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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63명의 ‘비전향 장기수’들, 북으로 송환하다

by 낮달2018 2023. 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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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공부 ‘오늘’] 2000년 9월 2일, 김대중 정부, 비전향 장기수들 북 송환

▲ 2차 송환촉구 회견엔 송환 희망 장기수 6명이 직접 나왔다. (2018.4.18.) ⓒ 민플러스

2000년 9월 2일에 63명의 비전향 장기수들이 북녘으로 송환됐다. 이들은 1993년 송환된 이인모와 마찬가지로 판문점 중립국 감독위원회 회의실을 거쳐 북으로 되돌아갔다. 이는 민가협 양심수후원회 등 인권, 종교, 사회단체로 구성된 ‘비전향 장기수 송환추진위원회’의 노력과 함께 석 달 전에 남북 정상이 공표한 ‘6·15 공동선언’의 합의를 충실한 이행한 것이었다.

 

6·15 공동선언의 합의의 3항에 명시된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해결’한다는 합의는 다음과 같았다.

 

3. 비전향 장기수 송환

① 남측은 북으로 갈 것을 희망하는 비전향 장기수 전원을 2000년 9월 초에 송환한다.

② 남측은 북으로 갈 것을 희망하는 비전향 장기수들의 명단과 실태자료를 송환 15일 전에 북측에 통보한다.

③ 북측은 북으로 갈 것을 희망하는 비전향 장기수 명단을 넘겨받은 다음 확인한 데 따라 송환 10일 전에 남측에 명단을 통보한다.

④ 비전향 장기수 송환 절차는 1993년의 관례에 따르며, 송환 경로는 육로 또는 항공로로 한다.

 

비전향 장기수(非轉向 長期囚)는 분단 한국이 낳은 장기수다. 이들은 자생적 게릴라, 조선인민군 포로와 남파 간첩 등으로 장기간 수감되어 왔으나 사회주의 사상을 포기하지 않은 이들이다. 이 수감자들은 당국의 강압에 의한 전향 요구를 끝내 거부하고 자신의 사상과 양심을 지킴으로써 ‘비전향 장기구금 양심수’로 불린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민주화 투쟁을 이끈 넬슨 만델라의 27년이 세계 최장기 복역이라던 기록은 송환된 비전향 장기수 63명이 복역 기록 앞에 무색하다. 이들이 감옥에서 산 세월은 1인당 평균 32년 6개월이니 합하면 2045년에 이른다.

 

사상전향제도는 과거 일제 후반기와 말기의 치안유지법 위반 사범들, 해방 후 권위주의 정권 당시 국가보안법이나 반공법, 집시법이나 계엄법, 그리고 기타 공안 관련 법률을 위반한 공안 사범을 가석방 시켜주는 조건으로 사상전향서를 쓰게 하는 제도였다. (사상전향제도의 변천 참조)[관련 글 : 일제, 국가보안법의 뿌리인 치안유지법시행]

 

이들이 전향성명서를 낭독하면 당국은 이를 대북 방송에 내보내고 해당 행정기관의 재가를 받아서 석방해 주는 제도였다. 전향서를 쓰지 않으면 가석방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결국, 이 제도로 말미암아 사상과 양심을 지키고자 한 이들은 ‘비전향 장기수’가 되었다.

 

세계 최장기 복역…반인권 사상전향제도의 희생자들

 

1933년부터 일제의 ‘사법당국 통첩’으로부터 시작된 사상전향제도는 해방 후 독립 조국에서도 연면히 살아남아 1998년까지 시행되었다. 좌우익 간 갈등이 심화하자 반공 통치를 강화하려 한 이승만 정권은 물론,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에서도 이 제도는 정권 유지를 위해 요긴하게 이용되었다.

 

박정희는 영구 집권을 목적으로 10월 유신(1972)을 선포하고, 베트남전쟁에서 미군이 패퇴하자 위기감을 높이며 시국을 준전시로 규정했다. 유신체제 비판을 금지하고 반체제·반정부 운동의 말살을 기도한 유신 정권은 ‘국시인 반공’에 도전하면서 스스로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하는 이들, 비전향 정치범들을 가만둘 리가 없었다.

 

1973년 6월부터 대전, 광주, 전주, 대구 4개 교도소에 ‘사상전향 공작반’이 설치되어 무자비한 전향 공작이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들은 사상전향을 위해서 온갖 폭력적 방법을 동원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 결과 발표(2002.8.29.)는 이 전향 공작의 경위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1973년부터 법무부와 중앙정보부가 조직적으로 비전향 장기수에 대한 옥중 전향 공작을 펼쳤으며 이 과정에서 폭력전과자를 활용한 상습 폭력으로 장기수들이 사망했다.

 

…1955년 국가보안법으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대전교도소에 복역 중이던 최석기, 박융서, 손윤규 사건 등 비전향 장기수 옥중 사망 의문사 사건도 법무부와 중정이 교도소 내에 좌익수 전향 공작전담반을 설치하고 조직적 전향 공작과 고문·폭력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다.

 

특히 최석기는 격리 사동에서 입에 수건이 물리고 바닥에 뉘어진 상태에서 폭력전과자 조모 씨의 극심한 폭행으로 숨졌다. …당시 교도소 보안과장은 최씨의 유족에게 ‘잠만 자는 병에 걸려 사망했다’고 말하는 등 사실을 은폐했으며 최씨를 폭행했던 조씨는 전향 공작의 공적을 인정받아 교도소에서 결혼하고 만기보다 4년 일찍 출소하는 등의 특혜를 받았다.”

