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공부 ‘오늘’] 1923년 9월 1일, 대지진 일본 중심부 강타, 조선인 2만여 명 학살되다
1923년 오늘, 11시 58분(일본 표준시)에 리히터 규모 7.9의 강진이 일본의 중심지 도쿄와 간토(관동關東) 일대를 강타하였다. 환태평양지진대의 일본 열도는 크고 작은 지진이 빈발하였지만, 이 지진은 일본이 메이지유신 후 근대사회로 진입하여 맞이한 최대의 재난이었다.
대지진은 도쿄를 비롯한 관동 일대에 치명적 타격을 입혔지만, 계엄령이 선포된 가운데 현지의 조선인들은 지진으로 인한 피해보다 더 끔찍한 만행의 표적이 되었다. 지진 발생 다음 날(9.2.)부터 일본의 군경과 민간인들이 무고한 조선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규모 7.9의 강진, 사상 최대의 피해
도쿄,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한 관동지방에 대화재가 발생하면서 지진의 피해는 걷잡을 수 없어졌다. 제1차 대전 후의 호경기로 도시가 급팽창하면서 지은 목조 가옥이 밀집해 있었고, 도로나 공원도 좁은 데다가 이재민들이 들고나온 가재도구들이 불타면서 희생자가 엄청나게 늘어났던 것이다.
1926년 도쿄 시청에서 발간한 <도쿄지진록 전집>에 따르면, 지진으로 약 34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9만여 명은 사망했고 1만3천여 명은 행방불명, 중경상자도 5만 명이 넘었다. 38만여 세대의 가옥이 전소하고, 17만5천여 세대의 가옥이 전파 또는 반파되었다.
추정된 피해액 약 55억 엔을 1922년도의 일반회계 예산 약 14억7천만 엔과 견주어 보면 일본이 이 돌발적 재난으로 입은 피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대지진으로 말미암은 인적, 물적 손실 때문에 일본은 국가적인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당일 밤 우치다 고사이(內田康哉) 임시 총리가 주관하는 긴급각료회의가 소집되면서 일본 정부는 지진 발생 지역을 정비하고 복구를 위한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하였다. 다음날 계엄령이 공포되었고 6만4천 명의 육군 병력 등 군이 치안에 동원되었다.
대지진으로 인한 극심한 피해로 민심은 흉흉해지는 등 사회는 대단히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지진 복구와 민심 수습 조치가 취해지던 중 출처를 알 수 없는 유언비어가 광범위하게 유포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당시 불황에 시달리던 일본 사회에 팽배한 불만에 불을 댕겼고 조선인은 그 희생양이 되었다.
“사회주의자와 조선인에 의한 방화가 다수 발생하고 있다.”
“조선인이 도쿄시 전멸을 기도하여 폭탄을 투척할 뿐 아니라 독약을 사용하여 살해를 기도하고 있다.”
유언비어와 위기의 희생양, 조선인 학살
1923년 당시의 일본 경제는 불황에 시달려 여론이 극도로 악화하고 국가전복의 위기 상황이라 지진으로 인한 폭동을 막기 위한 희생양이 필요했다는 것이었다.
조선인에 대한 유언비어는 9월 1일부터 나돌기 시작하였고 9월 2일에는 ‘조선인 폭동설’이 더욱 확대되었으며 전날보다 상세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유언비어 유포에 불을 붙인 건 언론이었다. 일본 신문들은 사실 확인도 거치지 않은 채 조선인에 대한 유언비어를 사실인 양 보도했기 때문이다.
“불령선인이 각처에서 방화, 제도(帝都, 도쿄)에 계엄령, 선인 도처에서 난도질을 일삼다, 선인 때문에 도쿄는 저주받은 세계”와 같은 제목의 기사들이 일본 민중을 자극하였다. 일본 정부는 유언비어를 직접 유포하기도 하였고 일본인들의 학살을 묵인하기도 하였다.
내무성이 각 경찰서에 내려보낸 지침 중에 “재난을 틈타 이득을 취하려는 무리들이 있다. 조선인들이 방화와 폭탄에 의한 테러, 강도 등을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는 내용도 있었다. “조선인(또한 중국인)들이 폭도로 돌변해 우물에 독을 풀고 방화·약탈을 하며 일본인을 습격하고 있다.”라는 거짓 소문이 각지에 나돌기 시작하면서 거리는 학살의 피비린내로 뒤덮였다.
지진으로 물 공급이 끊긴 상태인 데다가 목조 가옥이 대부분인 일본인은 화재를 굉장히 두려워하였으므로, 이러한 소문은 사실 여부를 떠나 일본인들에게 조선인과 중국인에 대한 강렬한 적개심을 유발하는 것이었다.
학살은 도쿄와 가나가와현에서는 군과 경찰이 중심이 되어 행해졌고 지바현, 사이타마현에서는 자경단(自警團)에 의해서 행해졌다. 자경단은 죽창, 일본도, 도끼, 곤봉 등으로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으며 일본 관헌은 이를 방조하였다. 학살의 구체적인 모습은 차마 여기 적지 못한다.
자경단을 조직한 일본인들은 불심검문을 하면서 조선인과 중국인으로 확인되면 가차 없이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조선식이나 중국식 복장을 한 이는 말할 것도 없고 신분을 숨기기 위해 일본식 복장을 한 조선인이나 중국인을 식별해 내기 위해서 외국인에게 어려운 일본어 발음인 ‘15엔 50센’을 시켜서 발음이 이상하면 바로 살해하였다.
