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되는 학생들의 어휘력
가끔 아이들의 언어능력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때가 있다. 언제부터일까, 아이들은 아주 단순한 어휘도 뜻을 새기지 못해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받는다. 단순히 국어 시간의 문제만이 아니다. 과목을 가리지 않고 아이들은 낱말 뜻을 캐묻는다. 문제는 그게 대단히 낯설거나 복잡한 뜻을 가진 낱말도 아니라는 데 있다.
“유보(留保)가 무슨 뜻이지요?”
“번민(煩悶)이 뭐예요?”
중학생 이야기가 아니다. 고등학교 그것도 3학년 학생에게 받은 질문이다. 물론 이는 질문한 아이만의 문제일 수 있다. 어이가 없어서 설명해 주면서도 나는 긴가민가했다. 정말 몰라서 묻는가, 아니면 잠깐 헛갈린 건가……. 그런데 정말이다. 아이들의 어휘력은 날이 갈수록 떨어지는 듯하다.
동료들 모임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비슷한 이야기가 쏟아졌다. 동료는 오늘 아이들이 “현학(衒學)은 ‘해학(諧謔)’과 같은 뜻” 아니냐고 하더란다. 어떤 아이는 지필시험에 나오는 지문에 미스프린트가 있다고 해서 뭐냐고 물었더니 ‘의뭉스럽다’가 ‘의문스럽다’의 잘못 아니냐고 묻더라고.
얼마 전 독서와 문법 시간에 비문학 지문에 ‘미시사(微視史)’가 나왔다. 아이 하나가 툭 던지는 말이 “‘아줌마’ 말인가요?”(실제 ‘missy’의 뜻은 ‘아가씨’)다. 분명 농인 듯한데, 정말 농담일까, 미심쩍어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니 아이들이 왁자하게 웃어댔다. 그럼 그렇지.
‘미시’의 ‘미’가 ‘작다’는 뜻이라고 말하면서도 나는 자신이 별로 없다. 아이들에게 한자도 외국어다. 그런데 내가 배운 방식으로 그걸 설명한다고 그게 아이들에게 더 쉽게 다가갈까. 단순 비교야 할 수 없지만, 영어의 어원을 가르친다고 해서 아이들이 그 낱말의 뜻을 더 잘 이해하는 건 아닐 터이니 말이다.
‘성적(性的) 수치심, 성적(成績) 수치심’
아이들은 뜻밖에 문학 관련 용어에도 매우 약하다. 2학년 수업에 아이들이 ‘동인지(同人誌)’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중학교 때에도 필경 ‘창조’나 ‘폐허’ 같은 걸 배웠을 텐데, 그렇게 물으면 가슴이 답답해지지 않을 수 없다. 평준화 지역이 아니어서 선발고사를 거쳐 들어온 아이들은 지역에서 학력이 제일 나은데도 그렇다. 이유가 뭘까,
고등학교가 이러니 중학교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어느 중학교에서 전체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설문 ‘성적(性的) 수치심을 느낀 적이 있는가?’에 대한 답이 ‘예’가 엄청 많이 나와서 교사들을 긴장시켰다. 그런데 아이들이 느낀 수치심은 ‘성적(成績)’ 수치심이었다고.
<창작과비평>이나 <문학과사회> 같은 계간지(季刊誌) 이야길 하는데 아이들이 키들키들 웃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아이들은 그걸 ‘개간지’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멋지고 세련되다’는 뜻으로 ‘간지’를 쓰고 여기다 접두사 ‘개-’를 붙이면 그 정도가 아주 심하다는 뜻으로 읽히는 모양이다.
‘계절별로 펴내는 잡지’라고 알려줬더니 아이들은 알 듯 말 듯한 표정이다. 하긴 월간지 한번 받아본 적이 없는 아이들에게 계간지가 당하기나 할까. 우리는 중고교에 다닐 때에 <학원> 같은 잡지를 읽으면서 컸지만, 아이들은 주로 컴퓨터 게임을 하면서 자랐다. 아날로그 문화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게 당연할 수도 있는 것이다.
실제로 어휘력은 아이들의 국어 능력 나아가서 언어능력을 좌우한다. 그것은 단순히 아는 낱말의 크기를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 표현력과 논리적 사고, 종합력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의 언어의 한계는 그의 세계의 한계”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명제가 지적하고 있는 것도 그 부분이다.
어휘력을 결정짓는 것은 독서의 양과 그 내용이다. 아이들이 특별히 예전보다 독서를 적게 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왜 아이들은 어휘 부분에서 걸릴까.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아도 마땅한 답을 찾기는 어렵다.
아이들에게 국어를 가르쳐 온 지 삼십 년이 넘었다. 그런데 아직도 아이들을, 그들의 언어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아이들은 끊임없이 자란다. 그런데 그 성장의 속도와 내용, 그 비밀을 아는 일은 절대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새삼 깨닫지 않을 수 없다.
2015. 7.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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