 

이 끔찍한 전향 공작을 못 이기고 전향서를 쓴 이들이 전향장기수, 끝내 그 공작으로부터 자신을 지킨 이들이 비전향 장기수다. 고문과 폭력 때문에 전향서를 썼을 뿐인지만 형식상 사상을 포기한 전향장기수에게는 북으로의 송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 비전향 장기수들 . 이들 중 현재 생존자는 서옥렬 한 사람뿐이다 .

비전향 장기수 송환 운동의 첫 결실이 1993년 3월 19일 송환된 전 인민군 종군기자 이인모(1917~2007)다. 34년 동안 복역한 뒤 그가 1988년 석방되자, 북한은 1991년부터 그의 송환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남북고위급회담’(1992) 등에서도 요구를 이어가자 김영삼 정부가 이를 받아들인 것이었다.

 

1989년 사회안전법 폐기를 전후하여 1988년 하반기부터 1999년 말까지 전원 석방된 비전향 장기수는 모두 102명이었다. 그중에서 송환 1명(이인모), 13명이 사망, 나머지 86여 명 중 남한 잔존 의사를 밝힌 이들을 제외한 63명이 2000년 9월의 최종 송환 대상자가 된 것이었다.

 

그동안 출소 장기수들은 ‘만남의 집’이나 ‘민중탕제원’, ‘광주 통일의 집’ 등에서 공동체 생활을 해 온 이들 비전향 장기수는 가족과 연고가 있는 북으로 돌아갔다. 이들 비전향 장기수를 다룬 영화로 <송환>(김동원, 2003)과 <선택>(홍기선, 2003)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비전향 장기수 송환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들

1차 송환후 18년, 2차 대상 33명 중 생존자는 19명

 

2000년 이후 2차 송환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2차 송환대상자는 33명이었지만 그간 세상을 떠난 이가 여럿이어서 현재 생존해 있는 비전향 장기수는 19명이다. 이들은 모두 8, 90대의 노인인데다가 전향 공작 과정에서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에 시달리거나 암으로 투병하고 있다.

 

지난 4월 18일 민가협 양심수후원회 등 진보 민중 단체들이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비전향 장기수 2차 송환을 강력히 촉구한 이유다. 이들에게 이제 북의 가족과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관련 기사 : 비전향양심수 2차 송환, “하루가 급박한 상황”]

 

또 하나 남은 문제는 전향 공작 때문에 전향한 장기수들이다. 이들은 폭력 때문에 전향서를 썼을 뿐, 본인의 사상과 양심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전향서 때문에 풀려났지만 정작 그것 때문에 가족이 있는 북으로 돌아갈 자격을 박탈당한 것이다.

 

1951년 남파되어 1989년까지 31년 5개월 동안 복역한 정순택(1921~2005)은 고문을 못 이겨 전향했다. 그러나 그 때문에 2000년 송환대상자에 포함되지 못하고 2005년에는 사망하여 사상 처음, 시신으로 송환되었다.

 

통일부가 정순택의 사망을 알리자 북측은 대남 전통문으로 시신 송환을 요구했으며 이에 우리 정부에서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이루어진 것이었다. 남북 간 화해 협력이 시행되던 노무현 정부 때 이야기다.

 

지난해에는 비전향 장기수 박봉현(1919~2017)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 전북본부 고문이 9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60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돼 1991년 12월까지 31년 6개월간 복역한 그는 정부의 강제 전향 압박을 끝내 거부했고, 2002년 사면 복권된 이였다.

▲ 지난해 7 월 비전향 장기수 서옥렬 선생 송환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지난해엔 비전향 장기수 서옥렬(1927~ )의 북한 송환을 추진하는 위원회가 출범했다. 서옥렬(91)은 1961년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무기징역 선고받고 30년 복역했다. 1990년 가석방 때 반강제로 도장을 찍은 ‘준법서약서’가 그의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그에게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남북 정상의 판문점 선언 이후, 종전선언이나 평화협정 같은 논의들이 이들에게 혈육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을 돌려줄 수 있을까. 이들 비전향 장기수의 송환은 인도적 조치이면서도 한국전쟁 이후의 남북 냉전과 대결 구도를 1차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될 듯하다.

 

사상전향제도 폐지됐으나 ‘사회안전법’ 대체한 ‘보안관찰법’도 논란

 

사상전향제도는 1998년 7월, 김대중 정부 때 공식적으로 폐지되어 ‘준법서약제도’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국가가 가석방을 조건으로 개인의 내면에 대한 의사 표현을 강제한다는 점에서 사상전향제도와 본질적 성격이 다르지 않다.

 

이 역시 헌법 19조에서 보장하는 양심의 자유에 대한 본질적 내용의 침해이며,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대한 국제인권규약’ 제18조의 규정을 명백히 위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부 때부터 시국사범이 대부분 석방되고, 예전과 같은 폭력적 방식이 더는 쓰이지 않게 되었다.

 

이후, 준법서약제는 유명무실해졌고, 마침내 노무현 정부 때인 2003년 7월 7일 법무부 정책위원회에서 폐지 결정을 밝히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이후엔 1989년 사회안전법을 대체한 ‘보안관찰법’의 일부 조항이 관련 사범의 동향을 통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상전향제도나 준법서약제도의 잔재로 비판받는 등 논란은 여전하다.

 

 

2018. 9. 1. 낮달

 

참고

· <나무위키>

· 비전향 장기수 송환 운동 추진과정, <통일뉴스>(2000.9.17.)

· “고령의 비전향 장기수에겐 하루가 급하다” <민플러스>(2018.4.18.)

· 90살 장기수 서옥렬 선생 송환 추진, <민중의 소리>(2017.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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