢겨진)이 쓰인 책과 음반의 표지.

민중가요 ‘광야’(1984)의 가사 첫머리 “찢기는 가슴 안고…”는 어법을 지켰으나 정경모의 현대사 <찢겨진 산하>(1986)의 ‘찢겨지다’는 이중 피동이었다.

 

어법에 어긋난 표현은 책 이름이나 대중가요 등에서 쓰이면서 쉽게 번진다. 대중가요 ‘녹슬은 기찻길’(1971)과 대하소설 <녹슬은 해방구> 덕분에 ‘녹슬은’이 ‘녹슨’을 대체해 쓰인 예다. 그러나 ‘어간이 ㄹ로 끝나는 용언’의 과거형 활용은 ‘ㄹ’이 탈락하고 거기에 ‘은’을 붙여야 하니 이는 틀린 활용이다. 

 

타동사(목적어가 필요한 동사) ‘잊다’에 피동 접미사(-이-, -히-, -리-, -기-)를 붙여 피동사 ‘잊히다’가 만들어진다. 그런데 여기에 다시 이중으로 보조 동사 ‘(어)지다’를 붙인 ‘잊혀지다’는 명백히 어법에 어긋난 조어다. 비슷한 방식으로 쓰이는 이중 피동은 표와 같다.

 

‘보이다’로 써야 할 자리에 ‘보여지다’로 쓰는 건 상당히 일반화된 듯하다. 스포츠 경기 중계에서 해설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표현인 까닭이다. 이른바 전문가라는 이들이 쓰면서 이런 이중 피동은 확산일로다. 그나마 요즘 ‘잊히다’로 쓰는 언론이 느는 것은 다행스럽다.

 

“다른 것으로 바뀌거나 변하다”라는 뜻의 ‘되다’는 그 자체로 피동의 의미가 있는데 여기 다시 보조 동사 ‘(어)지다’를 붙여 ‘되어지다’로 쓰는 것은 가장 나쁜 사례다. ‘모으다’의 피동형은 피동 접미사 ‘-이-’를 쓴 ‘모이다’인데, 여기 ‘(아)지다’를 붙여서 ‘모아지다’로 쓰는 것은 어색한 표현이다. 그런데도 방송에서 “여론이 모아지고 있다” 같은 형식으로 자주 쓰이니 이 말은 사전에도  올랐다.

 

말글살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언어 경제의 원칙’이다. 사람들은 말하기에서 거기 들이는 노력을 되도록 줄이려 한다. 그러나 이중 피동은 그런 원칙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들이다. 어법에 맞게 말글을 쓰는 일은 까다로워 보이지만 기실은 쉽고 편하게 말글 생활을 하는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누구나 조금만 의식하면 좀 더 바르고 곱게 쓸 수 있다. 바른 말글 생활의 원칙은 생활 속에서 녹여서 쓰다 보면 저절로 굳어지게 마련이다. 당연히 그것은 쉽게 ‘잊히지’도 않을 터이다.

 

 

2021. 9. 15. 낮달

 

 

 

'길들여지다'는 '길들다'로, '잊혀진'도 이제 그만

[가겨 찻집] 불필요한 피동과 ‘이중 피동’ 표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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