‘15엔 50센’의 발음은 탁음의 연속으로 조선어에는 탁음이 없으므로 발음에서 단박에 조선인임이 드러나는 것이었다. 일본 민간인들에게 조선인을 판별하는 방법으로 ‘15엔 50센’을 가르쳐 준 것은 일본의 관헌이었다. 조선인의 민족적 특징을 알아보는 방법을 기록한 ‘조선인 식별자료’라는 일본의 내부 문서 가 그 증거였다.
치안 당국은 ‘조선인 폭동’이 루머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혼란을 수습하고 질서를 회복한다는 명분으로 자경단의 만행을 방관하였고, 일부는 만행에 직접 가담하거나 조장하기까지 하였다. 치안 당국이 자경단 만행을 중지시킨 것은 자경단의 만행이 도를 넘어 공권력을 위협할 정도가 되어서였다.
그러나 그때, 이미 수많은 조선인이 학살된 뒤였다. 자경단에 학살당한 상당수의 희생자들은 암매장되었다. 학살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는 도쿄에 흐르는 하천, 스미다가와(隅田川)와 아라카와(荒川)가 떠내려오는 시체 때문에 피로 물들었다고 한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은 학살
일본 정부는 유언비어를 공식 확인하였으나, 피해자의 수를 줄여서 발표하고, 자경단 일부를 연행, 조사하였으나, 형식상의 조치에 불과해 기소된 사람들도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무죄 석방되었다. 학살에 대한 사법적이든 도의적이든 책임을 진 사람도 기구도 없었다.
일본 정부는 관동대지진 때 학살된 조선인은 모두 233명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일 양국이 공식적으로 확인한 숫자는 6,661명이다. 그러나 2013년에 발굴된 독일 외무성이 1924년 3월 작성한 영문 사료(MASSACRE OF KOREANS IN JAPAN )에 따르면 기존에 알려진 것의 3~4배에 해당하는 총 2만3천58명이었다. [관련 기사]
희생자가 6천이든 2만이든 간에 변하지 않는 것은 이들이 무고한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일제의 식민지 농정으로 땅을 잃고 생존을 위해 일본과 만주로 이동해야 했던 조선의 농민들이었다. 일본의 자본주의 발달은 값싼 임금으로 고용이 가능한 조선인 노동자들을 유입하고 있었다.
조선인 노동자들이 일본인 노동자를 대체하면서 이들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반감이 높아졌고 이는 일본 민중이 조선인 학살에 나서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였을 때 일본 치안 당국은 조선인 민족운동을 잔뜩 경계하고 있었다. 3·1운동 이후 일본 내 조선의 민족운동이 성장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일본인 사회주의자들과 교류하고 있었다.
당시 1920년대 초반 일본에서는 노동운동, 민권운동, 여성운동 등 지배 권력에 대한 민중의 저항과 권리 찾기 운동이 활발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분위기를 사회적 혼란 또는 제국의 위기로 판단한 당국은 예상치 못한 자연재해인 대지진을 계기로 조선인을 희생양 삼아 질서를 유지하려 했다. 당국이 ‘조선인 폭동설’을 날조·유포했다고 볼 수 있는 근거다.
조선인 학살과 더불어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인권운동가, 반정부 행위자 등 경찰에 요주의 인물로 등록되어 있던, 주로 좌파 계열의 운동가에 대한 학살도 동시에 진행되었다. 조선인 학살에 묻어서 말썽 많은 인물들도 ‘청소’한 것이었다.
저명한 아나키스트 오스기 사카에(大杉栄)와 그의 6살짜리 조카, 페미니스트 사회주의자이자 오스기의 아내인 이토 노에(伊藤野枝)가 아마카스 마사히코(甘粕正彦) 중위가 이끄는 군경에 체포되어 죽을 때까지 구타당한 뒤, 우물에 버려진 아마카스 사건이 일어난 것도 이때였다.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이 일어난 지 어느덧 90년이 훌쩍 지났다. 학살의 기억과 역사는 도쿄의 요코아미초(横網町) 공원과 지바현 후나바(船橋)에 세워진 희생 조선인 추모위령비 등 몇 개의 빗돌로만 아련하게 남았다.
학살의 기억은 아련하고 역사는 왜곡되고
일본 중학교 역사 교과서가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발생한 조선인 학살사건을 미화하거나 누락해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한 것은 2013년이다. 몇몇 교과서에서 학살을 주도한 주체와 피해자의 범위(특히 조선인이 최대의 피해자였다는 사실)를 분명히 기술하지 않고 있거나 학살의 주체와 관헌의 학살 개입 사실을 누락하고 있는 것이다. 3년이 지났지만, 이 교과서가 바로잡혔다는 소식은 물론 없다.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사건이 일어난 지 90년이 훌쩍 지났지만, 우리 정부는 일본 정부에 공식 사과를 요구한 적도 진상조사를 제안한 적도 없다. 한일기본조약에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하였기 때문일까.
하긴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가 지난해 한일 위안부 협상에서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라는 형식으로 재연되는 상황에서 무엇을 말하랴.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식민지 시기의 역사는 여전히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되던 1960년대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게 아닌가 싶은 이유도 거기에 있다.
2016. 8. 31. 낮달
*‘간토(關東)대학살’ 100년을 맞아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는 <은폐된 학살, 기억하는 시민들> 기획전이 열리고 있다. 관련 기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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