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공부 ‘오늘’] 1969년 9월 2일, 베트남 지도자 호찌민 서거
1969년 오늘(9월 2일), 9시 47분께 베트남 민족운동의 지도자 호찌민(胡志明, 1890~1969)은 갑작스러운 심장 발작으로 쓰러졌고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그날은 그가 베트남민주공화국 정부 주석으로 선출되고, 베트남의 독립을 선언(1945. 9. 2.)한 지 정확히 24년 만이었다. 향년 79세.
당시 미군과 협상을 시작하면서 베트남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었다. 지난 40여 년간 아시아의 반식민지운동을 이끌었던 가장 영향력 있는 20세기 공산주의 지도자 호찌민은 매우 간명하고 소박한 유언을 남겼다.
“장례식에 인민의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그것은 장례식에 인민의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자신의 시신을 화장하고, 재를 삼등분하여 도자기 상자에 담아 베트남 북부와 중부, 남부에 뿌려 줄 것 등이었다. 물론 베트남 인민들은 이 유언을 지키지 않았다.
1890년, 프랑스 식민 치하에서 태어난 호찌민은 열여덟 살에 조세 반대 시위를 벌이다 퇴학당하면서 혁명의 길로 들어섰다. 스물한 살 때 조국을 떠난 그는 미국과 영국, 그리고 프랑스 등 세계 각국을 유랑했다. 그러나 그는 식민 치하의 조국을 잊지 않고 있었다.
1919년, 호찌민은 파리강화회의(베르사유 조약)에 베트남 대표로 참가하여 강대국에 ‘베트남인과 프랑스인을 법적으로 동등하게 대우할 것, 프랑스 의회에 베트남 대표가 참석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할 것’ 등 8개 항으로 이루어진 ‘베트남 인민의 요구서’라는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네덜란드 만국평화회의에 참여했던 한국 대표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회담장에서 쫓겨났다. 식민지 청년 호찌민이 얻은 교훈은 제국주의자들이 평화적으로 식민지를 해방하는 경우는 없다는 뼈아픈 것이었다.
제국주의와의 끝없는 전쟁
그 후 호찌민은 중국을 거쳐 모스크바 국제 레닌학교에서 수학했는데 이때 그는 조선의 사회주의 혁명가 박헌영과 깊이 교유했다. 1924년 호찌민은 공산주의의 본거지였던 광저우(廣州)로 가서 베트남 혁명청년협회를 조직했고 이를 바탕으로 1930년 홍콩에서 베트남공산당을 창당했다.
1941년 베트남에 돌아온 호찌민은 공산당과 민족 부르주아의 연합전선인 베트남 독립동맹(베트민, 월맹)을 결성했다. 고향을 떠난 지 30년 만이었다. 그는 곧바로 일본과의 본격적인 무장 투쟁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숨을 거두는 날까지 호찌민은 제국주의를 상대로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을 계속했다.
베트남의 전 국토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것은 1884년이었다.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일본군은 1940년에 베트남 북부에 진출했고 이듬해에는 베트남 남부에도 진주하였으나 일본은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프랑스 정부에 일상적인 국정 운영을 맡겼다.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하자 베트민은 빠르게 권력을 탈취하고 임시 베트남민주공화국 정부를 수립하였다. 9월 2일, 일본이 도쿄만에 정박 중이던 미주리호 선상에서 항복문서에 조인하여 전쟁이 종결됨과 함께, 베트민은 하노이에서 베트남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호찌민은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옛 식민지 종주국 프랑스는 베트남에서 호락호락하게 물러서지 않았다. 프랑스가 사이공에 괴뢰정권을 세우자 베트민은 북부 하노이에 동남아시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인 베트남민주공화국(북베트남, 당시 한국은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베트남 독립동맹의 불법 정권이라는 뜻에서 ‘월맹’이라 부름)을 수립하였다.
베트남 남부와 북부로 갈라진 프랑스와 베트민은 곧 치열한 전투를 개시하였다. 1946년 11월 하이퐁 사건으로 촉발된 베트남의 프랑스에 대한 독립 전쟁인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된 것이었다. 호찌민의 베트남민주공화국은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한 프랑스를 몰아냈다.
그러나 제네바 협정에 따라 베트남은 북위 17도선 이북은 호찌민의 북베트남이, 이남은 바오 다이 황제의 베트남으로 분단되었다. 남북 분단은 임시 조치였으나 선거는 열리지 않았고 1955년 베트남 총리 고 딘 디엠은 황제를 축출한 뒤, 베트남공화국을 선포하고 대통령이 되었다.
이로써 독립 베트남은 호찌민의 베트남민주공화국(북베트남)과 미국이 지원하는 베트남공화국(월남, 남베트남)으로 분단되었다. 그리고 양측은 이듬해(1955) 11월 1일부터 1975년 4월 30일까지 전쟁을 치렀으니 이 전쟁이 베트남전쟁, 혹은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다.
1964년 미국은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이 전쟁에 공개적인 군사 개입을 시작했다. 내전이었던 베트남전쟁은 외국 군대가 개입한 국제전으로 비화했고, 250만여 명의 미군과 30여만 명에 이르는 한국군이 전선으로 투입되었다. [관련 글 : 1964년 오늘-통킹만 사건 발발과 베트남전쟁의 확대]
이 전쟁은 분단된 남북 베트남 사이의 내전임과 동시에 냉전 시대의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이 대립한 대리전쟁이었다. 그것은 대의명분도 없는, 세계 경찰국가를 자임한 미국이 개입해 수렁에 빠져버린 전쟁, 그래서 굴욕적인 패배를 당한 전쟁, 고엽제와 양민 학살로 얼룩진 전쟁이었다.
박정희의 파병으로 한국의 젊은이들은 8년 6개월간 연인원 32만 명이 이 낯선 나라의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어야 했다. 그러나 세계 최강의 군대 미군은 전쟁 중 미국과 연합한 남베트남에 대항하기 위한 무장 투쟁 조직인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이 벌이는 게릴라전 앞에 승리를 기약할 수 없었다. [관련 글 : 1971. 12. 9, 베트남으로부터의 귀환]
미국을 격퇴한 지도자, 몇 벌 옷과 낡은 구두를 남기고
비록 끝을 보지는 못했지만, 호찌민은 옛 지배자 프랑스에 이어 20세기의 최강대국 미국과의 전쟁도 승리로 이끌었다. 호찌민의 사망 후 6년 만인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이 함락되면서 남베트남은 패망하고 이듬해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장례식에 인민의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그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호찌민의 시신은 방부 처리되어 거대한 묘에 전시되었고, 베트남 국민은 4일부터 11일까지 7일간을 전 국민 애도 기간으로 정하고 그를 추모했다.
일생을 독신으로 살았던 그는 물려줄 사람이 없다 하여 유산을 남기지 않았다. 그가 죽을 당시 유산으로는 옷 몇 벌과 낡은 구두가 전부였다. 그는 늘 검소한 옷차림에 소박한 웃음을 머금었고, 아이들을 사랑했다.
미국을 격파한 강철 같은 의지의 지도자, 탁월한 전략가, 냉철한 혁명가였지만, 베트남인들에게 그는 ‘호 아저씨’라는 친근한 애칭으로 불리었다. 본명이 응우옌신꿍인 호찌민은 160개에 이르는 가명을 썼는데 호찌민은 ‘깨우치는 자’라는 뜻이다. 국가 원수이자 최고 권력자로서 호찌민처럼 민중의 사랑을 받은 이는 세계사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호찌민의 장례식을 지켜본 유일한 서방 기자였던 캐나다 종군 기자 출신이자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의 저자인 마이클 매클리어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남겼다.
“위대한 지도자를 잃은 비탄과 감동, 혼란이 함께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넋을 잃은 듯이 행동했다. 한 사람의 훌륭한 정치 지도자를 잃고 애도하는 그런 슬픔이 아니었다. 모든 사람들이 슬픔을 꾹 참고 견디는 모습이었다. 호치민의 인민들은 ‘호 아저씨’가 부르기만 하면 누구라도 달려와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순간들이었다.”
<호치민 평전>(푸른숲, 2003)을 쓴 윌리엄 듀이커는 그를 일러 “반은 레닌이고 반은 간디”라고 했다. ‘지나친 낙관론이나 성급한 태도를 경계하며, 예측할 수 있는 모든 상황을 신중히 검토하고 대비’했던 이 지도자는 ‘국부(國父)’로 추앙될 만한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국부(國父)는 ‘나라를 세운 국민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13년에 걸친 독재정권을 유지하다 4월 혁명으로 쫓겨났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을 국부로 모시지 못해 안달복달하는 이 나라 맥락 없는 우익들의 저열한 욕망과 ‘호 아저씨’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멀고 얼마나 가까울까.
2017. 9. 2. 낮달
* 참고
· <위키백과>
· <두산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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